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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소나기마을에서 만나는 사춘기 추억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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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5-23 10:00:00 수정 : 2020-05-23 16: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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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 두물머리 반나절 힐링여행/소년, 소녀 풋풋한 사랑을 만나다/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수숫단오솔길·고향의 숲/작품 속 이름 딴 산책로 따라 동심 울렸던 작품 속으로/백수련 심어놓은 세미원 데칼코마니 풍경/아름다운 돌다리길 한발한발 인생길 같아/아치형 다리로 꾸민 모네의 정원 이국적/두 강물 만나는 두물머리도 몽환적인 풍경

 

긴 코트를 차려입고 모자를 쓴 백발의 노교수가 칠판에 분필로 쓴다. 어머니. “이 단어를 보면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떠오르나요. 오늘은 우리의 어머니를 얘기해 볼까요.” 3시간짜리 현대문학 수업은 한 학기 동안 그렇게 진행됐다. 노교수는 주제를 던지고 학생들은 각자의 경험이나 단상을 털어놓고 자유 토론한다. 지식의 전달도, 필기도 필요 없다. 가슴속 깊이 간직했던 서로의 추억들을 담담하게 늘어놓는 걸로 충분하다. 노교수는 ‘순수성과 완결성의 미학’으로 꼽히며 한국문학사의 한 봉우리를 장식한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

 

토요일 늦잠을 자고 일어나니 간밤에 내리던 비는 겨우 그쳤다. 날도 흐리고 이미 낮 12시를 넘겨 멀리는 못갈 것 같다. 고민하다 반나절로도 충분한 경기도 양평으로 길을 나선다. 마침 전날이 스승의 날이었는데 대학시절 잊지 못할 스승이 떠오른 것도 양평을 선택한 이유다. 그곳에 황순원 선생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기에.

 

소나기마을 입구 표지석
소나기마을  소년 소녀 조각상
소나기마을 전경

#소나기 마을에서 만나는 사춘기 추억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수능리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로 가는 길은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다. 두물머리를 거쳐 북한강을 거슬러 오르는데 수묵화처럼 산 능선이 아련하게 겹쳐지고 물안개가 걷히지 않은 푸른 물에 투영된다. 이래서 양평은 흐린 날이 더 운치 있다고 하는구나. 소나기마을 입구에는 파릇파릇 맛나게 익어가는 청보리밭이 조성돼 소박한 전원마을의 풍경을 선사한다.

 

아름다운 곳이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아직 진행 중이다. 매표소에서는 직원들이 코로나19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모든 방문객의 체온을 재고 연락처까지 확인한다.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당연히 입장 불가. 마을로 들어서니 소나기가 막 그치고 구름 사이로 햇살이 쏟아질 때처럼 날이 맑아져 소설속 주인공들이 어디선가 걸어나올 듯하다. 소년·소녀가 소나기를 피하던 수숫단과 정자는 여행자들을 소설 속으로 밀어넣는다. 소나기 광장에서는 매 시각 정시에 인공 소나기가 내린다. 어린아이들은 소설 내용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숫단으로 숨어들며 깔깔대고 웃는다.

 

소나기마을 전경
소나기마을 포토존

황순원 작가는 평남 대동군 재경면이 고향이지만 양평에 소나기마을이 조성된 이유가 있다. 소설 끝부분에 힌트가 등장한다. 소녀가 내일 떠난다는 소식에 ‘저도 모르게 주머니 속 호두알을 만지작거리며, 한 손으로 수없이 갈꽃을 휘어 꺾고 있었던 소년’은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어른들의 말을 듣고 ‘내일 소녀네가 이사하는 걸 가보나 어쩌나’ 고민하는 부분이다. 양평군은 2003년 작가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한 경희대학교와 자매결연을 하고 소나기를 배경으로 한 문학테마공원 조성에 나서 2009년 소나기마을을 탄생시켰다.

 

소나기마을 산책로

소나기광장을 중심으로 산책로가 잘 조성됐다. 수숫단 오솔길, 고향의 숲, 들꽃 마을, 학의 숲, 송아지 들판, 너와 나만의 길, 고백의 길, 해와 달의 숲, 목넘이고개, 징검다리 등 작품 내용에서 이름을 딴 산책로를 따라 걸으니 동심과 만나며 자연이 주는 여유로움이 온몸을 감싼다. 짧게는 10분에서 길게는 50분 코스로 둘러볼 수 있다.

 

황순원문학관
황순원문학관
황순원 육필원고
황순원문학관 서재

황순원문학관에는 유품과 작품이 전시돼 그의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작가와 만나는 1전시실에는 3·1운동 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 시내에 배포한 일로 투옥된 부친 황찬영의 얘기, 장남인 황동규 시인이 추억하는 아버지의 모습, 황순원의 출생부터 시심이 꽃피던 시절의 일들이 펼쳐진다. 또 그의 육필 원고와 생전의 모습들을 볼 수 있고 ‘언어를 벼리는 대장장이의 공간’으로 표현한 서재도 꾸며져 있다. 작가가 쓰던 시계, 만년필, 날면도기에서는 작가의 흔적이 생생하게 묻어난다. 2전시실에서는 그의 작품속으로 빠져든다. ‘독 짓는 늙은이’, ‘목넘이마을의 개’, ‘학’, ‘카인의 후예’, ‘나무들 비탈에 서다’ 등 중·단편소설의 작품세계를 조형물과 디지털 첨단장비를 통해 만난다.

