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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 피가 돌아야 살듯… 도시도 그렇다

입력 : 2021-06-12 03:05:00 수정 : 2021-06-11 20:5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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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은 몸 찬양한 그리스 폴리스, 신전에 표현
근대들어 ‘해부학적 연구’로 혁명적인 변화
도시 도로에 육체 혈액시스템 그대로 적용
‘막힘 없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공간 구현

고대∼현대까지 육체와 도시의 관계 탐구
몸에 대한 통찰로 읽어낸 서양도시 문명사
18세기 미국 워싱턴의 건설 계획은 격자 형태로 구역화된 방사형 도로시스템과 이를 통해 연결되는 몇 개의 교차점, 중심을 두고 있다. 문학동네 제공

살과 돌/리처드 세넷/임동근 옮김/문학동네/2만4000원

 

‘살’은 정치, 경제, 문화 등 인간 활동의 결과물을 상징한다. ‘돌’은 최초의 도시를 이룬 재료였으니 도시에 대한 은유다. 그러니까 ‘살과 돌’이란 제목의 이 책은 도시와 인간의 관계를 탐구한다. 흥미로운 대목은 인간, 혹은 인간 활동의 상징으로 살이란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미국 뉴욕대 교수를 지낸 도시학자인 저자 리처드 세넷은 도시를 육체와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책의 부제는 ‘서양 문명에서의 육체와 도시’다. 당대의 사람들이 육체에 대해 어떤 지식과 통찰을 갖고 있었는지에 따라 도시가 구성되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도시를 이야기할 때 고대 그리스를 빼놓을 수는 없다. 고대 그리스 폴리스의 형태와 사람들이 그 안에서 이룬 성취는 오늘날까지도 도시에서 이룬 문명의 시원으로 간주된다.

리처드 세넷/임동근 옮김/문학동네/2만4000원

저자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벗은 몸을 찬양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런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엘긴 마블스’란 이름으로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의 프리즈(frieze·건축물의 내외부에 붙인 띠 모양의 장식물)다. 도시의 창건과 도시의 신들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여한 시민들의 모습을 묘사한 이 위대한 조각은 “인간의 모습을 모두 젊고, 완벽한 몸으로, 그 완벽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 이 형상들은 인간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일반화”했다. 육체에 대한 이런 자부심의 원천은 체열에 대한 믿음이었다. 충분한 열을 받아야 “남성적이고 뜨겁고 강하고 적극적인 것으로 변해간다”는 의학적 견해에 대한 확신은 남성과 여성, 시민과 노예 등 인간 가치를 판단하는 척도였다.

벌거벗은 몸의 힘을 키우기 위해 고대 그리스인들이 도시에 설치한 것이 ‘김나시온’(‘완전한 나체’를 의미하는 ‘굼노이’가 어원)이었다. 김나시온은 젊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어떻게 나체가 되어갈지를 가르쳤다. “근육은 부풀어오르기 시작한 사춘기 중후반 소년의 몸”이 목표였다. 김나시온은 근육뿐 아니라 민주주의에 참여하기 위한 필수 기술인 남자의 목소리를 단련시키기도 했다. 언어능력의 우위 역시 체열의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었다. 저자는 “아테네의 김나시온이 소년들의 몸을 훈련시킨 것은 야만적인 힘을 넘어서게끔 하기 위해서였다”며 “김나시온에서 소년은 자신의 몸이 폴리스라는 더 큰 집합체의 일부임을, 육체는 도시에 속하는 것임을 배우게 된다”고 설명했다.

인체에서 가지처럼 자라는 혈관을 묘사한 17세기 의학서의 그림. 혈관을 통한 혈액의 순환을 건강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한 이후 이에 기초한 도시계획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체열의 원리에 따른 육체의 파악은 서구 사회에서 2000년 이상 지속되다가 1628년 윌리엄 하비의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가 발표되면서 혁명적인 변화를 맞게 된다. “심장이 동맥, 정맥을 통해 피를 공급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상처와 부패로부터 보호한다”는 그의 주장은 다른 연구자들에게도 자극을 주었고 “도시환경을 위한 사람들의 전망과 계획을 바꾸는 데 일조했다.” 하비와 그 계승자들에 의해 제시된 “호흡과 순환이라는 건강의 덕목”은 도시의 모습을 바꿔 놓기 시작했다. “건강한 육체처럼 기능하는 도시, 깨끗한 피부를 가졌을 뿐 아니라 자유롭게 이동하는 그런 도시”를 구현해 간 것이다.

1740년대 유럽의 도시들은 길의 먼지를 씻어내고 대소변이 가득한 물구덩이를 배수하며, 오물을 길 아래 하수구로 밀어넣었다. 도시를 깨끗한 피부로 꾸미기 시작한 것이다. 육체의 혈액 시스템은 도시의 도로를 만드는 데 적용됐다. 도시 계획가들은 “도시를 관통하는 움직임이 어디선가 막히게 되면, 마치 개인 육체가 동맥이 막힐 때 뇌졸중을 일으키고 고통을 받는 것처럼, 집합적인 육체가 순환의 위기를 겪게 된다”고 생각했다.

미국 독립혁명 직후 건설된 워싱턴은 이런 구상이 구체적으로 적용된 사례로 제시된다. 워싱턴 계획은 “고도로 유기적이고 종합적인 도시설계로 건강한 환경을 창조하는 권력에 대한 계몽주의의 신념을 입증한다. 또한 이 도시설계는 사람이 자유롭게 숨쉬는 건강한 도시의 이미지에 담긴 특정한 사회적, 정치적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792년 만들어진 워싱턴 건설 계획안은 격자 형태로 구역화된 복잡한 방사형 도로 시스템, 이를 통해 연결되는 몇 개의 교통 교차점과 중심을 담고 있었다. 또 “워싱턴의 습지와 넌더리나는 여름 기후”를 감안해 사람들이 마음껏 숨을 쉴 수 있는 도시의 허파를 구상했다. 이는 프랑스 파리 중심의 루이 15세대 광장을 참고한 것이었다. 이 광장은 루브르궁 앞에 있는 튈르리 정원의 끝에서 센강과 만나는 유럽 수도의 허파였다. 당시의 도시계획가들에게 허파는 “심장만큼 중요한 준거”였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추앙되는 토머스 제퍼슨은 “시민은 확 트인 야외에 나옴으로써 자유롭게 숨을 쉰다”고 말했다. 이 은유는 제퍼슨 자신이 사랑했던 시골에 적용한 것이었다. 반면 워싱턴을 계획한 이들은 이를 도시에 적용했다. “순환하는 피 덕분에 몸의 가장 작은 조직도 심장이나 뇌처럼 넘치는 생명력을 부여받으며, 육체의 개별 부위들이 삶을 동등하게 즐긴다는 것”을 의미했다. 도시는 이렇게 도로와 수로 같은 수많은 혈관을 만들어 냈고, 그 위에서 뼈대라고 할 수 있는 건축물과 살로 은유된 정체, 경제, 문화 등의 활동을 일구어 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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