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삭풍에 국내 증시가 8일 ‘검은 월요일’을 보냈다. 글로벌 반도체주들이 일제히 조정에 돌입한 가운데 코스피·코스닥에 ‘서킷브레이커’가 잇달아 발동됐고, 원·달러 환율도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외환당국은 최근 원·달러 환율의 쏠림 현상의 배경으로 역외 차액결제선물환(NDF) 거래 등 투기적 거래를 지목하며 엄정 대응 방침을 밝혔다.
◆삼전닉스 15%·19% 주르륵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날 코스피는 전장보다 676.18포인트(8.29%) 내린 7484.41에 거래를 마쳤다. 코스닥도 전 거래일 대비 91.05포인트(9.08%) 내린 911.39로 장을 마감했다. 외국인과 기관은 코스피에서 각 3540억원, 1조6270억원을 팔아치웠고 개인은 1조7630억원을 순매수했다. ‘반도체 투톱’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각각 10.18%, 7.68% 하락하며 ‘30만전자’, ‘200만닉스’가 붕괴했다.
개장 직후 급격한 매도세에 코스피에는 오전 9시3분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됐다. 올해 들어 세 번째이며 역대로는 아홉 번째다. 20분간 거래가 중지된 뒤 재개됐음에도 하락세가 이어지자 9시34분엔 매도 사이드카가 발동됐다. 코스닥에도 오전 매도 사이드카, 오후 서킷브레이커가 잇달아 내려졌다.
증시 급락은 지난주 발표된 브로드컴의 실적이 시장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서 촉발됐다. 이는 반도체 업종 전체로 퍼지며 ‘피크아웃’(정점 후 하락) 우려를 키웠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연내 금리인상 가능성, 스페이스X 기업공개(IPO)에 따른 유동성 쏠림 등도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다.
한지영 키움증권 연구원은 “미국 반도체주 폭락 여진, 스페이스X 상장 등으로 녹록지 않은 한 주가 될 수 있다”며 “변동성 확대가 불가피하다”고 분석했다.
금리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코스피가 고점 대비 20% 이상의 조정을 겪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정다운 LS증권 연구원은 과거 금리 인상 이슈가 시장에 영향을 미쳤던 2019년 8월과 2022년 9월, 코스피가 각각 고점 대비 26.5%와 34.8%까지 하락했던 점을 언급하며 “주식시장의 내재 변동성과 실현 변동성의 차이를 감안할 때 현재의 지수 급락은 그동안 과도하게 쌓여 있던 상방 프리미엄이 정상화되어 가는 과정”이라면서 이같이 짚었다. 그러면서 “여전히 확실한 저점 신호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인 데다 선물·옵션 동시 만기일과 코스피200 정기종목 교체,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등 대형 이벤트가 대기하고 있어 당분간 관망세를 유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단기적인 자금 쏠림 등 수급 요인을 제외하면, 증시를 이끄는 반도체 기업들의 실제 이익 창출력은 훼손되지 않았다는 분석에도 무게가 실린다. 황수욱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시장을 흔든 악재들의 실체는 기업 가치와 무관한 일시적 소음에 가깝다”며 “기업의 기초 체력에 이상이 없는 만큼, 일정 수준에서 주가가 버텨준다면 오히려 이번 조정을 우량주 매수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도 이날 “주식시장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여러분은 아주 기뻐해야 한다”며 “지금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외환당국 “환율 과도한 변동성 강력 대응” 구두개입
이날 서울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7년3개월 만에 최고 수준인 1555.2원으로 출발했다가 외환당국의 구두 개입 이후 다소 하락해 1535.0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환율 시초가는 직전 거래일 주간 종가(1539.1원)보다 16.1원 올랐고, 금융위기 때인 2009년 3월6일(1590원) 이후 가장 높았다.
외환당국은 이날 원·달러 환율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간거래 기준 처음으로 1550원을 넘자 “최근 외환시장에서 환율은 수급요인 외에도 NDF 등 일부 투기적 외환거래가 변동성을 증대시킨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펀더멘털(기초체력) 대비 과도한 변동성과 일방향의 쏠림을 결코 용인하지 않고 강력히 대응해 나갈 것”이라고 구두개입에 나섰다. 지난달 7일부터 이달 5일까지 20영업일 연속 외국인이 우리 증권시장에서 주식을 순매도(약 77조6000억원)한 점이 환율 상승의 직접적인 배경이지만, 원화 하락에 베팅하는 일부 투기적 거래 역시 쏠림 현상을 가속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외환당국은 특히 다른 나라에서 운용되는 선물환으로 파생금융상품의 일종인 NDF를 유심히 보고 있다. NDF는 만기에 현물을 인도하거나 계약 원금을 상호 교환하지 않고, 계약한 선물환율과 현물환율의 차액만 달러로 결제하기 때문에 원화 없이 증거금만으로도 거액의 투기성 베팅이 가능하다. 투기 세력이 NDF를 통해 달러를 사면 ‘달러 매도’ 포지션을 갖는 외국계 중개 은행이 국내 외환은행에 위험을 넘기는 헤지 거래를 하고, 국내 외환은행이 환 변동 위험을 상쇄하기 위해 우리 현물환 시장에서 달러를 대거 사들이면 원화 약세가 심화된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도 인사청문회 등을 통해 “꼬리가 몸통을 흔들고 있다”며 NDF 거래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수출업체들이 과도하게 대금을 늦게 수령하거나, 수입업체들이 수입대금 지급을 앞당기는 불법거래도 환율 상승을 부추기는 원인이라고 외환당국은 보고 있다. 외국환거래법에 따르면 1년을 초과해 수입업체들이 달러 결제를 미리 하거나 수출업체들이 달러를 늦게(1년 후) 수령하는 경우 한은에 미리 신고해야 한다.
외환당국은 이에 외환시장 거래를 24시간 허용해 NDF 거래를 우리 외환시장(DF)에 흡수해 투명성을 강화하는 한편 불법 외환거래 대응반을 통해 강도 높은 조사에 나설 계획이다. 외환당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외국인 주식 보유 비중이 최근 각각 47.8%, 51.3%로 낮아지는 등 외국인 투자자들의 주식 매도세 역시 서서히 진정 국면에 접어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외에 다른 종목으로 외국인 주식 투자자가 유입되는 점도 긍정적인 요인이다.
다만, 중동전쟁 장기화와 미국의 금리인상 등 대외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투기적 거래 대응으로 환율이 안정될 수 있을지 미지수란 분석이다. 강인수 숙명여대 교수(경제학)는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이나 외환보유액 규모로 볼 때 투기 세력이 환율에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하는 것은 과한 반응”이라며 “대미투자를 속도조절하거나 수출입기업의 환전을 적정선에서 유도하는 등 달러 수요가 늘어나는 것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금융위원회도 이날 신진창 사무처장 주재로 시중은행, 외은지점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열고 외환시장 교란 행위에 대한 검사 계획 등을 밝혔다. 은행권은 그룹 차원의 비상회의를 열고 지주사·은행 등 주요 자회사별 리스크 관리 수준을 강화하는 등 자체적인 고환율 대응 수위를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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