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착취재] 취업용 대신 '간직하고 싶은 사진'을 택한 사진관들 입력 2017-07-21 18:19:33, 수정 2017-07-30 11:39:18
'수정 전, 수정 후' 동네 사진관 앞에는 흔히 이런 문구를 담은 광고판이 서 있다. 사진의 사전적 정의는 ‘물체를 있는 모양 그대로 그려 냄. 또는 그렇게 그려 낸 형상’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남들과 활발히 사진을 공유하는 요즘 세태를 반영한다면 이 정의는 뭔가 부족해 보인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려고 보정을 거쳐 물체를 그려 냄. 또는 그렇게 그려 낸 형상'으로 고쳐야 현실에 기반한 정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느덧 필수가 돼 버린 포토샵 탓에 사진사들은 고객의 외모를 티 안 나게(?) 아름답게 바꿔놓기 위한 고민이 깊다고 한다. 디지털 시대 이전 사진관은 실물을 그대로 담는 필름 사진을 찍었지만 현재는 언제든지 수정할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로 찍는 곳이 대부분이다. ‘지금 이 순간’의 추억을 간직하려고 사진관을 찾았던 소비자도 이제는 남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증명사진이나 예쁜 여권용 사진을 찍으려고만 든다. 여기 이렇게 변모한 흐름에 반기를 든 사진관들이 있다. 사진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아야 한다는 철학을 지키며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필름 사진관’들이다. 현재 서울에서 4곳 정도만 수정할 수 없는 사진을 찍고 있다. 이들 사진관은 ‘보여주기 위한 사진’이 아니라 ‘간직하고 싶은 사진’을 찍는다고 입을 모은다.
◆150년 전 사진을 찍는 등대사진관 등대사진관은 서울 용산구 철도길 인근에 터를 잡고 있다. 사진관에 한참 앉아있으면 기차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땡땡땡’ 경고음이 귀에 박힌다. 향수를 자아내는 풍경과 함께 사진관은 무려 150년 전 사진을 다루고 있다. 이른바 ‘습판사진’이다. 지난 4일 만난 이창주(47) 등대사진관 공동대표는 10년 넘게 잡지사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하며 “나 같지 않게 나오게 찍어주세요”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한다. 모델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예쁘게 보이는 사진을 요구했다. 그렇게 몇년을 보낸 어느 날 이 대표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꺼내 보고는 “참 촌스럽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시 유행에 맞게 수정된 사진들에선 모델 본연의 모습이 없었다. 분명 나이가 꽤 들었는데도 주름이 없어 참 어색해보였다. 그때부터 그는 '나이 들어서도 가치있는 사진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대표는 우연히 중세시대 사진이 담긴 영화 포스터를 보고 습판사진의 존재를 발견했다. 이는 19세기 사진 방식인데, 그는 해외에서 장비를 들여와 설치했다. 특별 주문 제작한 홀더(철판)에 피사체를 찍어내는데, 사진의 크기도 제한적이고 감도가 낮아 조명을 4개나 써야 했다. 피사체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인화한 사진도 쉽게 흔들려 모델은 30초 동안 가만히 있어야 한다. 이런 불편함에도 습판사진만 가진 특별한 매력이 소비자를 불러모으고 있다는 게 이 대표의 설명이다.
그는 “역설적이게도 ‘불안전한 형태’라는 게 장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습판사진은 인상 과정에서 생기는 그을림으로 똑같은 사진이 나올 수 없다”며 “현재 나의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할 수 있는 사진 형태”라고 강조했다. 이내 이 대표는 보관 중인 100년 된 습판사진을 꺼내 보이며 “당시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데, 이게 사진을 남기는 소중함이다”라고 말했다. 이 사진관은 필름사진, 습판사진만 촬영한다. 최근에는 ‘150년 전 사진을 찍는 사진관’으로 입소문을 타 예능 방송에도 등장했고, 특별한 사진을 갖고 싶은 영화배우들도 종종 찾아올 정도로 인기가 높다.
