가장 먼저, 그리고 끝까지 - 세계일보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 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109) 또는 자살예방 SNS상담 '마들랜'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1화

아이디 '초록나무'의 아빠

"아빠가 음악 얘기해주는 게 제일 좋아."

※ 세계일보 탐사보도팀은 자살예방법이 명시한 권리와 책임을 알리기 위해 이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딸이 광호에게서 가져간 것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광호는 한참 뒤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딸 하진은 퇴근 후 현관문에 들어선 광호에게 손부터 내밀었다.

“아빠, 차 키 주세요.”

고등학교 1학년 하진의 손에는 노란색 앨범 커버가 씌워진 카세트테이프가 들려 있었다. 영국 록밴드 ‘블러’의 3집 앨범 ‘파크라이프’다. 자기가 태어나기 13년 전에 발매된 앨범을,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자신의 CD장에서 용케 찾아내 좋아하는 하진을 보며 광호는 생각했다. ‘취향도 유전이 될까.’

자신과 똑같은 동그란 안경을 코에 걸친 딸 아이의 손에 노란색 카세트테이프가 들려 있는 날이면 광호는 별말 없이 차 열쇠를 쥐여줬다.

광호가 가정을 꾸리기 전부터 지금까지 꼬박 21년을 버틴 쌍용자동차 2005년식 렉스턴. 불과 3년 전만해도 그 낡은 상아색 차는 하진만의 작은 공연장이었다. 하진은 녹색 번호판과 카세트플레이어가 달린 아빠 차를 타러 아파트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눅눅한 지하의 공기를 마시며 바닥에 검게 남은 타이어 자국 사이를 지나 렉스턴 운전석 문을 열었다. 아빠가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던 “시동 말고 전원만 켜”라는 말을 떠올렸다. 말랑하게 꺼진 검정색 가죽 시트에 앉아 차 열쇠를 꽂았다. 손목에 힘을 주어 시동 장치 한 칸만 돌리자, 검은 배경 오디오 데크 액정에 초록빛 글자 ‘NO TAPE’(테이프 없음)가 툭 떠올랐다.

하진이 블러의 앨범을 데크 입구에 가져다 대자 테이프가 부드럽게 빨려 들어갔다. 등받이에 몸을 편히 기댔다. 곧이어 렉스턴 실내 곳곳에 박힌 여섯 개의 스피커가 소리를 뿜어냈다. 앨범의 첫 트랙 ‘걸즈 앤 보이즈’의 뿅뿅거리는 신디사이저 소리가 먼저 차내에 퍼졌다. 손끝으로 다이얼을 돌려 볼륨을 키웠다. 그러자 묵직한 베이스 라인이 차 바닥을 타고 하진의 발바닥까지 울렸다.

하진은 한동안 이 앨범에 푹 빠져있었다. 자주 되감아 듣던 탓에 테이프 첫 부분이 끊어지기까지 했다. 광호는 갑자기 소리가 멈췄다며 테이프를 들고 올라온 딸에게 얇은 갈색 필름 폭에 맞는 셀로판 테이프로 필름을 이어 붙여줬다.

취향과 감성 그리고 안경 모양까지 아빠를 빼다 박은 아이였다. 광호의 아내는 남편을 보며 하진의 눈코입을 떠올렸고, 광호는 그런 딸을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었다. 아빠와 가장 닮은 딸을 자신이 모를 리 없다는 확신. 그 확신은 광호의 가장 오래 남은 자책이 됐다.

하진의 세계가 좁아지기 시작한 건 2020년 봄이었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정부는 학교 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3월 2일 첫 등교일은 네 차례나 번복되며 미뤄졌다. 하진은 서울 강북 산자락을 따라 들어선 대단지 아파트의 방안에만 내내 머물렀다. 새 교복을 걸어두고 기다린지 99일째 되던 6월 8일에야 중학교 1학년의 등교 수업이 시작됐다.

하진은 식구 중 가장 먼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막 등교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보름간의 격리를 마치고 학교에 돌아갔을 때 교실은 이미 서로의 자리를 만든 뒤였다. 단 15일이었지만 마스크를 쓴 아이들은 그사이 무리를 이뤘다. 하진은 이미 자리가 정해진 교실에 뒤늦게 들어가야 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행되면서 방 안에 머무는 시간도 자연스레 늘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는 시간도 길어졌다. 하진은 가족에게 “우울하다”고 자주 말했다. 이 무렵 하진은 가족과 말다툼을 하고 나면 감정을 조절하기 어려워했다. 날카로운 말들을 골라 가족에게 쏟아냈다. 삶의 끝자락을 건드리는 단어를 던지는 날도 있었다.

엄마는 우울하다고 토로하는 하진의 손을 잡고 병원으로 향했다. 진료실을 나오던 날, 하진의 손에는 약봉지가 쥐여 있었다.

코로나19는 끝날 기미가 없었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속절없이 길어지면서 하진이 친구들과 얼굴을 마주할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그나마 광호를 안심시킨 건, 집 안에 쌓여 있던 오래된 앨범을 하나씩 꺼내 들던 하진의 모습이었다. 광호가 학창 시절부터 모아온 CD와 카세트테이프들. 플라스틱 케이스가 뿌옇게 닳은 앨범들을 하진은 보물찾기라도 하듯 한참을 뒤적였다.

음악은 방 안에 틀어박혀 있던 하진을 문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광호는 거실 텔레비전에 미국 록밴드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노래 ‘대니 캘리포니아’ 뮤직비디오를 틀었다. 잘게 굴리며 시작하는 드럼 소리가 하진의 방문을 두드리면, 방 안에 누워 있던 하진은 거실로 나와 아빠 옆에 앉았다. 발을 까딱거리며 박자를 짚을 때마다 화면 속 멤버들은 그에 맞춰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번들거리는 머리에 하이웨이스트 나팔바지를 입은 로큰롤 가수로 시작해, 반짝이는 글램 록 스타, 검은 립스틱을 짙게 바른 헤비메탈 로커와 그런지 록 밴드를 거쳐 다시 ‘레드 핫 칠리 페퍼스’로 이어졌다. 한 편의 영화처럼 록의 변천사가 빠르게 흘러갔다. 광호는 그 장면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설명했다.

“이 장면은 록이 처음 태어나던 시절. 자 여기서부터는 스타일이 완전히 달라져.”

그러는 동안 하진의 표정도 달라졌다. 어느새 화면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광호의 손끝을 따라가고 있었다. 영상이 끝나자 광호는 소파에서 몸을 떼며 방에 들어가려 했다.

“아빠 가지 마요. 아빠가 음악 얘기해 주는 게 제일 좋아.”

그 한마디에 광호는 딸이 자신 곁에 가까이 붙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시기 팬데믹은 끝이 없었고, 하진의 우울감도 쉽게 걷히지 않았다. 하진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머무는 시간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4월28일, 정세진 기자가 기타를 메고 종로구 낙원상가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낙원상가는 생전 하진이 아빠의 기타에 피에조 픽업을 달기 위해 직접 찾았던 곳이다. 유희태 기자
4월28일, 정세진 기자가 기타를 메고 종로구 낙원상가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낙원상가는 생전 하진이 아빠의 기타에 피에조 픽업을 달기 위해 직접 찾았던 곳이다. 유희태 기자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의 한 갤러리에 하진이 하루에도 서른 개가 넘는 글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엄마가 먼저 알아챘다. 혐오와 비하, 자학과 우울, 극단적인 감정을 쏟아내는 익명의 글들이 올라오는 공간이었다. ‘친구가 없다, 왜 이렇게 못났을까, 나 정도면 찐따인가’라고 뱉어내는 누군가의 우울과 조롱이 뒤섞인 문장들이 농담처럼 소비됐다. 커뮤니티에 가입하지 않아도 누구나 게시물을 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하진의 엄마는 로그인이라는 문턱이 없는 공간에서 딸의 흔적을 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진의 활동명은 ‘초록나무’였다. 영국의 록 밴드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 ‘조니 그린우드’에서 따온 이름이다. 엄마는 딸의 활동명으로 올라오는 글을 틈틈이 모니터링했다. 글을 쓸 때마다 사진을 함께 올려야 하는 커뮤니티 특성상 하진은 라디오헤드의 보컬 ‘톰 요크’의 사진을 붙여넣었다. 그 갤러리에 글을 쓰는 하진을 보며 “관심받고 싶어 하는 나이니까” 하고 넘어가려 해도 마음 한구석은 편치 않았다. 광호는 하진에게 “거기에 글 쓰지 말라”고 몇 차례 타일렀다.

광호는 하진의 손에 휴대폰 대신 무언가라도 쥐여주고 싶었다. 딸의 15번째 생일에 맞춰 기타를 깜짝 선물로 준비했다. 노란빛에서 짙은 갈색으로 번지는 선버스트 색상의 30만원짜리 국산 전자기타였다. 12월 생일, 집으로 배송 온 기타를 받아든 하진은 환하게 웃었다.

하진의 웃는 모습은 광호의 젊은 날과 계속 겹쳐졌다. 어느 날 하진은 광호가 연주하던 통기타를 가지고 종로구 낙원상가에 가서 줄을 갈고, 피에조 픽업을 달고 돌아왔다. 통기타의 울림을 스피커로 키워주는 장치였다.

