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편견·혐오 사회에 주는 경고… 그리고 희망

입력 : 2021-05-13 20:23:36 수정 : 2021-05-13 20:23:33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너와 내가 만든 세상-제주’전

가짜뉴스·왜곡된 정보의 홍수속에서
오해·편견 커지고 역사적인 비극 불러

‘맘충’ ‘출근충’… 넘치는 비속어 표현들
내 곁 사람이 언제부턴가 혐오대상 돼
“지금 우리 모습 벌레 먹어가는 숲 같아”

진기종의 ‘우리와 그들’… 화합 메시지
진기종 ‘우리와 그들’ 티앤씨재단 제공

납작한 조각들이 서 있는데 이상하게 구멍이 숭숭 났다. 조각들이 나무와 닮아 마치 숲에 들어온 것 같은데, 구멍 탓에 나무들이 모두 벌레 먹은 것만 같다. 조각들은 묘하게 무언가와 닮았다. 어느 조각은 휠체어에 앉은 사람의 형태에 숭숭 구멍이 뚫린 것이었고, 다른 조각은 여성 얼굴의 옆모습이다. 최수진 작가의 ‘벌레 먹은 숲’이다. 작가는 평범한 우리 곁의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타자화되고 혐오의 대상이 됐다는 걸 떠올리며, 험한 말로 상처 입은 그들의 내면을 벌레 먹은 식물 모습으로 표현했다. ‘맘충’이니 ‘출근충’이니 하는 비속어 혐오표현을 비유한 것이기도 하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바로 우리 모습이 벌레 먹어가는 숲이 아닌가 싶었다”고 말했다.

최근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에 문을 연 포도뮤지엄의 개관전 ‘너와 내가 만든 세상-제주’ 전시에는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이 많다.

최 작가를 비롯, 강애란, 권용주, 이용백, 성립, 전기종, 중국 작가 장샤오강, 일본인 작가 구와쿠보 료타까지, 혐오 문제라는 심각하고 무거운 소재를 흥미로운 예술 작품으로 펼쳐낸다.

권용주 작가의 ‘굴뚝-사람들’은 가짜뉴스와 소문의 피해자이자 발신지가 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했다. 마네킹 머리엔 천이 덮여 있고, 머리 위에선 굴뚝이 솟아 연기를 뿜어낸다. 바닥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사람부터, 높은 다리 위에 앉아 천장에 닿아 있는 사람들까지, 이 얼굴 없는 사람들은 공간을 입체적으로 빠짐없이 채운다. 산업화를 보여주는 흑백의 사진 속 공장들이 연기를 뿜어내는 모습에서 우리가 성장 이면의 공해와 인간소외 같은 그늘을 떠올리듯, 커뮤니케이션 수단 발전으로 많은 정보를 빠르게 접하며 편리를 누리는 것 같지만, 가짜뉴스와 지라시로 막대한 공해 속에 사는 우리 사회 자화상처럼 보인다.

권용주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과 ‘익명’(맨 오른쪽)

‘입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더 직접적인 고발 메시지로 강렬하다. 입에서 입으로 말을 전하는 폭력의 공범자들이 바로 이런 모습 아닐까. 1929년 소비에트연방 엘 리시츠키의 포스터에서 따온 이 이미지는 배타적 공동체주의를 상징한다.

혐오는 전쟁을 부른다. 혐오가 멈추지 않고 계속되면,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일베’ 같은 소수의 극단적 이용자들이 쓰던 패륜적 표현이 발견되고 사회적으로 문제시된 것은 대략 2010년대 중반. 이후 여성혐오 표현을 시작으로 실제 범죄로까지 번진 혐오 문제는 이어 어린이나 노인, 성 소수자, 빈곤계층 등 사회적 약자 전반에 대한 혐오로 번졌다. 혐오를 고발하려던 미러링과 이에 대한 재반발로서 백래시까지 더해진 지금은 사회 전반이 혐오로 쉽게 끓어오른다.

구와쿠보 료타 ‘LOST#13’

혐오를 멈춰 세우지 못한 채 수년이 흐른 지금, 한국사회는 과연 전쟁 전 어디쯤 와 있을까. 이번 전시가 던지는 질문이다.

흥미로운 작품들 끝에 텍스트로 채워진 벽이 나온다. 벽에는 유럽의 마녀사냥,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보스니아 인종청소, 나치즘과 홀로코스트 등 특정 집단을 타자화하고 그들에 대한 왜곡된 편견을 만든 뒤, 혐오를 일으키고 살육과 전쟁으로 치달았던 사건들이 가득 채워져 있다. 이어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의 책 ‘말이 칼이 될 때’를 인용, ‘혐오의 피라미드’를 시각화했다. ‘분류→혐오표현→차별행위→증오범죄→집단학살’이라는 5단계 혐오의 진화과정이다. 매스컴을 통해 1~4단계의 단어들을 심심치 않게 접해온 우리 사회의 위치를 가늠해보게 한다.

케테 콜비츠 ‘여인과 두 아이’

작품뿐 아니라 구성도 난해함 없이 쉽게, 기승전결을 단순화해 메시지를 충실히 전한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고 말하는 착한 결말은 교훈적이다. 결말 격인 진기종의 ‘우리와 그들’과 독일 민중미술의 거장 케테 콜비츠의 조각과 판화 30여점이 전시된 별도의 특별전 ‘아가, 봄이 왔다’ 전시다. ‘우리와 그들’은 천주교, 이슬람교, 불교 신자들이 각자의 기도 수단인 묵주, 미스바하, 염주를 들고 간절히 기도하는 손을 표현했다. 모아놓으니 똑 닮은 모습임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작가가 의도한 바다. 케테 콜비츠의 판화는 세계가 전쟁으로 신음할 때마다 대중적으로 확산하고 공유했던 반전평화의 상징과도 같은 작품들이다. 마지막 하이라이트로 그의 작품 세계가 배치됐다. 케테 콜비츠를 소환할 때가 오고 있음을 일러주려는 듯하다. 전시는 내년 3월 7일까지.

 

제주=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박보영 '깜찍하게'
  • 박보영 '깜찍하게'
  • 장희령 '청순 매력'
  • 에스파 카리나 '반가운 손인사'
  • 아이브 안유진 '상큼 발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