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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만史설문] 60갑자 한바퀴 돈 인생, 꽃처럼 아름다워 ‘화갑’이라

〈84〉 나이의 이름들 (하)

시험에 잘 나오는 말 아니더라도 말 자체 또는 말의 본디에 대한 관심이 우리 사회에서 지식의 방법으로 더 잘 쓰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이의 이름들’ 상(上)편에 대한 큰 관심이 반가웠다는 감회다. (우리) 말의 속뜻에 대한 질문도 많았다. 연재되는 이 글 구석구석에서 늘 설명하는 개념이다. 한자(어)에 국한한 의미가 아니다. 속뜻은 어느 언어에도 다 있다.

개나 말은 견마지로(犬馬之勞)처럼 우리 말글에 늘 등장하는 ‘조연급 배우’들이다. 견마지치(-齒)나 견마지년(-年)이란 말은 제 나이를 겸손하게 이르는 뜻이다. ‘지식인’으로 온갖 행세 다 하고서도 더 먹을 게 보였나? ‘국사 단일화’ 손들고 나선 이들의 나이도 혹 견마지치에 비유된다면, 개도 말도 퍽 싫겠다. 가축 나이를 어림하는 이빨 치(齒)는 나이의 메타포다.

나이의 이름 중 일본식 사이비 속설로 지어진 상당수 이름들이 마치 정설인 듯 알려지고 버젓이 국어시험이나 입사시험에 출제되기까지 한다.
연합뉴스
공자의 논어 위정편(爲政篇) 말씀도 결국은 나잇값 얘기다. 나이 값어치도 못하면서 이빨만 깐다면 아들 손자 등 제 후손들에게까지 무슨 욕을 안길 속셈인가? 상식과 본디만큼 무거운 뜻이 또 있던가? ‘역사 좀 했다’는 김정배씨를 비롯한 고만고만한 여러 인사들에게 또 묻는다, 역사의 무서운 이치를. 개나 말은 비열하지 않다.

요즘 ‘60년은 살아야 나이란 말 쓸 수 있지 않느냐’ 하는 얘기 늘 듣는다. 혈기 여전한 ‘청춘’들에게 노년 호칭이 무슨 실례냐 하는 60대 이상의 ‘견해’나 ‘주장’이다. 하긴 공자님 시절이나 불과 50년 전 60대는 지금과 견줄 수 없는 나이이긴 했다. 당당하게 젊어 박수 받는 노장들에게 축복 보낸다. 후배들이 역량 크게 펼칠 수 있게 참 도움 주십사는 청(請)도 함께.

◆ 60대 : 이순 육순 환갑 회갑 화갑 진갑

50세 지천명(知天命)의 다음 이름, ‘귀가 순해진다’는 60세 이순(耳順)은 모든 소리 즉 말이 거슬리지 않아야 60년 나잇값은 되겠다는 선언적 이념이겠다.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이렇게 공자는 늘 ‘오르지 못할 산’으로 우리 일상에 서 있는가.

갑골문을 비롯한 쌀 米자의 옛 글자들 모음. 오랜 문자의 역사에서 米자는 줄곧 곡식 즉 쌀 낱알들의 그림이었다.
하영삼 저 ‘한자어원사전’ 삽화 인용
이순과 함께 여섯 번의 10년(순旬)을 보냈다는 육순(六旬) 말고는 모두 갑(甲)자가 들었다. (다시) ‘갑’으로 돌아온 환갑(還甲) 회갑(回甲)과 그 삶이 꽃처럼 아름답다는 화갑(華甲)은 60갑자 한 바퀴를 다 돌아온 동양사상의 의미와 그 인생을 함께 매기는 멋진 이름이다. 빛날 ‘華’와 꽃 화(花)는 원래 같은 꽃의 글자다. 이순 다음 해는 새 60갑자로 진입하는 진갑(進甲)이다.

◆ 70대 : 칠순 고희 희수 종심

칠순(七旬)의 별명인 고희(古稀)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즉 예부터 드문 나이라는 당나라 두보(杜甫)의 ‘곡강시(曲江詩)’에서 왔다. ‘드문(稀) 나이’의 뜻 희수(稀壽)도 같은 뜻.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 없다는 70세의 별명 종심(從心)은 논어에서 나왔다.