4월28일, 종로구 낙원상가의 세영악기에서 통기타 브릿지 위 새들에 피에조 픽업을 맞춰넣고 있는 모습이다. 유희태 기자
4월28일, 종로구 낙원상가의 세영악기에서 통기타 브릿지 위 새들에 피에조 픽업을 맞춰넣고 있는 모습이다. 유희태 기자

그해 가을, 하진은 그렇게 손본 아빠의 기타를 어깨에 메고 학교 축제 무대에 올랐다. 학교 정문 앞 계단이 그날의 무대였다. 하진은 가장 좋아하는 라디오헤드의 ‘크립’을 흰색 마스크 너머로 불렀다.

“I’m a creep, I’m a weirdo. What the hell am I doing here? I don’t belong here.”
(난 어딘가 이상한 사람이야. 난 별난 사람이야.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나는 여기에 속하지 않아.)

마스크를 쓴 채 운동장에 반원처럼 퍼져 앉은 친구들은 정박에 맞춘 손뼉을 쳤다. 축 처진 기타 멜로디는 반듯한 박수 소리를 비껴가고 있었다. 광호는 자신의 기타를 메고 노래하는 딸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봤다.

딸과 통하는 건 음악만이 아니었다. ‘석양의 감정’이라는 자작시가 적힌 공책을 머리맡에 두고 잠든 하진의 모습을 바라봤다. 광호는 문득 고등학생 시절 문예부에서 시를 쓰던 때를 떠올렸다. 딸의 침대에 놓인 공책을 무심코 손에 들었다. 인기척에 잠에서 깬 하진은 “아빠! 이리 내놔!”라며 공책을 휙 낚아챘다. 광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내 딸 맞네.”

하진이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던 2022년, 3년 넘게 이어졌던 코로나19 팬데믹에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4월 말, 광호와 하진이 함께 좋아하던 포스트록의 거장 ‘시규어로스’의 5년 만의 내한 공연 소식이 전해졌다.

하진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광호의 음반 이야기를 풀어내며 직접 올린 사진을 일부 편집했다.
하진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광호의 음반 이야기를 풀어내며 직접 올린 사진을 일부 편집했다. 서랍에는 밴드 ‘라디오헤드’와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 등 하진이 좋아한 앨범이 놓여 있고, 그 위로 광호가 하진과 함께 보러 가기로 했던 2022년 시규어로스 내한공연 티켓 두 장이 얹혀 있다. 유족 제공

하진이 먼저 아빠를 찾았다. 광호는 망설임 없이 8월에 열릴 공연 티켓 두 장을 예매했다. 둘이 함께 가는 첫 콘서트였다. 부녀는 공연장에서 좋아하는 밴드의 연주를 함께 듣게 된다는 사실에 한껏 들떠 있었다. 하지만 공연 당일, 시작 여덟 시간을 남기고 장비 운송 문제로 공연이 취소됐다는 문자가 날아왔다. 그날 쓰이지 못한 종이 티켓은 광호의 사무실 서랍 한쪽에 보관돼 있다.

하진은 강북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강남으로 이사했다. 걱정과 달리 고등학교에 무리 없이 적응하는 모습이었다. 방 안에만 머무르던 시간도 예전보다 짧아졌고, 학교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날이 늘었다. 선생님과 친구들까지 모두 마음에 들어 했다. “커뮤니티도 끊었다”고 말하며 가족을 안심시켰다.

안도감이 자리를 잡아가던, 2023년 4월 20일 광호의 퇴근길에 카카오톡 알림이 울렸다. 가족 단체 대화방이었다. 하진이 집 근처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쓰러져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광호는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지하철역 환승 통로 곳곳에 붙은 “뛰지 마세요. 부딪힘 많은 곳”이라고 쓰인 안내문이 광호를 스쳐 지나갔지만 발을 멈출 수 없었다. 지하 2층에 있는 화장실부터 살펴봤다. 주황색 타일 바닥에서 올라오는 축축하고 차가운 공기가 얼굴로 밀려왔다. 물 내리는 소리, 문 여닫는 소리, 손 씻는 소리가 한꺼번에 뒤엉켰다. 하진은 없었다.

지하 1층 화장실로 뛰었다. 길게 이어진 환승 통로 끝에 화장실이 보였다. 그곳에서 하진은 이미 들것에 실려 있었다. 광호는 곧바로 하진과 함께 중앙대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하진은 가족에게 “자살 시도한 거 아니야. 내일 학교 갈 거야”라고 말했다. 광호는 그 말을 믿었고, 믿고 싶었다. 딸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여겨온 그였다. 학교에 잘 적응하고 있다고, 이제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했다. 그는 희망 쪽으로 마음을 기울였다.

‘그래. 우리 딸은 내일 학교에 갈 거야.’

광호는 그날, 끊어졌던 카세트테이프를 이어 붙였던 것처럼 딸의 삶도 다시 이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중앙대병원 생명사랑위기대응센터의 이현지 자살 시도자 사례관리자에게도 하진은 망설임 없이 상담을 받겠다고 답했다. 그 자리에서 동의서도 썼다. 담담해 보이는 하진을 보며 사례관리자도 안심했다. 하진과 사례관리자는 퇴원하고 만나기로 약속했다.

병원에서 돌아온 뒤 며칠 동안 하진은 평온해 보였다. 평소처럼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광호는 딸이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닷새 뒤 저녁, 엄마는 둘째와 함께 집 근처 먹자골목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곳에서 교복 차림의 하진을 마주쳤다. 엄마는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지만 하진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근처에서 놀다가 9시까지 집에 들어갈게”라고 말하는 딸을 더 붙잡지 않았다.

그날 밖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온 광호가 집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그 이후 엄마와 둘째가 들어왔다. 밤 10시가 됐다. 하진만 들어오지 않았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아빠의 직감이 반응했다. 단순히 늦는 게 아니라는 불안이 광호의 가슴 한쪽을 눌렀다.

엄마도 불길한 예감에 휴대폰으로 온라인 커뮤니티를 열었다. 화면 위에서 떨리는 손이 그날 오후 3시 무렵에 올라온 게시물 앞에서 멈춰 섰다. 활동명 ‘설연최’가 자살 방법을 묻는 게시물이었다. 설연최는 그곳에 자살 방법을 게시했다. 그 게시물의 댓글난에 ‘초록나무’의 댓글도 보였다.

곧바로 112에 전화를 걸었다. 딸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올렸다고 알렸다.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하며 댓글 내용, 마지막으로 마주친 위치까지 숨 돌릴 틈 없이 경찰에 전했다.

방배경찰서 실종범죄수사팀을 비롯해 경찰들은 밤새 수색에 나섰다. 하진의 마지막 위치 신호를 파악하고 지역에 있는 순찰차를 끌어모아 수색 범위를 좁혀갔다. 스무 명이 훌쩍 넘는 경찰이 일대를 샅샅이 뒤졌다. 가족은 한동안 길거리에서 하진을 찾아 헤매다 자택에서 기다리라는 경찰의 안내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신고를 마친 뒤에도 엄마는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혹시라도 새로운 댓글이 올라오지 않을까, 삭제되진 않을까 몇 번이고 새로고침을 반복했다.

동틀녘, 광호는 다시 집 근처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닷새 전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이번에도 인근 화장실에 있을 가능성을 먼저 생각했다. 하진의 휴대폰 위치 추적도 지하철역 일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 광호의 휴대폰 전화벨이 울렸다. 경찰은 하진의 휴대폰 위치가 갑자기 이동하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광호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딸이 살아있다는 희망을 붙잡았다.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저 멀리 광호의 아파트 1층 출입구 앞에 구급차 한 대가 서 있었다. 경광등이 붉게 번뜩였다. 딸이 살아있을 거라는 희망과 저 불빛이 하진을 향한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붉은빛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하진의 이름이 스쳤다. ‘遐(멀 하), 辰(별 진).’ 그 이름처럼 딸이 자신에게서 멀어지지 않길….

광호는 아빠의 직감이 틀리길 간절히 바랐다.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십 층을 넘어 한 층씩 올라갈 때마다 심장도 조여왔다. 문이 열렸을 때 경찰과 구급대원이 서 있었다. 집으로 들어왔어야 할 딸은 끝내 현관문을 열지 못했다. 지난밤 커뮤니티에서 읽었던 그 불길한 단어가 하진의 옆에 놓여 있었다.

<에필로그> 올해 4월 25일, 하진의 3번째 기일. 살아있었다면 대학교 새내기가 됐을 나이다. 광호는 뒤로 큰 산을 등지고 앞으로 강이 흐르는 경기도의 한 납골당을 혼자 찾았다.

장례를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호는 하진에게 선물했던 선버스트 전자기타를 지방으로 내려가 태웠다. 햇볕에 그을린 것처럼 보이던 기타는 불길 속에 서서히 검게 변해갔다. 하진이 아빠에게서 가져갔던 통기타도 함께 태웠다. 광호는 활활 타오르는 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원목 기타 두 대에 붙은 불은 20분이 넘도록 꺼지지 않았다. 광호는 나무가 탄 냄새가 옷에 밴 채로 집에 돌아왔다.

