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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잃고 외양간 고치면 뭐 한당가”… 승객들은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밀착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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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6-14 18:00:00 수정 : 2021-06-14 18: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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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철거건물 붕괴 참사 노선 버스 타보니
14일 광주 학동 철거건물 붕괴 참사 현장 주변 횡단보도에 시내버스 임시정류소 안내문이 걸려 있다. 연합뉴스

광주 학동 철거건물 붕괴 참사가 발생한지 6일째인 14일 오후 3시30분쯤. 사고 당일과 비슷한 시각, ‘운림 54번’이 사고 현장을 지나게 됐다. 광주 북구 매곡동에서 무등산 입구인 동구 증심사까지 약 1시간을 운행하는 노선이다.

비극의 학동 증심사 버스정류장은 200m 가량 앞선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임시 정류장이라고 쓴 플래카드가 걸려 있고 승객들의 승하차를 돕는 안전요원도 배치됐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면 뭐 한당가. 주민들이 그렇게 옮겨달랄땐 꼼짝도 않드만”

 

이모(63·여)씨가 임시 정류장에서 내리면서 불편한 심기를 토해냈다.

 

버스가 움직이자 승객 사이에서는 적막감만 감돌았다. 임시정류장을 지날 때 승객 10여명은 차창 밖으로 얼굴을 돌리지 못했다. 5층 건물이 붕괴되면서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가 산처럼 쌓여 있는 모습이 얼핏 비쳤다. 아직도 건물 잔해와 흩어진 철근 뭉치가 사고 당시 참혹했던 광경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광주 학동 철거건물 붕괴 참사로 17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운림 54번 시내버스가 사고 직후 옮긴 임시정류장에서 승객을 태우고 있다. 한현묵 기자 

승객 박모(68)씨는 “버스를 탄 게 무슨 죄가 있어요? 너무 억울한 게 아닌가요?”라고 눈시울만 붉혔다. 

 

사망자 9명이 발생한 운림 54번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는 승객들은 참사 이후 엿새가 지났지만 극심한 불안과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오후에 출근하는 직장인 최모(34)씨는 버스 너머로 보이는 건물 잔해를 보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그의 지인이 이번 사고로 희생됐다. 최씨는 “임시 정류장이 재개발 구역 한복판에 있다”며 “건물이 철거돼 승객도 없는데, 재개발구역과 떨어진 곳으로 정류장을 옮겨달라”고 토로했다.

 

13일 광주 학동 철거건물 붕괴 참사 현장 건너편 버스정류장에서 한 시민이 붕괴 잔해물 더미를 바라보고 있다. 뉴시스

광주 동구 운림동에서 분식 가게를 운영하는 김모(59)씨는 매일 오후 영업이 끝나면 ‘운림 54번’ 시내버스를 탔었다. 이튿날 장사에 쓸 찬거리를 사기 위해서였다. 운림 54번은 가게 주변에 정류장이 있는 데다가 광주의 대표적인 시장을 다 지난다. 대인시장과 남광주시장, 서방시장. 김씨는 지난 10년간 운림 54번을 자가용처럼 이용해왔다.

 

지난 9일 이후 그는 더 이상 운림 54번을 타지 않는다. 김씨는 “사고 난 날 20분만 더 빨리 버스를 탔더라면 큰 일이 날 뻔했다”며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아 더는 운림 54번을 타지 못하겠다”고 하소연했다.

 

14일 광주 학동 철거건물 붕괴 참사 현장에서 공사 관계자가 안전 펜스를 설치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씨만 유독 예민한 것 같지는 않다. 광주시에 따르면 운림 54번 시내버스 승객은 참사 이후 32% 줄었다. 이달 3∼6일 5만3102명이었던 승객은 사고 이후인 10∼13일 3만5954명으로 감소했다. 시내버스를 타고 사고현장을 지나는 승객들은 앞으로 재개발 공사가 끝나는 2년 6개월간 건물 붕괴의 트라우마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게 가장 큰 걱정거리다. 

 

광주=한현묵 기자 hanshi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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