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판결 확정 후 1957년 10월 집행
구치소에 갇혀 있는 동안 가톨릭 귀의
佛 법원, 아들의 ‘명예회복’ 청구 기각
프랑스에서 1950년대 경찰관 살해 혐의로 사형을 당한 살인범의 아들이 “아버지는 충분히 회개했다”며 명예회복을 요구했으나 사법부에 의해 거부당했다. 법원은 “회개의 요건을 충족한다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15일(현지시간) AFP 통신에 따르면 우리 대법원에 해당하는 프랑스 파기원(破棄院)은 이날 살인범 자크 페슈(사형 당시 27세)의 아들인 제라르 페슈(69)가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해달라”며 제기한 청구를 최종적으로 기각했다. 프랑스는 유죄 판결이 확정된 범죄자가 징역형 복역 등을 마치고 나면 사법 당국에 명예회복을 요구할 수 있는 독특한 제도가 있다. 2020년에는 의회의 법률 개정으로 이 같은 권리가 과거 사형이 집행된 범죄자의 유족에게로까지 확대됐다. 프랑스는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사회당 정부 시절인 1981년 사형 제도를 폐지했다.
자크 페슈는 어린 시절 부모가 이혼한 뒤 가톨릭 신앙을 내던지고 온갖 비행을 일삼다가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그는 21세에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여성과 결혼했으나 곧 처자식을 버린 채 다른 여성과 바람을 피웠다. 자크는 남태평양에서 보트 여행을 즐기는 게 꿈이었다. 그는 23살이던 1954년 2월 보트 구입 자금을 마련하고자 어느 환전상을 상대로 강도 행각을 벌이던 중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과 맞닥뜨렸다. 당황한 자크는 도망을 치다가 권총을 꺼내 경찰관에게 난사했다. 몇 분 뒤 그는 다른 경찰관에게 붙잡혔고 총을 맞은 경찰관은 사망했다.
살인 혐의로 기소된 자크는 3년 넘게 재판을 받은 끝에 1957년 4월 파기원에서 사형 판결이 최종 확정됐다. 그런데 그는 사형수 신분으로 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동안 가톨릭 신앙에 귀의했다. 가족은 물론 수도사들과도 정기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종교적 깨달음을 고백했다. 구치소에서 지내는 동안 자크의 태도는 놀랍도록 경건해졌다. 그는 경찰관을 살해한 범행도 진지하게 후회하고 반성했다.
가족 그리고 가톨릭 관계자들은 대통령에게 자크의 사면을 탄원했다. 하지만 르네 코티 당시 대통령은 이 같은 요청을 거부했고, 자크는 결국 1957년 10월1일 단두대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프랑스 혁명 시기에 처음 등장한 단두대는 1977년까지도 프랑스에서 사형 집행 도구로 쓰였다. 사형 집행 하루 전 자크는 과거 극심하게 다퉜던 아내와 극적인 화해를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일기에는 “5시간 뒤면 저는 예수님을 뵙고 있을 겁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자크가 남긴 편지는 그의 사후 책으로 출간됐다. 가톨릭 신자들은 “자크의 글을 읽으며 커다란 영감을 얻었다”고 털어놨다. 사형 집행 후 수십년이 지나 자크는 프랑스 가톨릭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파리 대교구는 1987년 자크를 상대로 시복(諡福: 가톨릭의 성인으로 인정하는 것) 절차 착수에 앞선 예비 조사에 나섰다. 하지만 “젊은 시절 저지른 살인죄는 결코 성인 지위와 양립할 수 없다”는 반대 견해와 “생애 말년의 회개와 종교 귀의가 수많은 이에게 희망을 선사했다”는 찬성 의견이 여전히 팽팽하게 맞서는 상황이다.
아들 제라르 페슈는 소송 과정에서 “부친은 완전히 회개하고 종교적 신념에 충실했다”며 “명예회복 조치가 이뤄진다고 해서 부친의 살인죄에 대한 사법부 판결이 무효화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을 폈다. 반면 검찰은 “피고인 자크 페슈가 사형 집행 이전에 그의 범죄로 인한 피해자들 그리고 사회와 화해했다고 볼 어떠한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반박했다. 결국 파기원은 검찰 의견을 받아들여 “고인의 행동이 회개의 충분한 요건을 구성한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선고 직후 제라르는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30년간 싸워왔는데 결국 물거품이 되었다는 점에서 무척 실망스럽다”는 입장을 밝혔다. 변호인도 “파기원이 인도주의를 실천할 기회를 스스로 놓쳤다”고 판결을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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