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남리 고분군 핑크뮬리·코스모스 물결 장관/황포돛배 타도 즐기는 영산강 유람/리사이클링 복합문화공간 3917마중 금목서향 가득/매년 11월이면 은행나무 아름다운 단풍 펼쳐져/전동인력거 타고 나주읍성 투어도 즐겨
서로 마주 보고 선 연인. 이제 막 남자에게 사랑 고백을 받았나보다. 여자 얼굴이 핑크뮬리보다 더 붉게 타오르는 걸 보니. 남자는 그런 여자의 예쁜 시간을 놓칠 새라, 바삐 손가락 놀리며 렌즈에 정성스레 담는다. 가을바람 살랑살랑 부니 핑크뮬리 옆에 지천으로 핀 코스모스도 한들거리며 나 좀 봐달라고 손짓한다. 높고 푸른 하늘 아래 흐드러진 가을꽃이 정신을 아찔하게 만드는 나주 반남 고분군 꽃밭으로 걸어 들어간다.
◆핑크뮬리 볼까 코스모스 즐길까
가을은 코스모스를 따라 온다. 가냘픈 이의 손가락처럼 가느다란 줄기에 수줍게 핀 하양, 노랑, 분홍의 꽃들이 소리 없이 피어나기 시작하면 무심한 사내의 가슴에도 낭만 한줄기 피어나니 말이다. 유난히 무덥고 길었던 여름을 잘 참아낸 덕분일까. 올해 코스모스는 그 색이 유난히 선명하고 맑다. 길에 무심하게 핀 몇송이 코스모스에도 ‘심쿵’하는데 끝없이 펼쳐진 코스모스 꽃밭에 서니 마치 소녀가 된 듯 영혼마저 맑아지는 기분이다.
전남 나주시 반남면 국립나주박물관 주변은 요즘 온통 여심을 홀리는 꽃밭으로 변했는데 박물관과 바로 이웃한 신촌리 고분군 꽃밭이 인기가 가장 높다. 코스모스와 핑크뮬리가 어우러지는 동화 같은 세상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마을 아주머니들이 수다를 떠는 정자 뒤로 3~4m 높이의 거대한 고분 2기가 불쑥 솟아있고 그 옆으로 핑크의 물결이 펼쳐진다. 평일 이른 아침이지만 영롱한 이슬 머금은 핑크뮬리를 즐기려는 부지런한 여행자들이 이미 꽃밭을 점령했다.
핑크뮬리와 코스모스 사이로 난 오솔길을 연인들이 손잡고 걷는다. 핑크뮬리의 꽃말은 ‘고백’. 분홍 코스모스는 ‘순정’, 노랑 코스모스는 ‘애정’이니 연인들이 꽃길만 걷자며 사랑 고백을 쏟아내기 좋은 공간이다. 도로 맞은편 덕산리 고분군에선 좀 더 여유롭게 꽃길을 걸을 수 있다. 고분군 뒤로 돌아가자 탄성이 쏟아진다. 넓은 들녘이 온통 주황색 황화코스모스로 덮인 풍경을 마주하니 막 사랑을 시작한 이처럼 가슴이 설렌다.
반남고분군은 영산강 유역에 넓게 분포한 마한시대의 역사유적. 높고 둥글게 흙을 쌓아 만든 대형옹관고분 수십기가 발견됐는데 영산강 유역 지배 세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한 고분에 2~3m 크기의 항아리 관을 여러개 매장해 1500여년전 고대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된다. 국립나주박물관에선 영산강 유역 유물이 전시돼 당시의 장례문화를 엿볼 수 있다.
◆황포돛배 타고 즐기는 영산강 추억
호남의 젖줄 영산강을 제대로 즐기려면 영산포에서 황포돛배를 타면 된다. 나주홍어거리 인근 선착장으로 내려서자 아담한 영산포 등대가 반긴다. 아픈 역사가 서린 곳이다. 일제강렴기 드넓은 나주평야의 쌀을 수탈하는 전진기지로 영산포가 개발됐고 영산강 수위를 관측하기 위해 1915년 등대가 세워졌다. 우리나라 내륙에서 설치된 유일한 등대다.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48km 뱃길을 왕래하던 선박들의 이정표로 사용되다 영산강 뱃길이 끊어지며 사명을 다했지만 지금도 남도인에게는 영산포의 상징으로 기억 속에 남아있다. 황포돛배는 영산포~천연염색박물관 구간 왕복 10km 물길을 매일 7회 운행한다. 약 50분동안 뺨에 닿는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한때 번성했던 영산강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나주는 흑산도나 목포만큼 홍어가 유명하다. 이유가 있다. 고려시대에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조정은 섬 주민을 뭍으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당시 영산현에 속해 있던 흑산도 사람들이 목포 앞바다에서 강을 거슬러 터를 잡은 곳이 바로 나주다. 영산강과 영산포라는 이름이 생긴 배경이다. 영산포 사람들은 흑산도 근처까지 나가 고기를 잡았는데 돌아오는 보름의 항해기간에 다른 생선은 다 상해버렸다. 하지만 홍어는 약간의 썩은 냄새와 톡 쏘는 맛을 지닌 별미로 변신했고 이를 계기로 삭힌 홍어가 탄생한 것으로 전해진다. 영산포 인근에 조성된 홍어거리에서 톡 쏘는 홍어를 즐길 수 있다. 인근 영산포 역사갤러리에선 홍어 이야기가 맛있게 펼쳐진다.
