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보는 눈, 글로벌 미디어 - 세계일보 -

“예술이란 우주의 질서를 닮으려는 몸짓, 색은 본질로 통하는 가장 적합한 지름길”

빛의 작가 하동철 5주기 기념전

“우주는 하나의 거대한 질서 위에서 가능하다. 사물은 단지 그 질서 위에 잠시 모여 든 단위들의 집합에 불과하다. 찰나에 사라질 현상적 사물들을 사진기에 담듯 화폭에 옮겨가는 노력의 허허로움이여, 예술이란 우주의 질서를 닮으려는 몸짓인가 보다. 색이란 본질로 통하는 가장 적합한 지름길이다.”

생전에 하동철(1942∼2006) 작가가 작가노트에 남긴 말이다. 어려서부터 빛의 세계에 유독 관심이 컸던 그는 빛이 흩뿌려지는 언덕 너머에서 귀가하는 어머니를 온종일 기다리던 기억 속의 빛의 따사로움, 돌아가신 아버지의 상여를 따라가며 보았던 상여의 원색문양과 올려다보았던 아침 태양 빛의 기묘했던 기억을 늘 마음속에 가두고 있었다. 그의 빛에 대한 경험은 이후 비행기를 타고 북극을 지날 때 목격했던 오로라의 눈부신 감동으로 이어졌다. 

Light91-12
한국미술사에서 추상2세대 맏형격인 그는 빛에 천착했다. 그만의 독특한 조형원리는 직선을 일정한 간격으로 무수히 교차하는 방법을 통해 절대적인 공간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1980년대 초 볼펜으로 수직선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드로잉작업을 시작했다. 나이아가라 폭포의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줄기나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빛의 현상을 시각화하기도 하고, 선을 그은 두 개의 필름을 엇갈려서 흡사 전자파의 패턴이나 열선의 실체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에게 선은 단순히 빛을 묘사한 도구가 아니라 빛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물감을 머금은 실을 튕겨 화면에 빗줄기 같은 사선의 흔적을 만드는 먹줄 표현은 화면에서 진동과 에너지를 느끼게 해준다. 빛이 비처럼 내리고 있다. “매직으로 그어보았는데 그 결과는 생각이 옮겨갈 뿐이었어요. 물감을 사선으로 흘려보기도 했지만 그것은 창에 흐르는 빗물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못했지요. 비는 바람과 에너지와 리듬이 합쳐진 것입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연결하는 기운은 결국 튕기면서 드러나는 선에 의해 가장 명징하게 시각화된다는 것을 알았지요.”

Light04-04
그는 서울대 교수 시절 제자들에게 색에 대한 경험들을 털어 놓기도 했다. 노란색은 어렸을 적 몸이 심하게 아파 의식이 사라지며 세상이 노랗게 보였던 기억에 근원을 두고 있다. 부친의 상여를 꾸며 주었던 빨강 파랑의 장식들이 햇빛을 반사하며 남긴 잔상들도 특별한 색의 경험으로 각인됐다. 유학 기간 동안 작업에 몰두하기 위해 바나나와 우유만 마셨던 기억들도 그의 색으로 남았다.

그의 이러한 기억들은 빛을 담은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2000년대 이후 제작된 작품들은 빨강과 파랑 두 가지 색이 기조를 이루고 있다. 거친 붓질에 의한 표현적 바탕이 사라지고 대신 고요하고 명상적인 분위기가 맴도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가장 분명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작가의 체질적 조형의식으로부터 온 귀결이라 할 수 있다.

Light04-10
그는 색에 각자의 역할을 분담시켰다. 빛의 스펙트럼을 표현한 빨강과 파랑은 빛의 기본색으로, 노랑·하양·검정은 빛의 보조적색으로 기용하고 있다. 노란색은 빛의 광원을 유도하며 흰색은 화면에 공기 또는 공간성을 나타내기 위한 역할을 맡고 있다. 특히 흰색은 실제 빛을 연상시키며 주위의 빨강 파랑에 의해 더욱 절실히 빛나는 효과를 유도한다.

작가는 이를 통해 이차원적 화면의 물질성을 벗어나 무한한 공간으로 나아간다. 물질인 물감으로 비물질적인 빛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스프레이를 통해 번져나가는 빛의 향연들 사이로 먹줄을 튕겨가며 균일하게 새겨진 검정색 먹 선들은 화면에 공간감을 구축해 준다.

빛의 작가로 알려진 하동철 작가의 5주기를 맞아 12∼25일 인사동 공아트스페이스에서 기념전이 열린다. ‘트렌드 예술’이 각광받고 있는 시대에 50년 넘는 긴 세월 동안 ‘빛’이라는 하나의 소재와 주제를 끝없이 탐구한 하동철의 작품세계를 일별해 볼 수 있는 자리다. 시간의 흐름에 맞춰가거나 혹은 맞서는 것이 아닌 시대를 초월하는 메시지가 예술의 본질이라 할 때, 하동철의 추상회화는 예술의 근원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자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02)735-9938

편완식 선임기자 wansi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