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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윤의 내밀한 미술사] <8> 미스터 식스 이야기 (상)

렘브란트가 그린 보은의 초상화 … 400년 代 이어 ‘가문의 보배’


자신의 거실에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작품을 걸고 사는 사람은 전 세계를 통틀어 매우 찾기 힘들다. 그것도 한 미술관의 등급을 좌지우지할 만한 거장들의 그림, 예를 들어 렘브란트의 걸작 정도가 되면 훨씬 더 진귀한 일이 된다. 그것도 모자라 경이롭게도 그림 속의 모델과 똑같은 이름을 350년 가까이 지키며 사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1654년 렘브란트에 의해 그려진 초상화의 주인공 얀 식스 가문의 장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그 이름을 세습했다. 식스 가문의 10대와 11대손은 아직도 초대 얀 식스가 살았던 암스텔 218번지의 집에서 렘브란트와 프란스 할스를 비롯한 17세기의 예술품과 더불어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 특히 젊은 11대 얀 식스는 일찍부터 세계적인 미술 경매 회사 소더비에서 10년간 경력을 쌓고, 현재는 암스테르담에서 바로크 시대의 작품을 주로 다루는 기민한 아트 딜러로 활약 중이다. 세계에서 유례없는 컬렉터이며 미술시장에서 과감하게 자신의 안목을 믿고 그림을 고르는 그와 렘브란트의 그림과 함께하는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렘브란트의 친구 얀 식스는 네덜란드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이었다. 또한 신흥 귀족으로 발돋움하기에 충분한 정치적 역량과 예술적 소양을 두루 갖춘 이상적인 엘리트이기도 했다. 70세가 넘어서 암스테르담 시장을 지내기도 한 식스는 정치가로서의 공적뿐만 아니라, 많은 시와 희곡 등을 집필한 문인으로도 유명하다. 띠동갑 친구였던 식스는 험난했던 렘브란트의 삶과 예술을 이해하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특히 렘브란트는 1642년에 ‘야경’을 완성한 이후로 줄곧 인생의 하향곡선을 그리다가, 급기야 개인파산을 신청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런 경제적 어려움을 돕기 위해 식스는 많은 돈을 빌려주고 몇 번이고 작품을 주문하는 관대함을 보였다. 

렘브란트의 ‘얀 식스 초상화’ (1654년, 캔버스에 유채, 112×102㎝, 식스 컬렉션). 얀 식스가 막 장갑을 끼고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을 포착한 초상화로, 꾸미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운 우아함을 나타내는 ‘스프레차투라’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렘브란트는 사려 깊은 눈매와 의지가 강해 보이는 입가를 강조하며, 개인적인 친밀함을 반영하듯 유독 신뢰감이 느껴지는 얀 식스의 반신상화를 완성했다. 몇 세기가 지나도록 미술 애호가들은 렘브란트가 그린 남자 초상화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품으로 이 식스의 초상화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사실 렘브란트만큼 모델의 내면적이고 심리적인 상태에 민감하게 반응한 화가도 없었다. 한순간에 칠해질 눈썹과 눈꼬리의 마지막 터치조차도 그의 심층적인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눈과 마음으로 읽힌 모델의 내적, 외적 형상은 여지없이 화가의 손끝에 있는 신경까지 도달하는 즉시 붓끝으로 전달되었다. 공적인 이미지를 강조한 얀 식스를 그리려고 했다면 당연히 검은색 정장 차림의 공직자의 모습으로 그렸을 것이다. 그러나 얀 식스는 여가를 이용해 잠시 말을 타고 친구 집을 방문한 듯한 사적이고 친숙한 복장으로 등장한다. 한 손에 장갑을 끼며 방문을 마치고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을 포착했다. 노련한 배우가 관객을 의식하지 않고 연출한 자연스럽고 세련된 포즈처럼 보인다. 일정한 형식에 구속되지 않은 파가니니의 카프리치오를 연주하듯, 캔버스 위에서 춤추는 렘브란트의 거친 필촉은 이 자연스러운 포즈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모델의 왼쪽 어깨에 걸쳐진 빨간 의상의 장식과 장갑 부분에는 붓이 지나간 자리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 자유로운 붓놀림이야말로 지적인 얀 식스에게 어울리는 젠틀맨의 행동 미학을 표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식과 억지로 점철된 저속함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몸에 밴 듯한 유유자적한 아름다움이 그것이다. 카스틸리오네의 ‘궁정인’에서 강조된 힘들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도 최상의 우아함과 세련됨을 표현하는 ‘스프레차투라(sprezzatura)’ 정신에 가장 근접한 네덜란드의 초상화로 꼽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세계에서 유례없는 개인 컬렉터인 얀 식스 11세는 소더비에서 10년간 경력을 쌓은 뒤, 영국 왕실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컬렉터들을 상대로 거장들의 작품을 매매하는 아트 딜러로 활약하고 있다.
렘브란트는 초상화를 통해 37세의 얀 식스의 모습을 영원불멸하게 만들었다. 우리 세대의 젊은 얀 식스는 내년이면 그림 속의 모델과 같은 나이가 된다. 그는 아침에 눈을 떠서 그림을 볼 때마다 “내 이름은 얀 식스!”라고 되뇐다고 한다. 그 그림에는 “얀 식스는 열정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얀 식스는 늘 법도를 지켜야 하고, 얀 식스라는 명성에 걸맞은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라는 커다란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했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400년 전에 태어난 당신의 이름을 물려받은 사람이 이렇듯 계속해서 존재해야 합니까”라고 그림 속의 모델에게 반문을 하면서도, 매일매일 그 이름값을 증명해야만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고 말했다. 