그 뒤로 광호는 더는 20세기 음악을 듣지 않는다. 하진이 록에 입문하는 계기였던 미국 밴드 너바나부터 영국 싱어송라이터 닉 드레이크까지. 10대부터 광호의 것이었던 음악들은 이제 모두 하진과 함께한 시간 속에 있었다. 요즘 그가 듣는 것은 하진이 떠난 뒤에 발매된 음악들이다. 2025년에 데뷔한 케이팝 아이돌 그룹 키키의 ‘404(New era·새 시대)’를 가장 자주 튼다. 광호는 하진을 불러내지 않는 음악을 찾는다. 하진이 가져간 것들은 끝내 광호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어떻게 취재했나

이 기사에 등장하는 광호와 하진의 이름은 가명이다.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명과 하진의 한자 뜻은 실제와 동일하다. 응급실 사례관리자는 실명이다.

본문은 광호와의 총 10시간에 걸친 두 차례 인터뷰, 수사·공판 기록, 경찰·검찰 관계자 인터뷰, 피고인 측 변호인 인터뷰, 게시물 원본을 바탕으로 재구성됐다. 디시인사이드 관계자 인터뷰를 통해 게시물 게재·삭제 경위 및 수사 협조 과정을 교차 검증했다. 장소 묘사는 기자가 현장을 직접 확인했다. 인물과 일화는 유족이 제공한 사진과 영상을 토대로 묘사했다. 본문의 발언과 대화, 인물의 생각과 감정에 관한 서술은 광호가 직접 구술한 내용에 한정했다.

2화

죽음을 유통한 '설연최'를 잡다

"내가 이 놈은 반드시 잡는다."

※ 세계일보 탐사보도팀은 자살예방법이 명시한 권리와 책임을 알리기 위해 이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또렷한 무전기 음성이 사무실 안을 채운 건 오전 9시 무렵이었다. 서울 방배경찰서 임시청사 1층 형사당직팀 사무실에는 낮게 깔린 키보드 타건음 사이로 밤사이 들어온 사건을 정리하는 목소리가 오가는 중이었다. “학생이 실종됐다”, “최근 자살을 시도한 정황이 있다”, “지하철역 일대를 수색하고 있다”. 그 말들이 방금 출근한 형사4팀 황주영 형사의 귀에도 들렸다.

그 순간 짧은 무전 한 줄이 울렸다.

“A아파트, 변사 신고 접수.”

변사자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사무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하진이었다.

2023년 4월 26일 오전 9시, 서울 하늘에는 회색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전날 전국에 약하게 내렸던 봄비의 흔적이 서초구 방배동 골목과 아파트 외벽에 남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다시 빗방울이 떨어질 것 같은 날씨였다. 황 형사가 탄 흰색 스타렉스 형사기동대 차가 10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아파트는 외부인도 드나들 수 있는 개방된 공간이다. 이런 곳에서는 가장 먼저 외부 침입 흔적부터 확인해야 했다. 황 형사는 경비실로 향했다. 주변 폐쇄회로(CC)TV 영상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아파트 출입 시간대와 이동 경로를 맞추며 사건 직전의 흐름을 되짚었다. 그의 시선은 곧 현장으로 옮겨갔다. 여태껏 그가 본 변사 사건 현장에서 가장 앳된 얼굴이 누워 있었다.

황주영 서울방배경찰서 형사4팀 경사가 4월28일 서울 서초구 방배경찰서 임시청사 입구에 서 있다. 유희태 기자
황주영 서울방배경찰서 형사4팀 경사가 4월28일 서울 서초구 방배경찰서 임시청사 입구에 서 있다. 유희태 기자

그해 사이버수사팀에서 형사팀으로 넘어온 7년 차 황 형사는 곧바로 인터넷 커뮤니티 관계자에게 연락했다. 전날 하진이 실종 직전 ‘디시인사이드’의 한 갤러리에 자살을 암시하는 글과 댓글을 남긴 정황이 확인된 상태였다. 문제가 되는 게시물의 접속 기록을 남겨 달라고 요청했다.

변사 사건은 타살 혐의점이 없는 것으로 종결됐다. 다음 날인 27일, 하진의 아빠 광호는 검찰에서 내려온 검시필증을 받았다. 범죄 혐의 여부를 가리는 검안 절차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그제야 가족은 시신을 인계받을 수 있었고, 28일부터 사흘간 하진의 장례를 치렀다.

빈소에서 광호는 상복 차림으로 휴대전화를 들여다봤다. 화면에는 디시인사이드가 열려 있었다.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벅찬 시간, 그는 딸이 자주 이용하던 게시판 속 글과 댓글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 게시물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하진의 활동명 ‘초록나무’를 제목에 언급한 글이었다. 작성자는 ‘설연최’. 뜻도 알 수 없고, 실제 본명과도 연관성이 없는 활동명이었다. 딸이 자살을 시도하기 하루 전, 설연최가 올린 게시물엔 “유서에 나 적지 말아라”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설연최는 이미 그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 순간 장례 내내 무너져 있던 광호의 정신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광호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이놈은 반드시 잡는다.’

광호의 친척조차 대부분 하진의 장례 소식을 몰랐다. 광호는 아주 가까운 친척과 극소수의 회사 사람에게만 하진의 부고를 알렸다. 청소년 자살률이 높다는 말은 늘 뉴스 속 이야기였다. 그 비극이 당장 자신의 딸에게 벌어질 일이라고는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주변에도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 없었다. 혹은 광호처럼, 자식의 자살을 말하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장례를 마친 후 광호는 방배서를 찾았다. 손에는 두툼한 서류 뭉치가 들려 있었다. 디시인사이드 게시물을 캡처해 출력한 스무 장 분량의 고소장이었다. 피고소인은 신원 미상이었다. 알고 있던 정보는 설연최라는 활동명뿐이었다.

그 갤러리에는 설연최가 쓴 게시물이 계속 올라왔다. “초록나무 진짜로 갔냐”는 제목의 글 아래, 설연최는 “내가 보냄”이라고 댓글을 남겼다. “걍 걔가 죽기 전에 죽는 방법에 대해서 잠깐 토의했음”이라는 댓글도 달았다. 광호는 그 댓글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모두 캡처했다.

황 형사는 방배서 4층 조사실에서 광호를 마주했다. 조사실 문을 열고 의자에 앉은 광호의 얼굴에는 공허함이 느껴졌다. 황 형사는 평소 사건 조사 때처럼 사실관계를 캐묻지 않았다. 먼저 광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데 집중했다. 광호에게 하진의 마지막 시간을 말할 수 있는 곳은 사실상 경찰서뿐이었다.

수사의 쟁점은 어떤 법을 적용할 수 있냐였다. 고소장은 자살방조 혐의로 접수됐다. 황 형사는 조문과 판례를 처음부터 다시 뒤졌다. 실제 처벌 조항이 존재하는지, 이 사건의 구성요건에 정확히 부합하는 적용 근거가 무엇인지를 따져봤지만, 딱 맞아떨어지는 조항은 쉽게 보이지 않았다.

20년 차 베테랑 경찰인 윤원대 팀장은 황 형사에게 말했다. “자살예방법이 있던데, 이걸로 적용 가능할지 살펴봐라.” 윤 팀장도, 황 형사도 낯설었던 법률이다. 2019년 7월부터 시행된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자살예방법) 제19조 제1항은 ‘정보통신망을 이용해서 자살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등 자살유발정보를 유통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법이었다.

황 형사는 자살방조죄 대신 자살예방법을 적용했다.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자살유발정보를 유통한 행위 자체가 처벌 대상이었다. 설연최와 하진은 온라인으로만 아는 사이였다. 피의자가 “진짜 죽었냐”는 댓글을 남긴 점도 걸렸다. 피의자가 하진의 시도에 적극 가담할 의도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수사는 익명 커뮤니티 뒤에 숨어 있는 사람을 특정하는 작업으로 옮겨갔다. 황 형사는 과거 사이버수사 경험을 살려 디시인사이드와 즉시 접촉을 시도했다. 이미 문제가 된 게시물의 접속 기록을 요청해 둔 상태였다.

수사의 실마리는 그 접속 기록 안에 있었다. 익명 뒤에 숨어 있던 설연최의 윤곽이 드러났다. 고소 접수부터 송치까지 걸린 시간은 총 42일. 통상 수개월 걸리는 고소 사건이 한 달 반 만에 송치된 셈이다.

검사실에서도 이 법은 낯설었다. 경기 고양시 의정부지방검찰청 고양지청 4층, 오후 4시가 지날 무렵. 실무관이 카트를 밀고 민애리 검사실로 들어왔다. 카트 위에는 사건 기록철이 층층이 실려 있었다. 실무관이 방 안 가운데 민 검사의 책상 위에 서류를 올려놓았다. 민 검사가 그중 한 묶음을 꺼냈다. 검정 끈으로 단단히 묶인 기록은 민 검사가 앉은 자리에서 어깨높이 아래까지 올라왔다. 두 권 분량, 300쪽 남짓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표지에 적힌 긴 죄명이었다.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 위반’.

