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장애를 가진 예술가, 생동감 넘치는 자유를 만끽하다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입력 : 2022-05-14 10:00:00 수정 : 2022-05-13 20:13:49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83) 툴루즈 로트레크의 회화 그리고 판화

근친혼 영향으로 하반신 성장 멈춰
평생 지팡이 의지 뒤뚱거리며 살아
붓질에 흥미느껴 화가의 길 들어서
파리 몽마르트르서 ‘스펙터클’ 체험

초기부터 편견 없는 시선으로 그려
귀족·지식인·창녀 등 모두와 어울려
인상파 영향 받아 개성까지 표현해
석판화 대표작… 순수미술의 길 열어
물랑루즈를 사랑한 화가 로트레크는 1889년 물랑루즈가 개장한 이후 그곳을 늘 드나들었다. 자신을 포함한 물랑루즈 장면과 단골 손님 초상을 작품으로 다수 남겼다. 왼쪽 그림은 1891년 작 ‘물랑 루즈: 라 굴뤼’ , 오른쪽 그림은 1892년 작 ‘물랑루즈의 영국 남자’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제공

#키 작은 파리의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

툴루즈 로트레크(Henri Marie Raymond de Toulouse-Lautrec Monfa, 1864∼1901)는 남프랑스의 도시 알비(Albi)에서 태어났다. 툴루즈와 함께 옛 미디피레네 지역의 유명한 도시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다. 옥시타니 지방 타른주의 주도로 대주교좌가 자리 잡은 중요한 도시이기도 하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대주교 궁전인 베르비궁과 생트세실 대성당 때문에 ‘붉은 도시’로 불린다. 베르비궁은 현재 로트레크의 그림을 전시하는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로트레크의 부모는 알비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알퐁스(Comte Alphonse) 백작과 툴루즈 로트레크(Adele de Toulouse-Lautrec) 백작이었다. 둘의 맏이로 태어난 로트레크는 집안의 권력과 부유에도 일찍부터 고난과 함께했다. 병약했으며 성장이 더디었고 10대에 넘어져 다리뼈가 부러진 이후 하반신이 자라지 않았다. 당시 귀족 간 근친혼의 영향으로 뼈가 약한 상태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결국 그는 키 150㎝ 정도에 다리는 짧고 상체는 큰 체형으로 지팡이에 의지해 뒤뚱거리며 평생을 살았다.

전원에서 생활하는 귀족 삶의 즐거움에는 잘 가꾸어진 정원 산책, 승마, 사냥 등이 있다. 하지만 로트레크의 몸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그는 교양 생활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인 것은 이 과정에서 그림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며 타고난 재능을 발견했단 점이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관찰하며 생각하고, 화면에 붓질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본격적으로 화가 수업을 받기 위해 파리에 갔고 초상화로 유명한 레옹 보나(Leon Joseph Florentin Bonnat)의 화실에 입성했다. 역사화로 알려진 페르낭 코르몽(Fernand Cormon)의 화실에서도 5년여간 머물렀다.

로트레크에게 파리는 알비에서는 만날 수 없는 사람과 분위기를 만나는 세계였다. 근대화의 한가운데서 대도시가 가진 혼란과 흥분은 전에 경험하지 못한 것을 눈앞에 펼쳤다. 카페, 술집, 댄스홀이 언덕에 위치한 몽마르트르는 더욱 그랬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그는 작업실을 몽마르트르로 옮겼다. 거기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을 만났다. 귀족, 좌파 지식인, 서커스 단원, 창녀 등을 비롯해 화가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에두아르 뷔야르(Jean-Edouard Vuillard) 등과 어울렸다. 그들과 전시장에 몰려다니고 카페에서 토론하며 새로운 예술의 실험에 심취했다. 기괴한 복장으로 가장무도회를 열고 모델과 생활하는 등 파리의 스펙터클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파리의 흥미로운 장면에 항상 자리한 그는 예술가부터 대중까지의 인기를 모두 얻었다. 작품을 활발히 전시했으며 모리스 조앙(Maurice Joyant) 등 화상을 통해 팔기도 했다. 20여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737점의 회화, 275점의 수채화, 5000여점의 드로잉, 40여개의 판화 및 포스터 등을 제작한 것은 당시 파리의 사람들이 그 또는 그의 작품을 얼마나 원했는지 알게 한다. 하지만 그 스펙터클 가운데서 얻은 알코올 중독과 매독 등으로 건강을 잃었다. 요양원에 입원했으나 37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캔버스 위 회화부터 종이 위 판화까지

로트레크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알비에서 보는 장면 중 사람에 집중했다. 그가 사는 거대한 성 안에는 가족을 비롯해 하인 등 다수의 사람이 살았고 눈앞에서 움직였다. 같은 사람도 시시각각 다른 포즈와 표정을 보여 주었고 이를 포착, 표현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실제로 그는 당시 가족 관리 영지 셀레랑에서 일하던 청년 루티(Routy)를 여러 번 그린 바 있다. 루티가 야외의 담벼락에 앉아 나무를 깎고 있는 전신 그림도 모자를 쓴 채 어딘가를 응시하는 표정의 얼굴을 그린 그림도 존재한다. 때에 따라 달라지는 하나의 대상을 그리는 일은 인상파적 빛과 색채를 알게 했다.