렘브란트는 서재에서 자신의 시간을 즐기고 있는 얀 식스의 모습을 에칭기법으로 담아내기도 했다. 암스테르담 시장 자리에까지 오른 얀 식스는 많은 시와 희곡을 발표한 문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넘쳐나는 예술품 속에서 자란 그가 선택한 길은 옛 거장들의 그림을 거래하는 일이었다. 그의 삶이 낳은 가장 자연스러운 결과인지도 모른다. “지금과 같은 세상에 고화에 관심을 갖고 비즈니스를 하는 나 같은 사람은 멸종된 공룡과 같은 부류에 속하겠지요”라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소더비에서 일하기 시작한 20대에 이미 탁월한 감식안으로 렘브란트의 진품을 분별하여 세간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결과는 대학에서 학문이라는 타이틀을 건 미술사를 답습해서는 절대로 얻어질 수 없다고 단언한다. 복제된 이미지를 주로 사용하는 아카데믹한 접근은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으로 배워야 할 사항들을 경시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미술품을 직접 취급하는 소더비와 같은 경매회사의 전문가는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머릿속의 공허한 지식에 의존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기 전에, 늘 치수를 재고, 돋보기를 통해 구석구석 들여다보고, 작품의 고유한 냄새를 느끼고 기억하기 위해 인체의 모든 감각을 동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의문이 생기면 여지없이 동료들과 묻고 확인하며, 자신의 감정법과 방법론에 대해서는 늘 냉정하고 비평적으로 검토한다. 체면을 중시하는 미술사 교육기관의 정서에 길들여진 학생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림 속에 숨어 있는 답을 찾기 위한 비장한 각오와 열정이 결여되기 쉽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그림 속에서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찾아보려는 용기와 각오로 임하지 않고서는 영영 작품을 이해할 수 없다고 직언했다.

