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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신지식인, 체계적 관리·육성 방안 절실

법·제도적 지원책 부재… 정부 차원 실질적 해법 시급

신지식인이 처음 언급된 것은 98년 말 김대중 대통령 주재로 열린 경제조정대책회의에서 첫 거론됐다.


비전과 가치관, 즉 이념에 입각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사회진화가 촉진되는 사회를 만드는 사람을 우리는 ‘신지식인’이라 일컫는다. 

이런 신지식인들의 저변 확대로 한국사회가 변화될 때만이 우리는 권력이나 물질, 학력을 쟁취하기 위해 벌이는 소모적인 논쟁과 갈등을 넘어설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녹녹치가 않다. 사회 각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와 개발을 통해 새로운 가치창출을 선도했던 이들은 법이나 제도적 지원 부재로 인해 그 분야에서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다. 

<이코노미세계>는 국민의 정부시절 태동한 신지식인에 대한 전반적인 현황과 정부주도에서 민간으로 넘어오게 된 그 간의 배경, 신지식인에 대한 문제점 및 개선점은 무엇인지 분석해 봤다.

국민의 정부시절 정부가 규정한 신지식인은 학력에 상관없이 지식을 활용, 부가가치를 능동적으로 창출하는 사람, 또는 기존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발상으로 일하는 방식을 혁신하는 사람으로 불려졌다. 

그 당시 신지식인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조명된 데는 사회적 분위기가 한몫을 했다. 국민의 정부가 학벌사회를 타파하겠다며 사회적 개혁 차원의 신지식인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친 게 계기가 됐다. 

신지식인은 반드시 학력이 높은 지식의 소유자만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비록 학력이 낮아도 묵묵히 자신의 맡은 분야에서 일하고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사람은 누구나 신지식인이 될 수 있었다. 

실제 전업 주부를 비롯해 집배원, 경비원, 파출부, 화훼농민, 호텔요리사, 음식배달원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이 신지식인 대열에 들 수 있었다. 

90년대 문민정부가 ‘세계화’ 흐름에 맞춰 신토불이와 같은 유행어를 만들어냈다면, 98년 국민의 정부에서는 ‘문화의 세기’란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고, ‘신지식인’에 대한 가치관이 새롭게 부각된 해였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21세기 창조적 지식기반의 국가건설 차원에서 사회의식 개혁 운동으로 추진된 신지식운동은 국민의 시절 청와대 정책기획실에서 추진방안이 모색됐다. 당시 정보통신부산하 한국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서 신지식인운동의 실무를 언론사 협조를 얻어 588명의 신지식인을 발굴했다.

국민의 정부시절 경제조정대책회의서 첫 거론

이처럼 국민의 정부가 사활을 걸고 추진했던 신지식인은 어떻게 태동이 됐을까. 신지식인이 처음 언급된 것은 98년 말 김대중 대통령 주재로 열린 경제조정대책회의에서 첫 거론됐다. 

김대중 대통령이 당시 98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밝힌 ‘제2 건국’을 담당할 주체인 대통령 직속 제2건국위원회(이하 건국위)가 이듬해 2월 발족되면서 본격화 된다. 

건국위는 정부 각 부처에 산하조직을 거느리고 ‘신지식인 운동’ 등을 대대적으로 벌여나가 국가를 개조해보겠다는 취지로 출발했다. 이후 건국위는 ‘한마음다짐대회’ 행사에서 범국민 의식개혁 차원의 신지식운동을 선언했고, 소위 21세기형 신지식인 5명이 최초로 선정, 탄생하게 된다. 

국민의 정부 시절 최초의 신지식인으로 선정된 5명의 신지식인 중 고추의 매운맛을 달리하는 기법을 개발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이종민씨는 현재 충북 음성에서 ‘슈퍼 고추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집배용 컴퓨터 정밀지도’를 만들어 화제가 됐던 초등학교 졸업의 집배원 장형현씨는 최근 경비원을 하다 정년퇴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나머지 3명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다. 최근 임금체불에 이어 회삿돈 횡령 의혹을 받고 있는 심형래씨는 99년 당시 정부의 제2건국 캠페인광고 ‘신지식인’ 편에 첫 모델로 선정된 케이스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심형래씨는 5명의 신지식인이 최초 선정된 후, 신지식인으로 공인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 후 ‘신지식 특허인’, ‘신지식 농업인’, ‘소기업 신지식인’, ‘신지식 금융인’ 등 각 업종별로 다양한 분야에서 신지식인이 발굴된다.  

1998년~2002년까지 행자부로 이관되기 전, 5년간 신지식인 선발 현황을 보면 2002년 334명을 제외하고는 매년 5~6백명 선을 유지하다가 2000년도에 들어서는 938명이나 되는 많은 인원을 선발했다. 

다른 해에 비해 유독 이때 인원이 두배 가까이 늘어난 데는 신지식인에 대한 각 지자체의 수요가 확대된 것으로 분석된다. 신지식인 선정은 초기 정부부처를 비롯해 광역시도로 확대됐으며, 지금은 전국 기초단체까지 범위를 넓혔다. 

김종백 한국신지식인협회 사무총장은 “99년 초에 정부의 정책으로 20개 부처를 비롯해 광역시·도로 확대됐고, 다시 2000년도에 들어서는 전국 시·군·구 등 기초자치단체까지 확대되면서 인원이 늘어나게 됐다”면서 “최근 100명 내외의 신지식인 선발인원을 유지하게 된 것은 각 부처별로 분야별 인원을 어느 정도 조율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선발된 인원은 올 상반기 78명을 포함해 현재까지 약 4000명에 이른다. 이중 상당수는 이미 제2 건국위 당시 선발된 인원이며, 이 인원은 2006년 말 정부 주도(행자부)에서 민간주도의 협회로 넘어온 인원을 전체 플러스한 수치다. 