2021년에 로스쿨을 졸업한 2년 차 민 검사가 처음 보는 죄명이었다. 민 검사의 전담 분야는 의료·식품·환경이었다. 통상 배당되던 식품위생법, 의료법 관련 사건과는 결이 달라 보였다.

민 검사는 오른손 검지에 낀 파란 골무로 사건 기록의 첫 장을 넘겼다. 맨 앞에는 경찰의 송치 결정서가 놓여 있었다. 자살방조죄 적용은 쉽지 않을 수 있으나 자살예방법 위반은 검토할 수 있다는 취지의 의견이 적혀 있었다. 그 아래로 고소장, 경찰의 인터넷 프로토콜(IP) 주소 추적 기록, 피의자 특정 과정, 조서가 차례로 이어졌다.

그 밑으로 변사기록이 편철돼 있었다. 민 검사는 종이를 넘기며 하진의 마지막 동선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자살 방법을 어떻게 알게 됐고, 어떤 댓글에 반응을 했는지, 온라인 공간에서 어떤 말이 오갔는지가 시간 순서대로 드러났다. 마지막 하진이 머무른 현장 사진에서 민 검사의 시선이 멈췄다. 하진이 머문 곳은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이었다. 현장의 잔상이 민 검사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하진은 인터넷 게시글과 댓글을 통해 자살에 대한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나눴다. 민 검사가 사건 기록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이 무거웠던 건 바로 그 부분이었다. 민 검사는 “실은 누군가 이를 잘못된 행위라고 말하며 손을 내밀어 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죽고 싶다’는 말 속에 ‘살고 싶다’는 신호에 대해 돌아온 것은 위로나 도움이 아니었다. 구체적인 자살 방법이 전달됐다. 민 검사는 “망인이 자살에 대한 정보가 거리낌없이 증식되는 환경에 놓여 있었고, 그 누구도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이 가장 안타까웠다”고 했다.

민 검사는 형량이 높은 자살방조죄 적용 가능성부터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아직 확보되지 않은 증거가 더 있다면 자살방조죄로 처벌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경찰에 보완수사를 요구했다. 특히 첫 자살 시도 이후 사망에 이르기까지 5일 동안 하진이 익명 커뮤니티 이용자들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기록만으로 완전히 확인되지 않았다.

이후 민 검사는 국가법령정보센터 홈페이지를 열어 ‘자살예방법’을 읽었다. 제1조 목적. 이 법은 자살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책무와 예방정책에 관하여 필요한 사항을 규정함으로써 국민의 소중한 생명을 보호하고 생명존중문화를 조성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어 2019년 7월부터 시행된 제19조 제1항. ‘누구든지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자살유발정보를 유통하여서는 아니 된다.’

민 검사는 관련 판례를 찾았다. 대형 웹사이트에 ‘한국의 자살 명소’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게시물이 자살예방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례가 눈에 들어왔다. 자살의 구체적인 방법을 적시하지 않았더라도 자살을 유도하거나 실행을 돕는 정보라면 처벌이 가능하다는 취지였다. 다만 해당 사건은 정식 재판으로 이어지지 않고 약식명령으로 처리됐다. 민 검사는 해당 판결문을 증거기록에 첨부했다. 구체적인 수단이 담기지 않은 글조차 자살유발정보로 인정될 수 있다는 점이 이 사건의 판단 기준이 됐다.

3월23일, 의정부지방검찰청에서 민애리 검사가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남정탁 기자

기록을 모두 검토한 뒤 민 검사는 자살예방법으로 기소를 결정했다. 사건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온라인 기록을 확보하지 못해 자살방조죄 적용은 끝내 쉽지 않았다. 대신 온라인상에서 구체적인 방법과 실행을 부추기는 댓글과 게시물은 자살예방법 위반의 구성요건에 들어맞는다고 판단했다.

다만 정보통신망을 이용해 자살유발정보를 유통한 혐의로 정식 재판에 넘겨진 사례가 없었다. 이에 적용할 형량의 기준이 뚜렷하지 않았다. 민 검사는 부장검사와 양형 수준을 두고 논의하기도 했다. 그렇게 사건은 재판으로 넘어갔다.

설연최는 법정에 세워졌다. 그해 성인이 된 손모(19)씨였다. 손씨는 자신의 군 면제를 게시물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성인인 설연최가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하진의 계획을 알고도 막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겼다.

고양시에 사는 피고인 손씨는 1심 재판을 불과 며칠 앞둔 3월 12일 입원했다. 손씨의 국선변호인은 첫 상담조차 피고인 대신 그의 아버지와 진행해야 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 안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을 목격했고, 그 이후에는 출근할 때조차 아들을 데리고 다닐 정도로 위태로운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법정에서 피고인 손씨의 표정은 또렷하게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무색무취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재판 내내 큰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한 태도를 보였다. 판사가 “아버지가 아들 이름을 간판에 걸어서 장사할 정도로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왜 자꾸 죽으려 하느냐”고 물었을 때도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 형사11부 김주완 판사는 2024년 3월 29일 손씨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 온라인상 자살유발정보 유통 행위가 자살예방법으로 공판을 거쳐 유죄가 선고된 첫 사례였다. 재판부는 피고인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피고인의 아버지는 재판 결과와 관련해 취재진에게 “산 사람이라고 마음이 편하겠냐”고 말했다. 아들이 반복적으로 자살시도를 했던 양극성 정동장애(조울증) 환자임을 언급하며 국가의 치료와 돌봄이 필요하다고도 주장했다.

광호는 1심 유죄 판결 이후 다시 디시인사이드 검색창에 하진이 봤던 게시물에 언급된 자살유발정보를 입력했다. 같은 자살 정보를 본 누군가에게 비극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광호가 언론 앞에 나선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사람이 실제로 죽지 않았더라도 자살유발정보를 올리는 행위 자체만으로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며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3월30일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사무실 출입문에 회사 로고가 붙어있다. 최상수 기자
3월30일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사무실 출입문에 회사 로고가 붙어있다. 최상수 기자

그해 1심 재판이 끝나고 3개월도 지나지 않아, 디시인사이드에는 ‘자살 꿀팁’이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와 있었다. 하진이 댓글을 남겼던 게시물과 같은 사진이 첨부돼 있었고, 여기에 더해 구체적인 설명까지 적혀 있었다. 광호는 해당 게시물 작성자를 상대로 고발장을 작성했다. 하진이 사건의 고소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문장만 새로 추가됐다. “참고로 고발인의 딸이 동일 범죄로 인해 세상을 떠났으며, 피고인에 대해 1심 판결 유죄가 나 있는 상황입니다.”

피고발인의 성명은 불명. 적을 수 있던 것은 디시인사이드의 갤러리 이름, 활동명, 유동 IP뿐이었다. 고발 이유는 자살예방법 제19조 제1항 위반이었다. 그는 게시물 캡처 화면과 인터넷 주소를 첨부해 종로경찰서에 제출했다. 경찰이 확인하려 했을 때 해당 게시글은 이미 볼 수 없도록 조치돼 있었다. 지워진 게시글은 조치 이후 3개월이 지나면 영구히 삭제된다. 디시인사이드로부터 받은 정보 역시 게시물 작성 당시의 IP 주소뿐이었다. 수사는 거기서 멈췄다.

또 다른 갤러리에서는 한 사용자가 “자살 방법을 알려드림”이라는 제목으로 외부 웹사이트 주소를 게시했다. 이 주소는 자살 방법을 소개하는 11분 분량의 영상이었다. 경찰은 디시인사이드에 IP 주소를 받았으나 그것마저 해외 IP로 확인되면서 작성자를 특정하지 못했다.

다른 사건도 비슷했다. 한 이용자는 “지금 자살 마려운 새끼들 참고해라”라는 문장과 함께 자살 방법을 적었다. 경찰 조사에서 그는 “당시 테슬라 주가 폭락으로 주식 관련 갤러리에 자살하고 싶다는 글이 계속 올라오자 사람들을 놀리고 싶은 마음에 해당 게시글을 작성했다”고 진술했다. 종로서는 이를 자살유발정보가 아닌 유해정보로 판단하고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자살예방법에서 자살유해정보는 개인의 감정 표출이나 고통 호소로 분류돼 처벌이 아닌 관리의 대상이 된다. 이와 달리 자살유발정보는 타인의 자살 실행을 돕거나 부추기기 위한 정보를 말한다. 실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내용도 포함된다.

박주돈 디시인사이드 부사장은 이런 문제를 두고 “사이트를 차단하면 이용자들이 다른 플랫폼으로 이동하는 풍선효과가 생길 수 있다”며 “단순히 공간을 없애는 방식보다 근본적인 자살예방 대책이 함께 논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디시인사이드는 자살 관련 키워드 약 850개가 검색되지 않도록 제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살유발정보 감시는 광호의 신고처럼 상당 부분 민간에 의존하고 있다.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을 통해 접수된 자살유발정보 신고 건수는 2019년 3만 2588건에서 2023년 30만 3636건으로 늘었다. 4년 만에 9배 가깝게 늘었다. 모니터링 상당수는 ‘지켜줌인’이라 불리는 자원봉사자들에게 맡겨져 있다. 2024년 9월 기준 활동 인원은 884명. 이들이 온라인 게시글을 발견해 신고하면 재단이 해당 게시물의 삭제 여부를 확인한다.

