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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설원 속 휘몰아치는 판소리… 인간 존재 되묻다

입력 : 2025-04-13 20:30:15 수정 : 2025-04-13 20:3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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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 이자람의 ‘눈,눈,눈’… 톨스토이 단편 ‘주인과 하인’ 원작

소리꾼 이자람(사진)이 ‘눈, 눈, 눈’으로 자신이 일궈온 창작판소리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줬다.

공연예술 전 영역에서 눈부신 재능을 보여주고 있는 이자람이 새로 선보인 작품의 원작은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원작 영제는 ‘마스터 앤드 맨’인데 우리말로는 ‘주인과 하인’ 또는 ‘주인과 인간’으로 옮겨진다. 지난 9일 공연장에서 이자람은 오랜 인연으로 매년 집을 찾아가 식사까지 하는 프랑스 지인으로부터 “이자람, 그래서 판소리로 이번엔 무엇을 보여줄 거야” 하는 질문과 함께 받은 책을 읽고 마음이 움직여 작품까지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특별한 배경 없이 이자람의 오랜 동지인 고수 이준형과 단둘인 무대는 소리꾼 사설이 시작되면서 온통 눈으로 뒤덮인 성탄 연휴 러시아 시골마을과 협곡으로 변한다. “일하고 싶은 만큼 일하게 하고, 일한 만큼 준다”는 단순한 원칙을 자신의 도덕성으로 자부하는 시골 부자 바실리, 묵묵하나 경험 많은 일꾼 니키타, 그리고 멋진 갈색 윤기를 자랑하는 종마 제티가 소리꾼 이야기와 창으로 무대 위에 등장한다. 굳이 말 고삐를 자신이 잡겠다고 고집부린 바실리는 안전하나 느린 길 대신 빠르나 위험한 협곡 길을 택한다. 결국 길 잃고 헤매다 간신히 도착한 이웃마을에서 주인은 쉬어가는 대신 고집을 부리며 다시 눈보라 속으로 나선다. 어리석은 바실리 선택이 계속될 때마다 자기 일인 양 객석에선 장탄식이 터져 나온다. 이자람은 ‘왜 나한테 그러냐’고 능청 섞인 볼멘 시늉을 하며 다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 옛적 어르신이 판소리를 즐기던 광경이 이랬을까 싶다.

중반부터 이자람의 장창은 원경과 근경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러시아 광야 속 바실리 일행을 마치 높이 뜬 새처럼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눈밭을 헤치고 다니느라 지친 제티의 땀에 젖은 말갈기까지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 이처럼 공연시간 110분은 한순간도 이자람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몰입의 연속이다.

제목대로 세상이 온통 ‘눈, 눈, 눈’인 극 막바지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원작자 톨스토이의 휴머니즘이다. 인간을 불완전한 존재로 보되,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해야 하는 존재로 의미를 부여했던 대문호가 마치 이자람의 소리를 빌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집요하게 묻는 듯하다.

오랜 고민의 결과로 이자람은 연대와 희생의 위대한 가치를 온몸으로 보여준다. 2007년 ‘사천가’, 2011년 ‘억척가’, 2014년 ‘이방인의 노래’에서 기른 힘으로 보여준 자신의 역작 ‘노인과 바다(2019)’를 넘어서는 신작이 나오는 순간이다. 브레히트와 마르케스, 헤밍웨이의 세계를 거쳐 이제 톨스토이의 눈보라 속까지 이르게 된 이자람 판소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박성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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