◆리사이클링 복합문화공간 3917마중
나주읍성 서성문이 마름모꼴 파란 액자 안에 담기는 ‘나주시티’ 조형물을 지나면 요즘 나주에 가장 핫한 공간 전남 우수건축자산 1호 리사이클링 에코뮤지엄 ‘3917마중’을 만난다. 부부인 남우진, 기애자 공동 대표가 2017년부터 나주 원도심에 버려진 폐가 7채를 순차적으로 복원해 만든 복합문화공간이다. 부부가 정성들여 복원한 건물들은 나주시 우수건축자산으로 등록돼 나주의 근대 역사 이야기를 전하는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4000평 규모의 공간은 숙박시설인 한옥 3채, 카페, 마이스행사장, 전시·공연장으로 꾸며져 지난해 58만명이 다녀갈 정도로 인기가 높다. 특히 휴가를 보내면서 일도 할 수 있는 블루워케이션 공간으로 입소문이 났다.
거대한 나무가 버티고 선 3917마중 마당으로 들어서자 잘 익은 살구와 자두를 섞어 놓은 듯한 은은하고 달콤한 향이 비강으로 파고든다. 꽃은 작지만 향이 멀리 퍼져 만리향으로도 불리는 금목서, 은목서 나무다. 또 마당 주변은 온통 은행나무 노거수가 에워싸고 있다. 보통 11월 초부터 샛노랗게 단풍이 든다니 곧 사계절중 가장 예쁜 시간을 즐길 수 있어 보인다. 한쪽 구석에는 선비의 고결함을 담은 회화나무와 마을을 지키는 신령스런 당산나무 역할을 하던 느티나무가 서로 붙어 한몸으로 자라는 신비한 연리지도 무성한 잎을 드리우고 있다.
3917마중의 중심 건물은 한옥 스테이 공간인 목서원. 1939년 건축된 전라남도 우수건축자산 1호로 한국, 일본, 서양의 건축양식을 섞은 독특한 한옥이다. 3917마중이란 이름은 이 건물에서 탄생했는데 ‘1939년 나주근대문화를 2017년에 마중하다’ 의미를 담았다. 툇마루에 앉으면 마치 영화속 빛바랜 추억 속의 한 장면 같은 근사한 인생샷을 얻을 수 있다. 실제 이곳은 사랑은 못 믿어도 연애는 하고 싶은 여자 유나비(한소희)와 연애는 성가셔도 썸은 타고 싶은 남자 박재언(송강)의 로맨스를 그린 드라마 ‘알고있지만,’의 주인공들이 하룻밤을 보낸 고택으로 등장한다. 목서원 뒤쪽 언덕으로 올라서면 허브정원과 한옥 스테이 공간인 난파정이 등장한다. 구한말 전라도 최초의 항일의병장인 난파 정석진의 아들 정우찬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제당으로 고즈넉한 휴가를 보내기 좋아 보인다. 건물마다 표시된 QR코드를 스캔하면 4D 360도 리얼스캔 영상으로 연결돼 건물 복원 전후 모습을 볼 수 있다.
3917마중은 올해 한국관광공사의 제15회 성장형관광벤쳐사업과 전라남도의 앵커스토어 사업을 통해서 지역소멸위기의 공동화된 원도심의 활성화에 박차를 가하고있다. 3917마중은 나주 경제 활성화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나주 청년양조장 4개 업체가 모인 홍보판매장 로컬브루어리 팝업스토어 ‘나주꺼야’를 지난 10일 오픈해 로컬 크리에이터들의 성장을 돕고 있다. 양조장은 국내 최초 배 와인 전문 브루랩 페어리플레이, 60년 전통주 명장 정고집 남도탁주, 국내 최초 수도원 맥주공방 홉플로우, 3대를 잇는 막걸리 명가 다도참주가가 참여했다.
또 나주배로 양갱, 빵, 쿠키, 배청 등 프리미엄 디저트를 개발해 나주관광상품 대상을 받았다. 3917마중에선 나주배 양갱 만들기, 비누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고 청년 예술가의 공연과 함께 나주 로컬 브루어리와 로컬푸드를 만끽하는 ‘이화에 월백하고’도 운영중이다. 자원을 활용한 리사이클링 작가들의 야외작품전도 열린다. 지난해 제1회 전라남도 민간정원페스타, 지역민판소리배우기 나주흥심소, 고택버스킹, 지역작가 초대전을 열었고 올해는 지난 10~12일 나주로컬페스타를 진행해 나주 관광 활성화를 이끌었다.
◆600년 수령 은행나무 만나는 읍성여행
3917마중 주변은 나주 역사가 풍성하게 펼쳐진다. 나주읍성마을관리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전동 인력거’를 타면 자세한 해설과 함께 편안하게 돌아볼 수 있다. 3917마중 담장 너머로 보이는 고풍스런 건물은 나주향교. 대성전 뜰 동문 옆에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버티고 서 있는데 수령 600년이 넘은 고목으로 이성계가 심은 나무라는 얘기가 전해진다. 대성전 뒤 명륜당 마당에선 지금도 열매를 왕성하게 생산하는 수령 500년이 넘은 비자나무를 만난다. 우리나라 3대 향교로 꼽히는 나주향교의 대성전은 전국 향교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임진왜란 때 성균관 대성전이 불타자 나주 향교 대성전을 모델로 복원했을 정도다.
나주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나주목이 설치돼 호남의 중심지로서 전라도 일대를 관할했다. 금성산과 영산강 사이에 터를 닦아 호남 최대 규모의 나주읍성을 축조하고 성안에 행정을 펼치는 관아 시설을 뒀는데 현재 객사 금성관, 수령의 업무 공간인 아사의 정문 정수루, 내아 금학헌 등이 잘 보존돼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중앙 관료의 숙소이던 금성관은 전국 객사 중 최대 규모다. 일반 객사와 달리 월대와 정청의 팔작지붕 등이 궁궐의 정전과 유사해 2019년 보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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