◆‘사진에 한국을 담는다’ 물나무 사진관 서울 종로구 계동의 한옥 길을 걷다 보면 흑백사진이 액자에 담겨져 있는 사진관이 보인다. 입구에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인물의 외형 모사에 그치지 않고 인격과 정신까지 나타내야 한다는 초상화론'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문구처럼 김현식 물나무사진관 대표(48)는 가장 한국적인 필름 사진을 연구하고 있다. 지난 20일 만난 김 대표는 “사진은 1835년 발명됐지만 우리나라에선 그 이전부터 ‘사진'(寫眞)’이란 단어를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우리 조상은 실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아야 한다는 뜻에서 한자 ‘사(寫)’, 내면의 정신을 나타내야 한다는 점에서 ‘진(眞)’을 합쳐 실물과 똑같은 인물화나 풍경화 등을 ‘사진’이라 불렀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이런 사진의 정신은 외래문명에 물들었으나 그는 '만약 사진이 우리만의 정신으로 발달했으면 어떤 모습이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가장 한국적인 사진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물나무사진관은 흑백 필름과 전통한지로 인화한 사진 등을 다루고 있다.
물나무사진관은 사진을 찍기에 앞서 고객에게 “결과물이 예쁘게 안 나올 수 있고 수정도 안 된다”고 안내한다. 대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으려 최선을 다한다. 5~10년 후에도 당시의 '나'를 들여다 보면서 그때 감정을 다시 떠올릴 수 있도록 사진을 찍는다는 게 이 사진관의 원칙이다. 김 대표는 “가장 한국적인 사진은 대상과 접근하는 방식에 (그 해법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가만히 서있거나 의자에 앉는 등 단순한 자세를 취한 인물을 대상으로 내리치는 자연광 아래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지나치게 객관화하는 것이 물나무사진관만이 갖는 특징"이라고 덧붙였다. 이 사진관을 찾은 한 가족은 “딸과 손녀가 미국에 가는데 이 순간을 담아두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이 사진관은 워낙 유명하다"면서 "미리 예약을 해야 사진을 찍을 수 있을 정도"라고 사진관의 인기를 전했다. 김 대표는 “(이곳에서는) 사진을 판다기보다 함께 작업한다고 말한다”며 “보여주기 위한 사진이 아니라 간직하고 싶은 사진을 찍는다”고 거듭 강조했다.
◆ 필름의 감수성, 연희동 사진관 지난 4일 하얀 셔츠와 블라우스를 입은 부부가 사진관에 들어섰다. 자세히 보니 부인의 배가 불룩한 게 임신 중이다. 부부는 “뱃속 아이와 이 순간을 간직하기 위해 연희동을 찾아왔다”고 전했다. 서울 서대문구의 연희동사진관은 흑백 필름과 폴라로이드 사진을 다룬다. 필름 사진을 찍는다는 특별함 때문에 사진관은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사진을 찍었다는 사진관의 김규현(31) 대표는 대학 시절 필름만이 가진 감수성에 빠졌다. 김 대표는 “사진학과를 전공했지만 필름은 기본만 배우지 거의 안 다룬다”며 “필름은 어차피 안 쓰인다는 시장경제의 논리를 다르게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남들처럼 디지털 사진기로 찍어서는 경쟁력이 없다고 보고 외곬으로 파고들었다고 한다.
2년 전 사진관을 연 김 대표는 인테리어를 필름 사진과 어울리도록 하기 위해 굉장한 공을 들였다. 벽을 하얀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지게 칠했는데 이 디자인은 바로 ‘흑백 사진’을 의미한다. 연희동사진관에서 풍기는 오래된 분위기는 이곳이 특별한 사진을 찍는 곳이라는 인상을 준다. 행인들이 사진관 외관을 보고 무슨 사진을 찍느냐고 물을 정도다. 김 대표는 필름 사진의 매력을 연예인에 비유해 이렇게 단언했다. “연예인을 실제로 보면 얼굴이 엄청 작지 않나. (현실과는) 명암 자체가 달라 화면에서는 커보이는 것이다. 필름 사진은 깊이감이 더 있다. 사실에 더 가까운 모습을 담는다. 흑백사진을 찍는 곳은 굉장히 많지만 흑백 필름 사진으로 찍는 곳은 얼마 없다. 디지털 사진에 흑백효과만 준 것은 절대 느낌이 살지 않는다.” 그는 이어 “필름 사진이 사양산업이라며 인제야 허겁지겁 포토샵을 배우는 베테랑 사진사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혀를 찼다. 이들 베테랑은 대부분 뛰어난 필름 사진 기술을 자랑하는데, 되레 잘하는 것을 포기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김 대표는 “필름 사진은 신세대 사진사들은 잘 다루지 못한다”며 “베테랑 사진사들과 함께 동네사진관 살리기 캠페인을 벌이고 싶다”고 싱긋 웃었다. ![]() 등대사진관의 이 대표는 기자에게 “짐 정리를 하다 우연히 발견한 필름 사진을 보다 그때 당시로 빠져든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