◆ 80대 : 팔순 망구순 망구

팔순(八旬)을 한 해 지나면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라는 망구순(望九旬) 또는 망구라는 이름이 기다린다. 우리말 ‘망구’와는 어떤 관계일까? 국어사전에는 ‘망구’가 ‘할망구’와 같은 말이며 ‘늙은 여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는 새김이 달려 있다. 망구가 한자와 관계없는 토박이말이라고 국립국어원이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럴까? 한자 표기나 어원(語源) 설명도 없다. 90세를 바라본다는 이름 망구(望九)는 우리말처럼 비하(卑下)의 뜻이 없다. 우리말의 그런 뜻은 망구(妄?) 즉 망령된 노파의 뜻에서 온 것이겠다. 모르면 자칫 실수할 대목이다.

◆ 90대 100세 : 구순 상수

예로부터 고희 70세 이상은 인원이 적었다. 팔순과 구순(九旬) 말고는 특별한 이름이 없었던 이유겠다. 100세나 그 이상의 나이를 상수(上壽)라고 부른 것을 주목하자. ‘하늘이 내려준 좋은 나이’라는 뜻이겠다. 장자(莊子)의 ‘잡편’(雜篇)에 나오는 얘기로 하수(下壽 60세) 중수(中壽 80세)와 더불어 100세 상수를 삼로(三老)라 한다고 했다. 수(壽)는 목숨이나 수명의 뜻이다.

◆ 망(望) 이름의 나이 : 망육 망칠 망팔 망구 망백

‘바라보다’는 뜻 望자를 붙여 어른이 오래 사시도록 축원하는 뜻을 담은 이름이다. 망륙(望六 51세) 망칠(望七 61세) 망팔(望八 71세) 망구(望九 81세) 망백(望百 91세) 등이 그것이다. 가령 망백은 90세를 지났으니 이제 100세도 머지않았다는 뉘앙스의 착한 기원을 품는다.

강상헌 언론인·우리글진흥원 원장

■ 사족(蛇足)

자주 듣는 나이의 이름 중 상당수는 문자 장난이나 글자를 깨서 분해하는 파자(破字)의 재치가 두드러지는 왜산(倭産) 즉 일본제다. 어떤 것은 그럴싸하기도 해서 마치 우리나라나 동양의 오래된 지적 자산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사실, 알고는 있어야 바르게 쓸 수 있겠다.

이런 일본풍의 대표가 백수(白壽·99세)다. 일백 ‘百’에서 일(一)을 뺀 모양의 흰 ‘白’자로 (재치 있게) 99를 표현한 것이다. 졸수(卒壽·90세)는 卒자를 흘려 쓰면 위 아래로 구(九)와 십(十)자가 합쳐진 모양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실은 이 卒자는 ‘죽다’는 뜻도 있어서 마치 죽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민망한 뜻이 된다. 무도(無道)한 자들이 지은 이름, 피하는 것이 좋겠다.

그중 미수(米壽)라는 이름은 문제가 퍽 많다. 파자해보니 米자가 팔십팔(八十八)과 모양이 비슷하여 88세의 별명으로 쓴 것이라는데, 한자 어원에서 쌀 米자는 쌀 알갱이들의 그림일 뿐 ‘팔십팔’과는 상관이 없다. 농담 같은 이 일본 속설을 한자의 어원으로 착각한 이들 여럿이다. ‘쌀은, 수확 때까지 88번이나 되는 많은 수고를 해야 한다는 뜻의 문자’라는 사이비 또는 얼치기 일본식 어원론 퍼뜨리는 ‘당대 최고 석학’도 있다. 이런 오류가 버젓이 한자나 농업교재에 실린다. 파자는 놀이나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편법일 뿐이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듯, 편법이 본디를 몰아낸 경우다. 역할 큰 ‘학자’였기에 나쁜 영향 계속된다.

이밖에 미(美)자를 깨면 대충 육(六)육(六)이니 66세 미수(美壽), 희(喜)를 흘려 쓰면 칠(七)칠(七)처럼 보이니 77세 희수(喜壽), 우산 산(傘)자를 파자(破字)하면 팔(八)십(十)이 있으니 80세 산수(傘壽) 따위 억지 이름도 그런 경우다. 언어나 상식 등 여러 시험에서 이런 ‘나이의 이름’ 관련 문제가 자주 출제된다. 출제자들도 신중해야 할 터다.

나이는, 대충 먹는 것 아니다. 나이의 이름도, 그 나이의 삶도 그래서 기쁘고 경건(敬虔)하다. 몸과 마음 건강해야 인류에 도움 주며 그렇게 오래 살 수 있다. 부디 만수무강들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