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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용의 와인으로 읽는 문화사] <47·끝> 풀리아를 풀이하는 10가지 키워드

유럽 와인문화의 시발지…
그리스와의 근접성으로 ‘위대한 그리스의 땅’으로 불리우며,
문화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포도 품종도 그리스산이 제법 남아있다.

풀리아는 ‘장화’로 묘사되는 이탈리아에서 그 장화의 ‘뒷굽’에 해당한다. 반도에 자리 잡은 지방 중에서 가장 평탄한 지역이라 여름이 유난히 혹독하다. 그래도 풀리아인들은 억척스럽게 와인을 만들고, 토착 음식으로 생기를 얻는다. 풀리아 여행의 성공을 위해 꼭 알아야 할 열 가지를 소개한다

1. 위대한 그리스의 영역=풀리아는 대양에 이르는 편리함과 그리스에서의 근접성으로 인해, 그리스가 이탈리아 남부에 꽃피웠던 ‘마그나 그라에키아’(Magna Graecia:위대한 그리스)의 땅이다. 그리스의 유산은 원형극장이나 신전 등 유형 자산뿐 아니라 무형 자산에도 남아 있다. 음식 조리법과 작명법에도 그리스 유산이 건재하며, 재배하는 포도 품종은 그리스 원산지가 제법 있다. 강건한 레드를 만드는 알리아니코는 ‘헬레니카’ 즉 ‘그리스 포도’를 함축하는 단어가 변형된 말이다. 풀리아는 유럽 본토로 퍼진 와인 문화의 시발점이다.

2. 신성 로마 황제를 매료시킨 땅=조선 사대부 최고의 호사가 매사냥이랬던가. 프리드리히 2세는 본적 독일은 멀리하고 생애의 대부분을 남부 이탈리아에서 보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완만한 능선이 끝없이 이어지는 풀리아 북부의 안드리아 근처에 성을 짓고 거기서 매사냥을 즐겼다. 성 이름은 ‘카스텔 델 몬테(Castel del Monte)’. ‘산성’으로 번역되는 단출한 이름이지만, 무려 800년 이상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팔각형의 입체적인 모양이 비범하게 보인다. 이 산성 부근에서 양조되는 와인에는 ‘카스텔 델 몬테’라는 이름이 붙으며, 양조장 리베라는 ‘매’라는 이름의 ‘팔코네’ 와인을 만든다.

3. 이탈리아 올리브유 최대 생산지=풀리아 위의 태양은 마치 돋보기로 내리쬐듯 한다. 지면을 태워 버릴 듯한 기세로 여름을 몰아붙이기에 기후는 풀도 나무도 살 수 없이 고온건조하다. 올리브나무만이 자생력을 지닐 정도인데, 이럼으로써 풀리아는 자동적으로 이탈리아 올리브유 최대 생산지가 된다. 인공적으로 물을 대지 않으면 포도나무가 말라버리기에 풀리아 포도밭은 관개를 허용한다. 관개용 용수를 얻기 위해서는 돌짝밭을 파고 또 파서 수백m까지 이른다. 양조장 리베라는 600m에서 퍼 올린 물로 샤르도네와 소비뇽 블랑을 해갈한다. 11월이 되어야 벌판에 푸른 기미가 돌기 시작하며 생기도 난다. 

땅 속에 박힌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트롤리.
4. 풀리아식 돌집, 트롤리=
풀리아의 돌짝밭은 누구도 탐내지 않는 쓸모 없는 땅덩어리로 오랫동안 홀대받아 왔지만, 풀리아가 관광으로 인기를 끌자 지대는 엄청 상승했다. 밭을 일구다 빼낸 돌들은 어느 날 멋드러진 돌집이 되었다. ‘알베로벨로’에 가면 이런 돌집이 원추형 모양이다. ‘트롤리’로 불리는 돌집은 관광객을 자석처럼 끌어모은다. 돌집은 뙤약볕을 피하는 피난처이며, 거기서 하룻밤 묵기도 하는데, 농부의 반려동물 당나귀 방도 있다. 돌 사이로 꽂힌 나뭇가지에는 소시지를 매달아 두는데 이는 쥐로부터 음식을 지키려는 목적이다. 

폴리냐노 마을의 이국적 풍경은 진한 파란 바다와 눈부신 하얀 대리석의 조합이다.
5. 아름다운 해안=
길쭉한 모양의 풀리아는 무려 800㎞의 길다란 해안을 지녀 아름다운 해변 도시가 많다. 슬로시티 ‘트라니’엔 유명한 교회가 하나 있다. 수평선에 뾰족하게 솟은 첨탑과 기하학적 모양의 창문들이 탁 트인 시야에서도 경건하게 보인다.