광호는 어느 순간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너무 극렬한 놈이 되는 건 아닌가. 자살유발정보에 집착하는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 정도로 그는 같은 화면을 반복해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올해 3월 디시인사이드의 검색창을 다시 열었다. 딸을 죽음으로 몰았던 검색어를 입력했다.

그 방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진이 세상을 떠나고 고발장을 쓸 때와 똑같은 화면이었다. 달라진 건 조회 수뿐이었다. 2023년 당시 243회였던 숫자는, 올해 3월 447회로 늘어 있었다. 하진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200번이 넘게 그 게시물이 누군가에게 읽혔다.

어떻게 취재했나

이 기사에 등장하는 광호와 하진의 이름은 가명이다. 경찰관·검사·판사와 민간 플랫폼 임원은 실명이다. 피고인은 성씨만 표기했다.

본문은 광호와의 총 10시간에 걸친 두 차례 인터뷰, 수사·공판·고소장 기록, 경찰·검찰 관계자 인터뷰, 피고인 측 변호인·피고인 아버지 인터뷰, 게시물 원본을 바탕으로 재구성됐다. 디시인사이드 관계자 인터뷰를 통해 게시물 게재·삭제 경위 및 수사 협조 과정을 교차 검증했다. 본문의 발언과 대화, 인물의 생각과 감정에 관한 서술은 모두 당사자가 직접 구술한 내용에 한정했다.

3화

사례관리자의 무게

"생명사랑위기대응센터가 뭐 하는 곳이죠?"

※ 세계일보 탐사보도팀은 자살예방법이 명시한 권리와 책임을 알리기 위해 이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미선의 자리는 병원 5층 전공의실에 있다. 독서실처럼 다닥다닥 붙은 나무 책상 사이, 두 사람이 나란히 지나기 비좁은 통로 끝 구석. 책상 하나, 의자 하나. 병원이 내준 자리다. 전공의들의 공간이라 큰소리를 낼 수 없다. 환자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면 미선은 서둘러 일어나 통로를 빠져나간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길을 오간다.

미선은 응급실에 설치된 생명사랑위기대응센터의 자살 시도자 사례관리자다. 10년째 현장을 지키고 있는 그는 자살 시도자에게 최소 4회의 단기 상담을 제공하고, 지역 자살예방센터 등에 연계하는 일을 한다. 시도 정보를 기록하는 것도 미선의 몫이다. 보건복지부가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자살예방법)’ 제20조에 근거해 2013년 시작한 사업이다. 첫해 21개 병원에서 출발해 올해 5월 95곳으로 늘었다.

10년 전 미선의 첫 업무 공간은 병원 중환자실 한가운데였다. 사방이 병상으로 둘러싸여 환자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위치였다. 어느 날, 한 환자의 모니터에서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던 초록색 선이 한순간 직선으로 길게 뻗어 나갔다. 의료진이 급히 침상으로 달려들었다. 의사는 깍지 낀 두 손을 환자의 가슴 위에 얹고 강한 압박을 반복했다. 옆에 선 간호사는 정맥주사 라인을 잡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미선은 자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

미선은 자주 그렇게 생각했다. 극한의 의료 현장에 섞여 있는 사회복지사라는 자신의 존재는 이질적이었다. 주변은 쉴 새 없이 움직이는데, 미선만 그 자리에 섬처럼 붙박여 있었다. 분주한 의료진을 피해 자살 시도 환자 관리 업무를 이어갔다. 사례관리자에게 사무공간을 보장해야 한다는 지침은 있지만, 그 공간의 환경까지는 규정하지 않는다. 10년이 흐르는 동안 미선의 자리는 중환자실 한가운데에서 전공의실 구석으로 옮겨졌다.

2월11일 응급실 생명사랑위기대응센터에 근무하는 자살 시도자 사례관리자들이 병원 복도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유희태 기자
2월11일 응급실 생명사랑위기대응센터에 근무하는 자살 시도자 사례관리자들이 병원 복도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유희태 기자

미선은 매일 오전 8시에 출근한다. 자살 시도자의 정보를 시스템에 입력하고 추적하는 일은 상담만큼이나 시간이 소요된다. 컴퓨터를 켠 뒤 응급실 기반 자살 시도자 사후관리시스템 ‘스페디스(SPEDIS)’에 접속해 전날 기록을 훑는다. 자살 시도로 내원한 환자 수와 그 옆 상담 동의 여부란에 시선이 길게 머문다. 미선은 모니터 아래에 붙여 둔, 작은 메모지를 바라본 뒤 전공의실을 나선다.

‘우리 모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

미선의 목적지는 1층 복도 끝에 있는 응급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걷는다. 미선은 응급실에서 자살 시도 환자를 만난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2024년 자살 사망자 수는 1만4872명, 하루 평균 41명꼴이다. 이 수치는 세상을 떠난 사람만 반영한다. 같은 해 권역·지역 응급의료센터를 찾은 자해·자살 시도 환자는 3만915명. 자살 사망자 통계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돌아온 사람들이다. 이들이 미선이 만나는 환자다.

삶의 끝에 선 자살 시도자를 붙잡는 자리였지만 정작 사례관리자는 무방비 상태로 현장에 내던져졌다. 미선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정신보건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다. 정신건강병원에서 1년, 장애인 사회복지시설에서 3년, 정신보건센터에서 6개월을 근무했다. 그러던 중 한 병원에 생명사랑위기대응센터가 신설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례관리자로 일해 보라는 주변의 권유에 마음이 움직였다.

자살 시도자를 만나는 일은 4년6개월의 임상 경력을 쌓은 미선에게도 낯선 영역이었다. 환자를 마주하는 순간마다 망설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자해하면 안 돼요. 몸이 다 망가져요. 모르셨어요?”

“미선 선생, 죽겠다는 사람이 그런 걸 신경 쓰겠어?”

환자가 미선을 빤히 보며 답했다. 질문은 번번이 어긋났다. 변증법적 행동치료, 인지행동치료, 수용전념치료. 학교에서 배운 상담 기법들은 현장에서는 좀처럼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복지부의 ‘응급실 기반 자살 시도자 사후관리사업 실무자 매뉴얼’과 교육은 각종 돌발 상황을 담아내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자살 시도자 다수가 상담이나 연계를 거부한 채 병원을 떠났다. 그리고 얼마 뒤 재시도로 다시 병원에 왔다. 2024년 전국 생명사랑위기대응센터를 방문한 자살 시도자 2만3247명 중 43.6%인 1만141명이 재시도자였다.

“오늘은 제발 환자가 없기를….”

매일 아침 미선은 마음속으로 같은 말을 되뇌었다.

3년을 혼자 전전긍긍하던 미선은 결국 자신을 가르쳤던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일이 쉽지 않은 게 맞다. 언제든지 와라.” 교수는 슈퍼비전을 제안했다. 사례관리 과정에 대해 전문가의 지도와 점검을 받는 교육이었다.

약 3년에 걸쳐 서른 번의 교육이 진행됐다. 한 달에 한 번, 미선은 교수와 함께 자신이 놓친 환자 사례에 대해 공부했다. 사례관리자에게 환자를 놓친다는 말은, 그 환자가 재시도 끝에 사망했다는 의미다. 둘은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 어떤 신호를 흘려보냈는지 하나씩 되짚어 나갔다. 어두웠던 길 끝에 작은 불빛이 켜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환자들은 미선의 손에서 미끄러졌다.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미선의 마음에 체념이 쌓여 갔다.

5년 차 사례관리자가 되던 해 6월, 미선은 일본의 도쿄자살방지센터로 단기 연수를 떠났다. 오래된 건물 2층 사무실에서 푸근한 인상의 무라 아키코를 만났다. 18년째 자살예방 상담 전화를 받아 온 봉사자였다. 미선은 그에게 자살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봉사자는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내가 그들의 전화를 받는 마지막 사람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중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것이 자살을 막는 방법이 아닐까요.”

그 한마디에 지나온 시간에 대한 후회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스페디스 입력을 위해 환자의 마음보다 개인정보와 생계 형편을 먼저 물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자살 시도자를 바꾸려 애썼던 자신의 모습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이 몇 번이고 병원을 찾았을 때 기꺼이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으로 남는 것. 미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그것임을 그제야 알았다.

미선이 노력해도 모든 내담자가 지역 상담 기관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자살 시도자에게 기관 연계는 ‘내게 정신적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과 같다. 생명사랑위기대응센터의 사후관리 서비스 동의율은 2025년 67.3%다. 그러나 지역 상담 기관으로 연결된 비율은 같은 기간 44%에 그쳤다. 특히 개인정보 수집·이용 및 제공 동의서에 서명해 달라는 이야기를 꺼내면 환자들은 머뭇거렸다. 자신의 자해 이유나 자살 시도가 기록으로 남을까 두려워서였다. 결국 미선이 할 수 있는 일은 설득을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미선의 옆 책상은 비어 있다. 한때 미선에게도 동료가 있었다. 하지만 동료들은 업무에 적응하지 못해 금방 자리를 떠났다. 한 동료는 환자와의 만남에서 긴장을 놓지 못해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또 다른 동료는 매년 계약 갱신을 앞두고 불안에 떨었다. 서랍이 비워지고 흰 가운이 반납되는 일이 반복됐다.