 

#마음을 물로 씻고 꽃처럼 아름답게

 

‘순수와 절제의 극’을 추구한 작가의 묘역도 문학관 옆에 마련됐다. 잠시 눈을 감고 대학시절 선생의 수업 장면들을 떠올려 본다. 짧지만 그와 함께할 수 있었던 시간은 대단한 축복이리라. 순수한 동심으로 돌아가려면 마음을 씻어야 하는 법. 발길을 돌려 두물머리의 세미원(洗美苑)으로 향한다. 장자의 글 ‘관수세심(觀水洗心), 관화미심(觀花美心), 관산개심(觀山開心)’에서 이름을 빌렸다. ‘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며 마음을 아름답게 하고, 산을 보고 마음을 열라’는 뜻이다.

 

세미원입구
불이문(不二門)
세미원 국사원

태극기 모양의 ‘불이문(不二門)’이 여행자를 맞는다. 사람과 자연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자연철학사상이 담겼다. 문을 통과하면 한반도 모양으로 만든 연못 국사원으로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백수련을 심어놓았다. 주변은 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돌다리길이다. 인생길도 징검다리 건너듯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천천히 걸으라는 의미로 꾸몄단다. 나무가 울창하고 오솔길처럼 이어져 근사한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연인, 가족들이 서로 사진을 찍느라 곳곳에서 정체된다.

 

세미원 돌다리
세미원 장독대분수
세미원 페리기념연못

돌다리길을 지나면 장독대분수가 등장한다. 멋들어진 소나무를 둥글게 에워싼 장독대 뚜껑에서 분수가 마구 솟구쳐 오르는 풍경이 재미있다. 7∼8월이면 하얀 연꽃과 붉은 연꽃으로 뒤덮여 장관을 이루는 백련지와 홍련지 샛길에서는 시인 정호승의 ‘여름밤’을 읽고 가자. ‘들깻잎에 초승달을 싸서 어머님께 드린다/ 어머니는 맛있다고 자꾸 잡수신다/ 내일 밤엔 상추 잎에 별을 싸서 드려야지.’ 시인의 글 한줌이 이토록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다니. 물로 마음을 씻고 꽃으로 꾸몄는데 아름다운 시까지 한 편 얻고 가니 풍성한 나들이다.

 

세미원 사랑의 연못(모네의 정원)
세미원 사랑의 연못

산책길은 물을 보며 마음을 닦는 세심로로 이어지고 길 끝에 드디어 가장 인기 있는 사랑의 연못이 모습을 드러낸다. 프랑스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정원을 본떠 꾸몄는데 아치형 다리와 연못을 가득 채운 초록 수련잎, 가로등이 어우러져 이국적인 풍경을 완성했다. 연못의 조형물에는 다리 위에서 여행자들이 던진 동전이 가득하다. 이곳에 모인 동전은 아프리카 말라위로 보내져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데 쓰인다고 한다.

 

두물머리
두물머리

세미원은 두물머리와 배다리로 연결돼 있다. 두 곳 모두 주차장이 있어 어느 쪽을 먼저 가도 된다. 하지만 두물머리에 주차하면 주차비와 세미원 입장료를 따로 내야 하므로 세미원에 주차하고 두물머리까지 다녀오는 코스를 추천한다. 두물머리는 금강산에서 시작한 북한강과 강원도 금대봉 기슭 검룡소에서 흘러내린 남한강 두 물이 머리를 맞대며 만나는 곳. 워낙 풍경이 수려해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과 석범 이건필이 두물머리를 그림으로 남겼다. 강원도와 충청도에서 출발해 서울로 가던 뱃사람들은 서울로 가기 전 ‘마지막 휴게소’인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며 주막집에서 목을 축이고 말에 죽을 먹여 ‘말죽거리’로 불렸단다.

 

두물머리 고목벤치
두물머리
두물머리 느티나무

이곳의 명물은 세 그루가 한 그루로 보이는 느티나무다. 4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두물머리의 새벽 물안개를 지켜본 ‘영물’로 옛이야기가 전해진다. 도당할아버지와 도당할머니로 부르는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었는데 1972년 팔당댐 건설로 도당할머니 나무가 수몰되고 말았다. 이 느티나무에 살던 큰 구렁이는 한국전쟁 등 큰 국난이 발생하기 전 밖으로 나와 예고를 했다고 한다. 또 일제강점기 때는 군인이 총을 만들려고 나무를 베려 했지만 갑자기 손이 부러져 나무를 베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이 느티나무를 기려 매년 음력 9월 2일 가정의 안녕과 평온을 빌며 도당제를 올린다. 여유가 있다면 두물머리 액자 포토존과 물안개쉼터를 거쳐 두물경까지 천천히 걸어보길. 인적이 드물어 때 묻지 않은 자연과 한 몸이 되며 조용한 사색의 시간을 선물받는다. 

 

양평=글·사진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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