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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정의 웰컴 투 그린란드] 매서운 바람에 철없는 상념이 흩어진다

〈4〉 빙하의 탄생지… 아이스 피오르

올드 헬리포트에서 시작되는 아이스 피오르 하이킹 코스를 나타내는 표시. 빨간·노란·파란색으로 코스를 구분해 놨다.
일루리사트 빙하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길고 깊은 골짜기 때문이다. 그린란드 중심부에는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빙하 능선이 위치해 있고 이곳으로부터 해안 쪽으로 빙하가 천천히 이동한다. 특히 서쪽으로 흐르는 빙하는 일루리사트의 피오르까지 깊은 골짜기를 따라 빠르게 흘러내리는데, 이렇게 흘러내린 빙하가 피오르로 부서져 내리면서 아이스 피오르를 형성하는 것이다.

일루리사트가 유명해진 이유도 전 세계에서 빙하가 부서져 내리는 것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더구나 특별한 장비나 기구 없이 가벼운 하이킹만으로 얼음과 바다가 만들어 내는 장관을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 

아이스 피오르로의 길은 남쪽으로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시작된다. 올드 헬리포트에서 시작되는 하이킹 코스는 세 가지로 나뉘는데 각각의 길이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의 색깔로 표시돼 있다. 노란 루트는 남쪽으로 내려가 피오르에 도달한 후 서쪽 해안을 돌며 바다에 떠있는 빙산을 감상하며 마을로 돌아오는 2.7㎞ 구간이다. 시간은 두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파란 루트는 아이스 피오르가 한눈에 보이는 서머미웃에 도달한 후 동쪽으로 아이스 피오르를 따라 걷는 5.5㎞ 구간으로 다소 긴 거리지만 아이스 피오르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이 구간을 걸어야 한다. 빨간 루트는 파란 루트에서 마을로 돌아오는 지름길에 해당한다.
 
아이스 피오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서머미웃에 도착한 여행객들이 크고 작은 빙산으로 가득찬 바다를 감상하고 있다. 빙산들이 부딪히고 쪼개지면서 천둥 같은 굉음을 낸다.

길은 각 색깔의 페인트로 표시돼 있어 웬만해서는 길 잃을 염려는 없다. 습지 위로 나무데크를 조성해 놔 해안가 바위만 조심하면 편안하게 아이스 피오르를 경험할 수 있다.

파란색 표시를 따라 들어선 나무데크 옆으로 이끼류와 키 작은 풀들이 습지를 이루고 있다. 언덕 너머에서는 빙하로부터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고 푸른 습지에는 북극 황새풀이 솜사탕처럼 흩뿌려져 있다. 북극 황새풀 사이로 각양각색의 들꽃들이 짧은 여름을 즐기고 있다. 

진달래를 닮은 분홍색의 니비아르시사트.
그 틈 사이로 진달래를 닮은 분홍색의 니비아르시사트가 소담히 피어 있다. 그린란드를 대표하는 꽃이다. 그린란드어로 ‘작은 아가씨’로 불릴 만큼 매혹적인 색과 자태를 뽐내고 있다.
 
언덕 너머 아이스 피오르와 습지에 핀 북극 황새풀의 초록빛이 대조를 이룬다.

나무판 길을 따라 극성인 모기떼를 물리치며 나아간 길의 끝에는 얼음의 바다가 펼쳐진다. 산더미 같은 빙산들이 빙하로부터 갓 떨어져 나와 바다 위에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크고 작은 빙산과 얼음덩어리들이 마치 설원인 듯 바다 위를 가득 메우고 있다. 바다 위 크루즈에서 바라본 빙산들의 탄생지인 셈이다. 바다에서 본 빙산이 제법 모양을 갖추었다면 이제 갓 탄생한 빙산들은 좁은 피오르를 가득 메우며 넓은 바다로 조금씩 밀려나가고 있었다. 산더미 같은 빙산이 자리 잡은 사이로 집채만 한 얼음덩어리들이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다. 

육지에서 만들어진 빙하가 바다와 만나면서 부서져 내리고 좁은 피오르에서 서로 부대끼며 넓은 바다로 나가면 어엿한 빙산이 되는 것이다. 서머미웃에는 얼음의 바다를 향해 낡은 나무의자가 놓여 있다. 그 위에 걸터앉아 한참을 넋 놓고 자연이 만든 장관을 바라본다. 마치 생명 탄생의 신비를 보는 듯 얼음덩어리들의 바다에서 눈을 뗄 수 없다. 빙산들이 부딪히고 쪼개지면서 천둥 같은 굉음을 낸다. 엄청난 얼음덩어리의 충돌과 분리가 내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얼음이 쪼개지면서 얼음덩어리 안에 압축돼 있던 공기들이 터져 나오며 폭발음과 같은 소리를 내기도 한다. 한쪽에서 거대한 빙산이 폭음과 함께 갈라지며 얼음덩어리를 토해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크고 작은 빙산들이 북대서양으로 나아간다. 남극을 제외하면 지구에서 가장 많은 빙산을 토해내는 곳이 일루리사트 아이스 피오르이다. 갈라진 빙산도 산더미만 하다. 그 거대한 위용 앞에서는 인간이 창조한 세상은 초라해 보인다. 타이타닉이 침몰할 만했겠다는 다소 엉뚱한 생각까지도 든다.

얼음바다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아이스 피오르를 따라 더 위로 올라간다. 얼음덩어리들의 속도는 느려지고 더 촘촘해지면서 마치 바다가 아닌 얼음의 평원 같다. 얼음 위로 나아가고 싶지만 언제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에 얼음 위로 올라설 수는 없다. 바위 위에 서서 얼음의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면 온갖 상념이 몰려 왔다가 또 지나간다. 상념은 차가운 바람을 더 견디기 어려울 때까지 계속된다. 여름이라고는 하지만 얼음의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매우 차다.
나무데크를 걸으며 얼음의 바다를 마주할 수 있다. 산더미 같은 빙산들이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차가운 바람을 뒤로하고 다시 푸른 초원 사이로 길을 나서니 계곡 속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호수가 나온다. 빙하 작용이 계곡을 만들어 내고 그 안에 호수를 이룬 빙호(氷湖)다. 얼음처럼 투명한 호수는 푸른 계곡과 어우러져 완벽한 한 폭의 여름 풍경을 만들어 낸다. 호수 옆길을 따라 계곡을 빠져나오면 저 멀리 바다와 함께 일루리사트 마을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그렇게 파란 루트의 하이킹 코스가 끝이 난다. 산책하듯 걷는 하이킹은 일루리사트에 머무는 동안 언제든지 즐길 수 있다. 푸른 바다와 그 위에 떠 있는 빙산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는 노란 루트도 역시 색다른 매력을 안겨주며 편하게 걸을 수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걸을 때마다 새로운 길을 걷는 듯한 다른 풍경과 아름다움을 선사해 준다. 그린란드 여행은 편하지는 않다. 비싼 물가와 여행경비, 극성스러운 모기떼와 개들의 울부짖음, 불면증으로 고생하게 하는 백야까지. 그러나 얼음과 바다가 만나는 장관은 이 모든 것을 보상해 주는 듯하다.

여행가·민트투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