미선은 다시 동료를 찾고 있다. 자살 시도자를 만나 본 고연차 경력자를 바라지만, 예산 앞에서 멈춘다. 센터에 배정된 올해 정부 사업비는 2인 기준 약 1억390만원. 이 안에서 인건비와 운영비를 모두 감당해야 한다. 연차가 높은 미선의 인건비를 빼고 나면, 남는 자리에는 갓 일을 시작한 저연차 한 사람을 채울 수 있을 뿐이다. 미선과 함께 일했던 동료들도 모두 그 자리에서 시작했다.

인건비를 맞추고 나면 운영비, 공공요금, 사업자 부담금 등 이름조차 낯선 지출 항목들이 남은 예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업무 장비 구매와 교육 비용을 아껴도 부족해, 프린터 잉크·볼펜 같은 소모품은 사비로 채우기도 한다. 빠듯한 예산 탓에 센터장과 부센터장을 맡은 정신건강의학과와 응급의학과 교수들은 월 25만원의 정책 직급 수당을 사양하기도 했다.

미선이 새 동료를 기다리는 사이 다른 병원 생명사랑위기대응센터에서 누군가는 등 떠밀리듯 짐을 쌌다. 3년 차 사례관리자 지영이었다. 지영은 지난해 12월31일 계약이 만료됐다. 사례관리자의 계약 기간은 2년. 현장을 익히고 환자들과 신뢰가 쌓일 즈음 계약은 종료된다. 자살 시도 환자를 다루는 경험이 축적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정작 그 자리에 오래 머무를 수 없는 구조였다. 지난해 전국 93개 센터에 종사하는 사례관리자 243명 중 200명(82%)은 비정규직, 43명은 무기계약직이었다.

지영은 센터장의 도움으로 계약 기간보다 1년을 더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1년 뒤, 병원 인사팀은 더 이상의 계약 연장은 어렵다는 입장을 통보했다. 지영만의 일이 아니었다. 함께 일하던 두 동료 역시 떠나야 했다. 센터는 자살 시도 환자를 돌본 경력자가 없는 상태로 되돌아갔다.

지영은 3년 동안 총 350명의 자살 시도자를 만났다. 병원으로 이송된 환자 정보는 지영의 업무용 휴대폰으로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4월28일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 응급의료센터 앞. 대원들이 119구급차에서 환자를 들것으로 옮기고 있다. 유희태 기자
4월28일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 응급의료센터 앞. 대원들이 119구급차에서 환자를 들것으로 옮기고 있다. 유희태 기자

‘A-01 자살/자해, 박○○(F/87)’

‘A-11 자살/자해, 최○○(M/33)’

응급실 A구역 1번 침대에 87세 여성 박모씨가 자살 시도나 자해로 이송됐고, 11번 침대에는 33세 남성 최모씨가 같은 이유로 실려 왔다는 뜻이었다.

‘A-07 자살/자해, 김○○(F/21)’

2023년 처음 만난 스물한 살 은혜는 대학을 자퇴한 상태였다. 반복되는 자해로 지영은 일주일에 한 번꼴로 은혜를 만나야 했다. 상담실에는 매번 침묵만 흘렀다. 지영은 대답을 재촉하는 대신 “밖에서 걷자”며 은혜의 손을 잡았다. 먼저 속내를 꺼낸 건 은혜였다. 지영은 다그치지 않았다. 오가는 이야기 속에서 엉켜 있던 은혜의 마음도 조금씩 정리돼 갔다. 어느 날 은혜는 “선생님처럼 흰 가운 입고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던 은혜에게 처음으로 닿고 싶은 미래가 생기고 있었다.

자해로 병원을 찾던 은혜의 발걸음도 점차 뜸해졌다. 일주일에 한 번이던 상담은 한 달에 한 번으로, 다시 석 달에 한 번으로 줄어들었다. 2024년 은혜가 병원을 마지막으로 찾은 날, 작은 편지 한 통이 지영의 손에 건네졌다. 종이 위에는 ‘선생님과 병원에서 같이 일하고 싶으니 오래 일해 달라’는 눌러 쓴 글씨가 남아 있었다. 지영은 한참 편지를 바라보다가 답장을 적었다.

‘언제든지 힘들면 찾아와. 내가 기다리고 있을게.’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지영이었다. 지난해 12월, 퇴사 직전 휴가에서 복귀한 날이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간호사는 은혜가 찾아왔다고 말했다. 지영은 곧장 전화를 걸었다. 은혜는 “왜 퇴사하시는 거예요?”라며 서운함을 내비쳤다. 지영은 “집에 일이 있다”고 둘러댔다. 은혜는 늦깎이 간호학과 신입생이 되어 있었다. 은혜를 기다리겠다던 지영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은혜처럼 스스로 삶으로 돌아온 사람은 드물었다. 많은 환자는 지영의 손끝에서 영영 멀어졌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자신의 힘으로 좌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영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사람이었다. ‘내가 그때 말을 잘못했나.’ 아주 작은 가능성 하나까지도 자신의 잘못처럼 느껴졌다.

환자가 세상을 떠난 날이면 어김없이 악몽을 꿨다. 어느 봄밤 새벽 2시 무렵, 안방 침대에서 잠들어 있던 지영의 남편이 비명을 듣고 눈을 떴다. 옆에서 자던 지영이 “내가 안 했어요”라고 소리쳤다. 잠에서 깬 지영은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다 괜찮아, 네 잘못 아니야.” 남편은 지영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3월 12일 전직 자살 시도자 사례관리자가 길거리 의자에 앉아 있다. 이재문 기자
3월 12일 전직 자살 시도자 사례관리자가 길거리 의자에 앉아 있다. 이재문 기자

증상이 심해질 때는 생명사랑위기대응센터 인근에 있는 한 상담 기관으로 향했다. 시에서 운영하는 청년 대상 집단상담 프로그램이 열리는 곳이었다. 센터를 지원하는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에서도 사례관리자의 정신적 소진을 관리하기 위한 집합 교육이 연 4회 운영된다. 하지만 지영에게 필요한 건 즉각적인 상담이었다.

“같은 상담자로서 잘 아시겠지만….”

이 말이 상담사의 입에서 나올까 봐 지영은 늘 조마조마했다. 사전 질문지 직업란에는 ‘회사원’이라고 적었다. 신원이 들통나면 자신이 내담자가 아니라 다시 상담자가 될 것 같았다. 지영은 업무를 내려놓은 채 앉아 속내를 털어놓고 싶었다. 환자에 관한 고민을 꾸며낸 회사 동료 이야기로 바꿔 풀어놓았다.

현재 지영은 지방의 한 공공기관에서 통합사례관리자 업무를 맡고 있다. 복합적인 어려움을 겪는 대상자를 위해 복지·의료·고용 등 다양한 사회보장서비스를 연계하는 일이다.

업무 중 지영의 휴대폰은 수시로 울린다. 그가 떠나온 생명사랑위기대응센터에서 걸려 오는 전화다.

“선생님, 언제까지 제가 다 알려드려야 해요?”

지영은 한숨을 쉬었다. 신규로 채용된 사례관리자들은 업무가 막힐 때마다 전임자를 찾았다. 심지어 센터장은 지영에게 돌아올 수 없느냐고 제안했다. 그렇다고 불확실한 계약직 신분에 다시 몸을 내던지긴 싫었다. 전화를 끊은 지영은 이 구조가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미선의 센터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계약 기간이 끝나면 언제든 병원을 떠날 수 있었다. 다만 미선은 불안함에 휘둘리지 않기로 했다. 환자를 위해 버텨온 시간을 생각하며 오늘 하루에 집중했다.

그렇게 전화벨이 울리고, 응급실 호출이 들어오고, 행정 문서가 쌓이는 동안 하루가 저문다. 미선은 다시 전공의실로 돌아온다. 다닥다닥 붙은 책상 사이를 지나, 아침에 비웠던 자리에 앉는다. 통로를 지나는 사이 전공의들이 외부인을 보듯 미선을 힐끗 쳐다본다. 어제 만난 병원 행정 직원이 떠올랐다.

“생명사랑위기대응센터가 뭐 하는 곳이죠?”

미선은 이렇게 되물었다.

“벌써 10년이 넘은 곳인데 아직 모르세요?”

예전 같았으면 한참을 쏘아붙였을 텐데, 이제는 한 번 되묻고 만다. 미선의 시선이 모니터 아래 메모지에 머문다.

‘우리 모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다.’

어떻게 취재했나

이 기사에 등장하는 사례관리자 미선·지영, 자살 시도자 은혜의 이름은 가명이다. 사례관리자들의 계약직 신분상 불이익 우려를 고려해 근무지의 식별 정보는 변경했지만 근무 공간의 협소함과 비독립적 환경 등 핵심 사실은 유지했다.