그는 루티 그림에서처럼 사람을 그리며 초기부터 편견 없는 시선을 보였다. 귀족이 아니어도 농부, 하인 모두 그의 화면에서 주인공으로 다루어졌다. 물론 근대에 들어서 계층 인식이 달라지고 그림에 현실을 반영하는 등 사회적 움직임과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이보다 철저히 관찰자의 입장에서 인물에게 집중해 외모뿐 아니라 성격적 개성까지 표현하고자 했다. 그의 그림 속 인물이 때로는 캐리커처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무슈 숲의 정원에 있는 여자’(1889∼1991)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제공

로트레크는 파리에 와서는 몽마르트르에서 만난 친구들을 모델로 삼아 그렸다. ‘므시외 숲의 정원에 있는 여자(Woman in the Garden of Monsieur Forest)’(1889∼1891)는 이러한 그의 시선을 보여 주는 그림이다. 므시외는 프랑스어에서 Mr.(미스터)를 뜻하는 말이며 여기서 정원을 소유한 므시외는 페르(Pere)로 알려졌다. 모델 역할을 하는 여인은 구겨진 핑크 블라우스를 입고 입술을 앙다문 채 눈썹에 힘을 주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움직이기 편하게 하나로 묶은 채 앞으로 넘겨진 헤어스타일에서 그가 노동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정원의 단풍을 배경으로 몽마르트르의 이웃들을 앉혀 놓고 그림을 그렸다. 1889년부터 1891년까지 야외(plein-air)에서 그림을 그리는 인상주의자들의 작업 방식을 실험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임포지션’(impositions: 부과)이라고 부르며 스스로 부과한 연습을 통해 빛에 따라 달라지는 인물의 모습을 화면에 담아내려 애썼다. 그림에서 보이듯 로트레크의 작품에서 사람에 대한 묘사는 매우 선형적이다. 수많은 선이 만들어 낸 인물의 모습은 섬세함과 생동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그는 이를 위해 가는 선과 붓질로 화면을 완성했는데 칠해지지 않은 빈 곳들이 생기는 이유다.

로트레크는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 외에 매체를 선택하는 데도 편견이 없었다. ‘물랭루주: 라 굴뤼’(Moulin Rouge: La Goulue)(1891)는 회화, 조각으로 일컫는 전통 미술 매체가 아닌 석판화로 제작한 것이다. 세로 길이 190㎝에 네 가지 색상으로 인쇄한 이 대형 판화는 물랭루주로 사람들을 모으는 광고 효과를 동반했다. 핵심적인 특징을 중심으로 단순하게 대상을 그려 먼 곳에서도 눈에 띄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양한 모습과 글자들을 크고 작게 배치해 공간감을 부여하는 동시에 흥 나는 물랭루주의 분위기를 형성한 것이 탁월하다.

판화 작업은 회화 작업과 다른 방향성으로 그려지고 다른 목적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훗날 인쇄 기술의 발전 속에서 순수미술로의 가능성을 확보한 판화 작품에 영향을 끼쳤다. 거기까지 가기 전에 뭉크(Edvard Munch)가 석판화를 제작하는 데도 로트레크의 석판화 작업 영향이 컸다고 한다. 그의 예술 세계 안에서 ‘물랭루주: 라 굴뤼’ 등의 판화 작업을 함께 살펴보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다.

2019년 말 팬데믹(감염병 대유행) 발발 이후 미술에는 NFT(대체불가능토큰) 아트가 등장했다. 등장 초기에는 그 지속성에 관해 반신반의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최근 베네치아에서 국제 NFT 전시회가 열리고 미술계 주요 인사들이 참여하는 대담 등을 보고 있으니 NFT 아트는 파고를 넘어선 듯싶다.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달하는 데는 시간이 더 걸리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지만 훗날 그 역할이 무엇이 될지는 모를 일이다.


김한들 미술이론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아일릿 이로하 '매력적인 미소'
  • 아일릿 민주 '귀여운 토끼상'
  • 임수향 '시크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