해안을 따라 남하하면 ‘폴리냐노’에 닿는다. 마치 그리스에 온 것 같은 흰 건물들이 무척 이국적이다. 특히 해안 동굴을 연결하여 만든 레스토랑에 들어서면, 마치 ‘한여름 밤의 꿈’과 같은 기분마저 든다. 여름 한철에만 운영되는 레스토랑 ‘그로타 팔라체세(www.grottapalazzese.it)’는 지역인들에게도 최고의 관광코스이다.

6. 산타클로스가 잠든 바리=풀리아의 주도 바리는 아드리아해에 있는 미항이었지만, 가톨릭을 숭상하는 이탈리아에서 주요 도시마다 다 있는 수호 성인이 결핍되어 있었다. 때는 1056년. 어떤 열렬한 ‘바리’주의자들은 터키에 ‘산 니콜라’ 유해가 있다는 정보를 수집하고 대범하게 건너가서 그 유해를 훔쳐왔다. 그리고는 ‘산 니콜라 교회’를 세웠다. 드디어 바리에도 수호 성인이 생긴 것이다. 특히 선원을 보호한다고 믿어진 ‘산 니콜라’는 훗날 미국에서 산타클로스로 환생한다. 산타클로스의 유골을 확인하려면 풀리아로 가야 한다. 

오레키에테는 검게 그을린 밀과 흰 꽃을 버무려 만드는 풀리아의 전통 수제 파스타.
7. 가난했던 시절의 먹거리 유산=
파스타 ‘치체리 에 트리아(ciceri e tria)’는 고기 없이 고기 맛이 나는 신기한 파스타이다. 접시에는 두 종류의 면이 섞여 있다. 반은 삶은 것이고, 나머지 반은 프라이한 것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씹을 때 진짜로 고기 맛이 난다. 육식의 동경을 해소시키는 파스타이다. 파스타 ‘오레키에테’(Orecchiette con cime di rapa)는 말 그대로 작은 ‘귀’ 모양이다. 엄지손가락으로 떠내서 만드는 수제 파스타로 정말 귀와 닮았다. 이 파스타는 진한 회색이 특징이다. 추수가 끝나면 밭을 태웠다. 그러면 까맣게 타버린 밀알들이 땅바닥에 남았고, 소작인들은 그것만은 챙길 수 있었다. 까만 색을 중화하려고 흰꽃잎을 밀가루에 섞어 면은 회색빛이다. 곁들이는 야채 ‘치메 디 라파’는 브로콜리와 비슷하게 보이는 겨울 채소로 쓴맛이 특징이다. 결국 맛은 쌉싸름하며, 곁들이는 너트류와 올리브유가 고소함을 더한다.

8. 대규모 농가, 마세리아=풀리아 들판에서 ‘마세리아(Masseria)’라는 간판을 자주 본다. 대규모의 요새화된 농가, 마세리아는 귀족이 소유한 농가로서 로마시대엔 노예들이 일했다. 지금은 맛깔 난 전통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과 호텔로 변모되었다. 마세리아는 올리브, 포도, 과일 농장에다 양치기 사업까지 겸업하며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한다. 마세리아 바르베라(www.masseriabarbera.it)는 농가의 일부를 멋지게 개조하여 지역에서 손꼽히는 레스토랑으로 변모하였다. 주말에는 지역 손님들이 많게는 300명이 한꺼번에 먹을 정도로 인기 있으며 넓은 곳이다. 

리베라를 이끄는 아버지와 아들. 오른쪽이 세바스티아노.
9. 리베라(www.rivera.it)=
리베라는 1950년부터 브랜드 와인을 생산하기 시작한 풀리아의 선구적인 양조장이지만 양조장의 기원은 휠씬 더 오래되었다. ‘로제 와인’ 하면 바로 ‘리베라’였던 시절이 있었다고 세바스티아노가 전한다. 그는 매일 주도 바리에 있는 자택에서 양조장까지 힘들게 출퇴근하지만, 가업을 잇고 있다는 보람에 산다. 과거 풀리아는 무명의 와인, 벌크 와인을 만드는 거대한 와인공장이었다. 가끔 도가 넘칠 정도로 뜨거운 태양이지만 풀리아의 레드 와인은 그 속에서 무척이나 값싸게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리베라의 레드는 주로 ‘네로 디 트로이아’, ‘알리아니코’ 등 그리스에서 유래된 품종을 중심으로 혼합된다.

10. 아폴로니오(www.apolloniovini.it)=풀리아 남부의 대학도시 레체 인근에 위치한 양조장 아폴로니오는 거칠고 단단한 와인의 맛이 세월에 의해 부드러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출시하는 걸로 유명한 양조장이다.

숙성이 오래되고 잘된 와인은 주변 와인보다 훨씬 비싸도 다 팔린다. 그리스어 ‘아폴로’에서 유래된 아폴로니오의 레드는 주로 ‘프리미티보’, ‘네그로 아마로’ 등으로 양조된다.

와인저널리스트·‘라이벌 와인’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