민간 주도로 넘어오면서 협회는 선발 방법에 있어서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예전 관 주도의 선발 방법을 준용하고 하고 있다. 선발 기준은 정보습득성, 창조적 적용성, 방법의 혁신성, 가치 창출성, 사회적 공유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100여 명 내외로 선발한다. 

정부차원 신지식 관련 사업 타당성 문제 제기

하지만 국민의 시절 왕성하게 추진됐던 신지식인운동은 매년 20여억 원의 예산이 투입 되는 ‘물먹는 하마’로 회자되기도 했다. 

그 당시 20억원 예산은 사실상 신지식 육성 발전을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니라 당시 건국위원회 직원이나 각 부처 실무담당자의 급여로 지급되는 등 신지식인 지원과는 무관하게 집행된 것으로 드러났다.  

김 사무총장은 “당시 신지식인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지원은 없었다”면서 “다만 간담회를 비롯해 워크숍, 사례집 발간 정도의 미미한 금액이 있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더욱이 선발과정에서 일부 남용 및 악용으로 인해 문제점이 지적되자 결국 제2건국위는 출범 4년 만에 김대중 정부와 함께 국민들의 뇌리 속에 잊혀져 갔다. 

전문가들은 제2건국위 몰락은 권한의 이양과 정부 축소라는 시대적 흐름에 맞지 않는 조직의 운명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지적한다. 결국 2003년 6월 건국위의 활동 마감과 함께 신지식인 업무는 참여정부시절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로 넘어오게 된다. 

참여정부 시절 행자부로 넘어오면서 예산심의 상황 등을 감안해 행자부 주관 체계를 각 부처별 자율추진 체제로 전환해 사업을 계속했다. 시군구, 시도, 소관부처와의 연계를 유지, 해당 부처가 전문적으로 신지식인을 선발, 관리하도록 했다. 

이처럼 분야별 주관부처가 자율적으로 신지식인을 직접, 선발·포상함으로써 신지식인 사업의 능동성 제고 및 전문적 발판을 마련하는 듯 했다. 

그러나 참여정부 시행 3년을 맞으면서 정부 차원의 주도가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됐다. 실제 기술혁신대전, 지식경영대상 등 내용이 유사한 제도 및 포상사업이 여러 정부부처 및 민간부문에서 중복적으로 혼재되어 있어 이를 정리하는 것부터가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2003년부터 2005년까지 국회예산 심의 등 과정에서 행자부 주도의 사업추진 타당성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기도 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행자부 예산사업으로 진행해야하는 지속적인 추진성 문제를 비롯해, 시의성 및 목적달성 여부, 민간자율사업으로의 전환 등 사업존치 여부에 대한 재검토가 본격 논의되면서 행자부는 결국 지난 2005년 9월 89명을 끝으로 신지식을 선정하고, 정부차원의 신지식 관련 사업에서 손을 떼게 된다.  

행안부 관계자는 “이미 유럽에선 신지식인 관련 사업이 민간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만큼, 관주도에서 민간 자율로 가는 분위기가 팽배했다”면서 “당시 행자부 사업으로서의 타당성에 대한 문제 제기 등 사업 존치여부에 대한 여러 가지 현안이 있었고, 그 대안으로 공식적 차원의 민간이관 논의가 사전에 충분히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런 우연곡절 끝에 신지식인 사업이 협회로 넘어온 지난 2006년 11월경 (사)한국지식인연합회 임시총회가 개최되었고, 그 이듬해 1월에는 협회 차원의 전국 지역부문 순회간담회를 시작으로 2007 신지식인 포럼(3월), 회장단 간담회, 법률제정추진단 국회 행자위 1~2차 방문(8~9월)이 이뤄졌다. 

협회는 행자부 업무 해소로 인한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신지식인 법률제정 거리서명운동, 신지식인 도서 발간, 신지식인 업체 방문 등 발빠른 행보를 보이면서 신지식인들의 위상정립에 전력을 쏟았다. 협회는 현재 ‘신지식인 육성지원 및 신지식인의 사회적 공유에 관한 법률(안)’발의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신지식인 법·제도적 지원책 마련 돼야

그러나 신지식인 육성이 제대로 자리 잡고 새로운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정부분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과 관리가 필요했다. 

특히 농업, 어업, 유통, IT, 중소기업 등 각 분야에서 세계적인 가치창출을 선도하고 있는 신지식인들은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데 절실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지원의 방향은 늘 제자리만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관 주도와는 달리 민간이 맡으면서 해결 과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행자부 업무 해소로 인한 ▲신지식인 선발, 포상 제한을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한 고민 ▲이미 선발된 3885명(2011년 상반기 포함)에 대한 신지식인 법·제도적 지원 대책 마련(법률안) ▲신지식인에 대한 체계적인 데이터베이스 구축 및 관리 ▲신지식인의 사기 저하로 인한 각 분야별 국가 경쟁력 약화 우려 등은 해결해야할 과제로 남아 있다. 

김 사무총장은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 급락도 문제였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지고 있다는 신지식인들의 의식이 아직도 널리퍼져 있다”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실질적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신지식인운동의 가장 중요한 활동인 ‘공유’에 있어서 그 기반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향후 신지식인에 대한 특별지원에 관한 대책마련, 신지식인 법률 제정 등에 만전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기회를 계기로 사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분야를 개척한 사람들을 신지식인이라는 이름으로 외부에 알리고 이를 통해 국가의 지식기반 토대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방치되어 있는 신지식인에 대한 체계적 관리와 육성 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윤종우 기자, ydsikk@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