이렇듯 호되고 철저하게 자신의 감식안을 훈련시킬 수 있었던 비결은 그림 속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사물을 실제로 보고, 만지고, 직접 소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갤러리 사무실 곳곳에는 17세기 정물화에 등장하는 온갖 종류의 조개껍데기, 식물과 곤충 표본, 식기와 오브제들이 가득했는데, 인터뷰 도중에도 그림과 관련된 사물이 있으면 실제로 작품 앞에 진열하며 그림 속의 형태나 색과 비교하며 설명했다. “아무리 오래된 그림이라고 해도, 그려진 것들은 결코 판타지가 아닙니다. 모든 것은 진정한 리얼리티에서 출발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한 뒤 초상화 속의 주인공 얀 식스가 소유했던 책을 한 권 내밀었다. 그리고는 실제로 가죽 책 표지와 속지를 만져보며 갤러리 전시장을 걸어볼 것을 권했다. 400년 전 실제로 존재했던 이러한 사물들이 캔버스에 그려졌다는 것을 체험시키기 위함이었고, 이 방법을 통해서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를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의 눈은 신체적 경험과 감각기관을 총동원한 관찰에 의해 비로소 그림 속의 내용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암스텔 218번지에 위치한 식스 집안 내부의 모습(20세기 초반, Stadarchief Amsterdam의 자료). 최근 들어 인터넷 예약 (www.collectiesix.nl)을 통해 한정된 수의 관람객에게 식스 집안의 내부와 예술품을 공개하고 있다.
아트 딜러로 독립한 배경을 두고 사람들은 흔히 어느 미술관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수백점의 컬렉션을 자랑하는 식스 집안 출신이었기에 가능했겠거니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11대 얀 식스는 과거와 집안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내적 동기에서 이 길을 선택했다. 집안의 컬렉션과는 구분하여 자신의 힘으로 하나씩 소장품을 매매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사회적 지위가 있기 때문에 폭리를 취할 만큼의 이윤을 남기는 거래도 할 수 없다. 명예와 소신, 그리고 뛰어난 작품을 선별하는 자신의 안목을 기반으로 컬렉터들을 매료시키는 일에만 매진하고 있다. 한편 젊은 얀 식스는 오랫동안 지켜온 가풍은 새로운 변화를 맞아들일 때가 되었다고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사실 렘브란트가 그린 얀 식스의 초상화가 일반 대중에게 처음 선보인 것은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이고, 그 이후에도 식스 집안 밖으로 렘브란트의 작품이 대여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그 전까지는 철저하게 식스가 후손들의 사유물로 관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 원칙을 완화하고, 연간 정해진 입장객 수에 한해 집안의 내부와 작품들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2년 전 방문했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렘브란트의 얀 식스 초상화는 강이 훤히 보이는 창가 옆의 벽면에 다소곳이 걸려 있었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길가와 벽 하나 사이에 걸려진 그림이었을 뿐인데, 작품 감상을 위한 문턱은 너무 높았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젊은 얀 식스의 신념은 확고했다. 위대한 한 점의 그림을 지켜나가야 할 가문의 막중한 임무를 지닌 것과 동시에, 거장들의 작품이 갖고 있는 진정한 가치를 후대에 남겨야 할 사회적 소명도 절실히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상자 안에 든 작은 천조각의 예를 들며 자신의 의지를 피력했다. 천조각을 상자에서 꺼내면 그 수명은 30년 정도이고, 만약 상자 안에 넣은 채 보관하면 100년 이상은 보존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과연 그 상자 속의 천을 보다 값지게 활용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대다수 사람들은 상자를 열지 않은 채 그 천조각의 보존 기간을 될 수 있는 한 연장시키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방법이라 여길 것이다. 이 방법을 택하면 우리는 긴 세월 동안 실물을 볼 수 없게 된다. 아마도 100년 이상 보관하는 동안 어떻게 해서든 이 작은 천조각을 좀 더 오래 보존할 수 있는 과학적인 방법을 찾아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안일한 낙관주의적 생각에서 이 같은 결정을 할지 모른다.

그러나 젊은 얀 식스의 의견은 정반대다. “나라면 그 귀한 천조각을 당장 그 상자 안에서 꺼내어, 그 작은 유물을 갖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열광시키고 싶습니다. 그 천을 본 사람들이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진정한 기쁨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유물이 갖는 진정한 가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라고 그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지금 당장 이 눈앞의 천조각을 가지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많은 교육을 하지 않는다면, 100년 후 그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즉,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유물을 전시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다면 당연히 유물 조사에 관한 기금을 조성할 여건이 만들어질 것이고, 우수한 학자들은 새로운 사실을 밝히기 위해 연구를 지속하게 될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이러한 발견과 학설들은 새로운 지식 산업으로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럽의 미술관들이 수장고에 잔뜩 작품을 쌓아두기만 하고, 제3세계의 대중들에게 보여줄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기존의 정책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시너지 효과가 발휘될 가능성이 있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자세야말로 자신의 이름이 갖는 의미를 증명하기 위한 그의 선택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정윤 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