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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플러스] "재판 천천히" 박근혜 측, 17년 걸린 日록히드사건 참고했나?

일본 록히드 사건, 전직 총리 기소 후 17년 만에 공소기각으로 용두사미 / "재판 오래 걸려도 좋으니 천천히 진행하자"는 박근혜 변호인 속내 궁금

법정에 출석하는 박근혜 전 대통령
일본 검찰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록히드 사건이다. 미국의 대표적 항공기 제조사이자 방산업체인 록히드가 일본 항공사에 여객기를 판매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본 정치권의 뇌물수수 의혹이 사건의 핵심이다. 1972∼1974년 일본 총리를 지낸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가 수뢰 의혹이 제기된 불명예의 당사자다.

일본 최강의 수사팀으로 불리는 도쿄지검 특수부는 다나카가 총리에서 물러난 뒤인 1976년 록히드 사건 내사에 착수했다. 검찰에 따르면 다나카는 록히드 측으로부터 “일본 항공사가 우리 회사 여객기를 구입하게 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5억엔(약 50억원)의 뇌물을 받아 챙긴 혐의를 받고 있었다. 다나카는 결국 그해 7월 도쿄지검 특수부에 체포됐다.

1976년 일본 검찰에 체포되는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
검찰은 보강수사를 거쳐 1976년 8월 다나카를 뇌물수수와 외국환거래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하지만 기소와 동시에 보석으로 풀려난 다나카는 그때부터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한 투쟁에 나섰고 도쿄지검 특수부와 다나카 변호인단 간에 치열한 법정공방의 막이 올랐다.

일본의 형사재판은 한국보다 오래 걸리는 것이 보통이다. 다나카의 경우 1심에만 무려 7년이 걸렸다. 도쿄지법은 1983년 10월에야 다나카의 혐의를 유죄로 판단해 징역 4년 실형에 추징금 5억엔을 선고했다. 야권에서 국회의원직 사퇴 요구가 제기됐으나 다나카는 “판결은 매우 유감이다. 살아 있는 한 의원으로서 직무를 수행하겠다”며 버텼다. 비록 총리에서 물러났고 비리 혐의로 형사재판까지 받는 몸이었으나 중견 정치인으로서 다나카의 자민당 내 입지는 여전히 탄탄했다.

항소심도 4년이나 걸렸다. 도쿄고법은 1987년 7월 다나카의 항소를 기각하고 원심의 징역 4년을 그대로 유지했다. 다나카는 여전히 판결에 승복하지 않고 우리나라 대법원에 해당하는 일본 최고재판소에 상고했다.

한국 대법원에 해당하는 일본 최고재판소
상고심 심리도 1·2심과 마찬가지로 더디게 진행됐다. 6년이 지난 1993년 12월 다나카는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피고인이 사라진 만큼 더 이상의 심리가 무의미해졌고 최고재판소는 공소기각 판결로 무려 17년이나 걸린 세기의 재판을 마무리했다. 수사 당시에는 일본 검찰 역사상 처음으로 전직 총리를 기소했다고 떠들썩했지만 정작 그 당사자는 유죄가 확정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나 사건 자체가 흐지부지 됐다.

뇌물수수 등 혐의로 구속기소돼 1심 재판을 받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 측이 ‘재판이 오래 걸려도 좋으니 천천히 진행하자’는 취지의 주장을 펴 눈길을 끈다. 지난 7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부장판사 김세윤) 심리로 열린 공판에서 박 전 대통령 변호인 이상철 변호사는 “적정한 절차와 신속한 재판이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땐 적정한 절차를 지키는 게 우선”이라며 “일본의 옴진리교 사건은 10년에 걸쳐 겨우 1심이 끝났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가 예로 든 옴진리교 사건은 1995년 옴진리교라는 사이비종교를 믿는 이들이 일본 도쿄 지하철역에서 일으킨 독가스 테러를 뜻한다. 1심 선고는 2004년에야 이뤄졌고 사건 발생 후 16년이 지난 2011년에야 유죄 판결이 확정됐다. 독가스 테러 당시 40세였던 옴진리교 교주 아사하라 쇼코는 현재 62세의 사형수로 감옥에 수감돼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을 촉구하는 시위대
“재판이 길어져도 상관없다”며 일본 형사재판 사례를 든 박 전 대통령 측 태도에 법조계 일각에선 록히드 사건처럼 최대한 시간을 오래 끌다가 결국 유죄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종결지으려는 의도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된다. 다나카가 기소와 동시에 보석으로 풀려나 이후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은 것처럼 박 전 대통령도 1심 구속기간(6개월)이 끝나는 10월 이전에 선고가 이뤄지지 않으면 최순실씨 조카 장시호씨처럼 석방될 가능성이 크다.

부장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10일 “한국와 일본의 형사재판 시스템을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국민적 관심사인 대형사건 재판을 수년씩 끌어서야 되겠느냐”며 “가뜩이나 증거 기록 분량이 방대하고 신문할 증인도 많을 텐데 빠른 절차 진행을 통해 1심 구속기간 내에 신속히 선고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