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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잿더미서 EU 탄생까지 '유럽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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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발생한 체코의 민주화운동 ‘프라하의 봄’.◇소련 변화의 두 주역인 엘친(왼쪽)과 고르바초프.
포스트워 1945∼2005(전2권)/토니 주트 지음/조행복 옮김/플래닛/각 3만2000원

토니 주트 지음/조행복 옮김/플래닛/각 3만2000원
“유럽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계속해서 지지를 얻는 무언가가 있다. 유럽연합은 아니다. 민주주의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홀로 탄복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 추상적이고 불명료하다. 자유나 법치도 아니다. 자유나 법치는 수십 년 동안 중대한 위협을 받은 적이 없다. 더군다나 유럽연합 내 젊은 세대는 이를 이미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실제 작동 방식에 이러저러한 결함들이 있다고 심각하게 지적될 때조차 유럽인들을 하나로 결속시킨 것은 바로 ‘유럽식 사회모델’이라 불리는 것이다.”

지구촌의 절반을 붉게 물들였다가 70년 만에 막을 내린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 아직은 세계를 쥐락펴락하지만 높은 범죄율과 도덕적 균열, 국제사회의 리더십 상실로 석양의 낙조 신세가 된 미국을 대체하는 인류의 이상적 모델로 검토되는 체제가 있다. 바로 유럽, 유럽연합(EU)이다. 특히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벌어 풍요롭게 살자’는 미국식 생활양식과 대비돼 ‘적게 일하고 적게 벌고 대신 더 잘살자’는 유럽식 사회모델을 구축한 유럽인들의 삶이 새삼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대안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60년 전만 해도 전쟁의 잿더미에 불과했던 유럽은 과연 그럴 만한 자격이 있을까. 전후에 유럽인들은 어떤 변화를 겪었으며, 현재는 어떤 모습일까. 또 미래의 유럽은?

미국 뉴욕대학 유럽학 교수로 있는 영국인 토니 주트의 역작 ‘포스트워 1945∼2005―전쟁의 잿더미에서 불확실한 미래로 뛰어든 유럽 이야기’는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전쟁이 남긴 폐허에서부터 2005년까지 하나의 유럽을 향한 기나긴 여정을 담았다. 장장 1448쪽이나 되는 방대한 양이다.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에서부터 냉전의 기원, 유럽 제국주의의 종언과 식민지 해방, 유럽경제공동체의 탄생과 발전, 서유럽의 경제적 번영과 불만, 소련의 동유럽 지배와 소비에트 블록의 몰락, 발칸 전쟁, 난민과 불법 이민 노동자, 그리고 스포츠·음악·영화 등 일상적 삶에 이르기까지 백과사전처럼 광범위한 주제들을 스릴러의 속도감을 지닌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하고 있다. 전후 유럽의 모든 것이 담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러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책은 리스본에서 레닌그라드까지 유럽 34개국 60년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6개 국어로 된 문헌들과 최근에야 비로소 개방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유럽을 하나하나 해부한다.

하지만 주트의 유럽 오디세이는 우리에게 단지 현대 유럽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유럽 이야기의 주제들이 바로 우리 사회의 주제들이라는 데 있다. 우선 과거 청산과 통일, 지역감정, 이데올로기와 지식인의 쇠퇴, 반미주의와 반공주의, 출산율 감소와 국민연금 고갈, 공기업 민영화, 이주 노동자 문제 등 각각의 첨예한 사회적 쟁점들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적 갈등의 진원지라 할 복지국가와 신자유주의 사이의 길이라는 어려운 문제가 책 전체를 통해 논의되고 있다.

현대 유럽의 역사는 ‘계급’에 집착하며 ‘시장’을 고려하지 않는 좌파와, ‘복지’를 포기하고 ‘공익’을 고려하지 않는 우파 모두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한다. 좌파는 ‘계급’을 뛰어넘어야 하고 우파는 ‘시장’ 너머에 존재하는 사회적 자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 특히 전후 60년 동안의 유럽은 정치·경제·사상의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마치 여우처럼 유럽은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소련을 필두로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한 주트는 “동유럽인들이 권위적인 공산주의 체제에서 벗어나기를 열망했다는 사실이 곧 그들이 자본주의를 열망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동유럽 국가들은 자본주의라기보다는 유럽으로 복귀하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유럽공동체와 유럽연합이라는 제도적 실체의 존재는 그러한 열망을 더욱 부추겼다. 개인의 권리와 시민의 의무, 표현과 이동의 자유 같은 ‘유럽적’ 가치들에 이들은 쉽게 공명했다. 유럽은 이데올로기적 대안뿐만 아니라 정치적 규범도 대표했다. 그 관념은 때로 ‘시장경제’ 또는 ‘시민사회’로 변형되기도 했지만 어떤 경우든 ‘유럽’은 정상 상태와 현대적인 생활양식을 뜻했다. 유럽의 오랜 미래였던 미국은 설 자리가 없었다.

주트의 관심은 ‘유럽식 사회모델’로 모아진다. 다음은 그의 주장이다.

“이것이 비용이 매우 많이 드는 모델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지만 유럽인들에게 직업의 안정과 누진세, 대규모 사회적 이전 지출에 대한 약속은 시민 상호 간의 약속임과 동시에 정부와 시민 사이의 약속을 의미했다. 매년 실시되는 ‘유로바로미터’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절대 다수의 유럽인이 빈곤의 원인은 개인의 무능력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이라는 견해가 있었다.

이들에게는 또한 빈곤을 완화하는 데 쓰인다면 기꺼이 더 많은 세금을 납부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유럽 국가들에는 국가가 불운이나 시장의 위험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할 의무를 지고 있다는 데 대해서 폭넓은 국제적, 계급 간 합의가 존재했다. 회사도 국가도 직원을 하찮은 생산단위로 대우해서는 안 되며, 사회적 책임과 경제적 이익이 상호 배제관계에 있어서는 안 되었다. ‘성장’은 추구할 만한 것이었지만 어떤 비용을 치르고라도 얻어야 할 것은 아니었다.”

퇴행적 진보정권 10년을 뼈저리게 경험한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미래가 어디인지 ‘유럽’은 가르쳐 준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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