본문은 사례관리자 4명과 다섯 차례 이상 진행한 인터뷰, 주변 인물 취재를 바탕으로 재구성됐다. 은혜의 사례는 본인 동의를 받아 사용했다. 인용된 통계는 더불어민주당 김윤 의원실이 보건복지부로부터 받은 자료와 취재진이 복지부에 정보공개 청구한 자료를 바탕으로 했다. 본문의 발언과 대화, 인물의 생각과 감정에 관한 서술은 모두 당사자가 직접 구술한 내용에 한정했다.

4화

남겨진 사람들의 회복

"아들이 죽었는데, 엄마의 몸이 편안해져도 되는 걸까."

※ 세계일보 탐사보도팀은 자살예방법이 명시한 권리와 책임을 알리기 위해 이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지연은 아파트 상가 내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봉지째 쓰레기통에 버렸다. 전날,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찾아간 병원에서 받아 온 것이었다. 한 알을 삼키자 두근거림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몸이 편안해진 그 순간, 죄책감이 밀려왔다. 아들이 죽었는데, 엄마의 몸이 편안해져도 되는 걸까. 상우가 떠난 지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한 달 전 아침에 건넨 마지막 말이 목에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2013년 3월5일 오전 10시, 지연은 옷장 앞에서 둘째의 첫 학부모 총회에 입을 옷을 고르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큰아들 상우였다.

“아침부터 어디 가니?” “친구 만나러요.”

“멀리 가니?” “네, 좀 멀리요.”

“엄마 지금 바빠, 너무 늦게 다니지 마.”

상우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 덜컹거리는 전철 소리만 낯설었다. 지연은 다시 걸 생각으로 전화를 끊었다. 학부모 총회는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점심 무렵 다시 건 전화에선 신호음만 길게 이어졌다.

스물셋 상우는 술도 담배도 즐기지 않았다. 한 해 전 의경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뒤, 복학 대신 집 근처 온라인 광고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못마땅해했다. 상우는 집을 나와 회사 근처에 원룸을 얻었다. 그러다 반년도 안 돼 회사를 그만뒀다. 그 뒤로는 경기 양주의 이모 집에서 지냈다. 지연은 부자간의 흔한 갈등 정도로 여겼다.

3월6일, 점심이 지나도록 상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지연은 양주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모도 상우의 행방을 모른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세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041’로 시작하는 번호가 휴대폰 화면에 떴다.

“선상우군 어머님 되시죠? 보령경찰서입니다.”

낯선 목소리가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형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상우가, 또래 세 사람과 함께 숨진 채 발견됐다고 했다. 수사 상황은 이후 형사를 통해 전해 들었다. 사망자들의 주소는 서울, 대전, 인천, 전북으로 서로 달랐다. 경찰은 그들이 온라인에서 만난 사이로 추정했다. 처음 약속에는 네 사람이 있었고, 한 사람이 마지막에 마음을 돌렸다. 빈자리에 상우의 답이 닿았다. “몇 분 상관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지연은 형사의 말을 그렇게 기억했다.

상우가 도착한 곳은 충남의 한 바닷가였다. 민박집 주인은 전날 저녁까지 그들을 봤다고 진술했다. 낮 동안은 바닷가에 있었고, 저녁 무렵 함께 방으로 올라갔다고 했다. 다음 날 사회면 기사에 상우는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사는 A(23)씨로 기록됐다.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자살예방법)’은 그해 시행 1년 차를 맞고 있었다. 상우가 떠난 두 달 뒤 인근 바닷가에서 유사한 죽음이 다시 발생했다. 자살동반자 모집 글 같은 자살유발정보를 처벌하는 제19조 1항이 시행되기까지는, 상우가 떠난 뒤로 6년4개월이 더 흘러야 했다.

손지연 자작나무 대표가 4월14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스터디카페에서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며 눈물을 닦고 있다. 유희태 기자
손지연 자작나무 대표가 4월14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스터디카페에서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며 눈물을 닦고 있다. 유희태 기자

보령에서 서울로 상우를 데려오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렸다. 빈소에 놓을 사진을 준비할 겨를이 없었다. 이모가 급히 사진을 뽑아 왔다. 상우가 떠나기 일주일 전, 생전 처음 파마를 한 날이었다. 이모가 귀엽다며 무심코 찍어 둔 그 사진이 영정 사진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영정 속 검은 각진 뿔테 안경을 쓴 청년은 수줍은 듯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장례식을 치르고 며칠 지나지 않아 지연은 상우의 가장 친한 친구를 찾아갔다. “휴대폰을 한 번 들여다보고 싶은데 어디 가서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친구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머니, 사실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어요.”

친구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상우가 보령으로 향한 그날 저녁, 친구는 카톡 한 통을 받았다. 지금 자살하려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경찰에 대신 신고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친구는 그저 장난인 줄 알았다. 마지막 카톡은 짧았다. 같이 있는 사람들이 눈치챌 것 같다고, 누군가 발견하겠지. 그것이 상우의 마지막이었다.

1년 전 상우는 집에서 가까운 수서경찰서에서 의경으로 복무했다. 송파구 경찰병원에 안과 진료를 나가는 날이면 로비에서 면회 온 엄마와 차를 마시고 수다를 떨었다. 수다는 늘 같은 말로 맺어졌다.

“엄마, 사랑해.”

상우는 제대 후에도 지연을 볼 때마다 표현했다. 그토록 사랑한다고 말하던 아이가 왜 그랬을까. 지연은 그 질문만 붙잡고 울었다. 평소 마시지 못하던 술에도 손을 댔다. 지연은 매일 밤 혼자 소주를 마시고, 토하고, 잠들었다. 가족을 피해 밤 열한 시면 아파트 옥상에 올라갔다. 새벽 두세 시까지 혼자 울었다. 남편은 “나도 참고 있으니 너도 참으라”고만 했다. 주변의 시선에 쫓기듯 가족은 얼마 뒤 개포동을 떠나 대치동으로 이사했다.

답을 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심리부검이라는 말을 들은 건 상우가 떠나고 2~3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자살로 세상을 떠난 이의 가족이 전문가 면담을 통해 고인의 마지막 시간을 되짚는 절차다. 통상 사별한 지 3년 이내에 진행하는 것이 권고된다. 지연은 망설였다. 혹시 아들이 엄마를 원망했을까. 분노가 있었을까. 그 답을 듣는 일이 두려웠다. 2022년 지연은 면담실에 앉았다. 상우가 떠난 지 9년이 지난 뒤였다.

면담자의 질문이 이어지는 동안, 지연은 자신이 보지 못했던 아들의 시간을 하나씩 들여다봤다. 학교, 군대, 복학하지 않은 뒤의 방, 아들의 망설임이 그제야 보였다. 결국 남은 건 미안함이었다.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이해되지 않는 한 가지가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그렇게 자주 하던 아들이 왜, 혼자 그 먼 바다까지 갔는지.

상우가 떠난 지 10년, 기일과 생일이 모두 있는 3월이었다. 지연은 그리운 마음에 아들의 글씨라도 만져 보고 싶어 상우 방에 있던 유품을 꺼냈다. 옷장 구석에는 제대 기념으로 지연이 맞춰준 상우의 양복이 그대로 걸려 있었다.

노트 사이에 경찰병원 진료증이 눈에 들어왔다. 앞면에는 안과, 뒷면에는 정신건강의학과라고 쓰여 있었다. 손이 떨렸다. 타인의 눈에는 보였던 것이, 엄마의 눈에만 보이지 않았다.

문득 제대하고 몇 달이 지나 부대 선임이라는 사람이 집으로 전화를 걸어와 “상우는 잘 지내느냐”고 물었던 일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요즘 군대가 참 좋아져서 제대한 사람도 이렇게 신경 써 주는구나’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 전화의 의미를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왜 육군이 아니라 의경을 택했느냐고 물었을 때, 상우는 “집 떠나기 싫어서”라고 대답했다. 지연은 뒤늦게 그 말의 다른 뜻을 읽었다. 집 가까이 있어야만 버틸 수 있는 아이였다는 것을. 아들의 우울증을 알고 나자 원망과 배신감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더 큰 죄책감이 들어앉았다. 지연은 “이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저 표현하지 않았을 뿐인데, 엄마는 몰랐다”고 말했다.

손지연 자작나무 대표가 4월14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공원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유희태 기자
손지연 자작나무 대표가 4월14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공원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유희태 기자

상우가 떠났을 때, 동생 경우는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열세 살이었다. 상우는 동생의 실내화를 직접 빨아줬고, 의경 시절 순찰을 하다가도 동생 학교 앞까지 가서 얼굴을 비치던 형이었다.

경우가 형의 죽음을 들은 건 중학교 입학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경우는 교실에 앉아 있어도 친구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들이 입만 벙긋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유리창 너머로 형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학교 상담 선생님이 경우를 불렀다. 점심시간이었다. 상담 선생님은 매뉴얼에 따라 질문을 이어갔다. ‘자살 생각이 있느냐, 형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경우는 형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눈물을 쏟았다. 감정을 수습하기도 전에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로 장소를 옮겼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비슷한 질문의 반복, 이해와 공감이 없는 상담은 경우의 마음을 닫게 만들었다.

“앞으로 누구한테도 형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

경우는 집에서 소리치듯 외쳤다. 초등학생 시절 영재반에 들고, 반장을 도맡았던 경우는 이후 6년을 ‘엎드린 아이’로 보냈다.

집 안에는 다정한 말소리가 끊겼다. 우울함에 잠긴 엄마, 말수가 줄어든 아빠, 방으로 숨어드는 둘째, 셋은 집에 들어오면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거실에는 주인 없는 텔레비전 소리만 가득했다.

경우는 스무 살이 되던 해, 엄마에게 말했다. “공부하지 않았으니 대학은 못 갈 것 같아. 하지만 글쓰기는 재미있으니 작가가 돼 형에 관한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보고 싶어.” 그러나 무기력이 소설보다 먼저 찾아왔다. 집에서는 문을 걸어 잠그고 게임에만 몰두했다.

은둔이 이어지던 어느 날, 경우가 여행을 가겠다고 했다.

“인천에 가서 바다를 보고 싶어.”

지연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결국 신용카드를 쥐여 주며, 안전한 곳에서 자고, 끼니를 거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담담한 듯 보냈지만, 돌아서자마자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전화를 걸고, 받지 않으면 카톡을 남겼다. 하루 이틀 있다 온다던 경우는 부산까지 갔다가 일주일 만에 돌아왔다.

지연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알았다. 실은 경우도 그때 죽으려고 떠났다는 것을. 마지막 순간, 형을 잃고 힘들어하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엄마가 살아 있는 동안은 견디겠다”고 했다.

그 뒤로 경우가 방문을 잠그면 지연은 문을 따고 들어간다. 종일 게임을 하는 아들 앞에 밥을 갖다 놓으며 말한다. “엄마는 네 뒤꿈치만 봐도 돼.” 경우도 엄마가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면 안방 문을 벌컥 열었다. 가족이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 일상이 됐다.

시댁에서 늘 ‘상우 엄마’로 불리던 지연은 어느새 ‘경우 엄마’가 되어 있었다. 가까운 친구는 “경우를 봐서라도 힘을 내라”고 여러 번 말했다. 배려인 줄은 알았다. 그러나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상우가 떠나고 1년 반쯤 흘렀을 무렵이었다. 지연은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다가 자살 유족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자조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처음에는 다 필요 없다고 밀어냈다. 그러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 속에 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닿았다.

어느 화요일 오후 7시 신논현역 인근의 한 스터디 카페. 서울시 단위 자살 유족 자조모임 ‘자작나무’ 월례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지연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작은 회의 공간에 처음 보는 성인 열다섯 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이십 대부터 칠십 대까지 연령도 다양했다. 이들이 하나씩 털어놓는 저마다의 사연을 들으면서 지연은 처음으로 위로라는 감정을 느꼈다.

지연은 그제야 묻어 두었던 아들 이야기를 꺼냈다. 자전거를 무서워하는 엄마를 2인용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여의나루를 달렸던 상우. 못 타겠다고 버티는 엄마에게 웃으며 말했다. “엄마, 무슨 걱정이야. 내가 있는데.” 자조모임은 지연이 상우 이야기를 편하게 꺼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지연은 한발 더 나아가 동료지원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아픔을 겪은 유족이, 새로 유족이 된 이들의 첫걸음에 함께 서는 역할이다. 찾아오는 유족들의 질문에는 경험자가 아니면 답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고인의 유품을 버려야 할까, 간직해야 할까. 지연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상우의 양복을 정리하기까지 10년이 걸렸다고. “정답은 없어요. 마음이 괜찮을 때 하면 되는 일이에요.”

2023년 봄, 지연은 한국생명의전화 전화상담 봉사자가 됐다. 일부러 사람들이 기피하는 심야 시간대를 택했다. 수화기 너머 자살 시도자들의 목소리가, 상우의 또 다른 목소리처럼 들렸다.

자정을 넘긴 시각, 20대 여성이 울면서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에 대한 서운함을 털어놓았다. 아버지의 외도, 그로 인한 엄마의 스트레스, 유독 자신에게만 쏟아지는 짜증. 지연은 엄마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는 너한테 의지하고 있는 거야. 너를 친구로 보는 건데, 그걸 몰라주니까 투정을 부리고 있는 거야.” 수화기 너머 여성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엄마가 자기를 미워하는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전화를 끊으며 여성이 말했다. “저도 선생님처럼 이런 일을 하고 싶어요.”

손지연(왼쪽) 자작나무 대표가 4월14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공원 의자에 앉아 배주현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유희태 기자
손지연(왼쪽) 자작나무 대표가 4월14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공원 의자에 앉아 배주현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유희태 기자

자살예방센터에서 강연하기 시작하면서, 지연은 유족 프로그램이 정작 유족에게 닿지 않는 구조라는 것을 알게 됐다. 지연이 여러 지역에서 목격한 자조모임은 대개 평일 오후에 열렸다. 생업이 있는 유족은 참여할 수 없는 시간대였다.

지연 한 사람의 관찰만은 아니었다. 서울 25개 자치구 가운데 강남·서초·동작·관악·성북구 5개 구는 자조모임 자체가 없다. 모임이 운영되는 나머지 20개 자치구 중에서도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 열리는 곳은 양천·송파구 등 8곳에 그친다.

제도 바깥에 놓인 유족은 적지 않다.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은 자살 사망자 한 명당 5명에서 10명의 유족이 남는다고 추산한다. 2024년 자살 사망자는 1만4872명. 이 비율을 적용하면, 한 해에만 최대 14만명의 유족이 남겨진다.

지연은 2024년 여름, 서울에서 열린 청소년 대상 자살예방 토론회를 방청한 적이 있었다. 유명 강사가 아이들 앞에 섰다. 그는 자살한 이들의 원인을 태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가족 탓으로 돌렸다. “자살하는 사람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아느냐. 뱃속에서부터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청중석에 앉아 있던 지연은 강사의 한마디에 상우를 키운 23년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이런 강의는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주최 측에 따지듯 물었지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가 알고 있는 자살은 달랐다. “그 사람들은 삶이 싫어서 죽은 게 아니에요. 발버둥을 쳤는데, 살지 못해서 죽음에 잡아먹힌 거예요.”

올해 3월, 지연은 출범 18년을 맞은 자살 유족 자조모임 ‘자작나무’의 대표가 됐다. 자조모임의 침묵, 심야 상담실의 울음, 강연장의 서러움이 지연을 그 자리로 떠밀었다. 그는 자치구의 자조모임 운영 시간을 바꾸고, 유족의 언어로 정책을 말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뒤에는 경우가 있었다. 오랜 세월 두 아들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예순셋의 지연은 컴퓨터로 문서 한 장 작성하는 것조차 버겁다. 그런 엄마가 아들에게 물어가며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모습을 보여주면, 방 안에 갇힌 경우도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용기를 얻지 않을까. 지연의 바람이자 기도였다.

대표가 되고 한 달이 흐른 4월24일 오전 10시 서울역. 자주색 후드 점퍼에 검정 바지를 입은 지연이 대절 버스에 올랐다. 1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곳은 경기 양평의 한 연수원. 1박2일 ‘자작나무 우리 함께 봄나들이’ 캠프였다. 자살 유족 40여명이 함께했다.

점심을 마친 오후 1시, 지연이 유족들 앞에 섰다. 짧은 인사말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단어 유추 게임 같은 레크리에이션에서 그들은 처음으로 함께 웃었다. 강가의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천천히 이야기를 풀었다. 평소 웃는 것조차 죄스러워하던 이들의 표정이, 잠시 풀리는 날이었다.

캠프 한 달 전이었다. 아들의 기일에서 열흘 지난 3월16일, 손지연 자작나무 대표를 대치동의 한 스터디 카페에서 만났다. 4년 전 그가 심리부검 면담을 했던 바로 그 회의실이었다. 창문이 없는 실내에서 손 대표는 담담하게 말했다.

“자살 유족에게 회복이란 없어요. 새로운 삶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것뿐이에요.”

인터뷰를 마친 손 대표가 상가 문을 나섰다. 봄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떻게 취재했나

이 기사에 등장하는 손지연 자작나무 대표와 가족의 이름은 실명이다. 자살 유족은 통상 가명을 사용하지만, 손 대표는 유족에 대한 인식 개선을 바라며 실명 사용에 동의했다. 둘째 아들 선경우씨도 기사 원고를 읽고 동의했다.

본문은 손 대표와의 총 6시간에 걸친 두 차례 인터뷰, 2013년 당시 언론 보도, 한국자살유족협회와 한국생명의전화 관계자 추가 취재를 바탕으로 재구성됐다. 영정 사진 등 일부 물적 자료는 손 대표가 보관해 온 원본을 직접 확인했다. 본문의 발언과 대화, 인물의 생각과 감정에 관한 서술은 모두 손 대표가 직접 구술한 내용에 한정했다.

보도 원칙

본 시리즈는 한국기자협회·보건복지부·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이 공동 마련한 자살예방 보도준칙 4.0과 세계보건기구(WHO)의 자살예방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준수해 작성·편집되었습니다.

만든 사람들

편집·미술
최미숙 기자
윤대영 기자
사진
이재문 기자
남정탁 기자
최상수 기자
유희태 기자
웹페이지 제작
정세진 기자
양혜정 디자이너
유희웅 개발자
© 세계일보 탐사보도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