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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추니 더 아찔한… 하이힐의 반란

'굽 없는 하이힐' 뜬다
투명굽 부츠, 까치발 한 듯 착시효과
절벽 닮은 웨지힐 구두 섹시미 ‘물씬’

“어? 하이힐인데 굽이 없네?”

요즘 구두 업계는 굽이 보이지 않는 하이힐, 일명 히든(hidden·숨겨진) 굽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 위드 에이치앤엠의 투명 아크릴 굽 부츠와 앵클 부츠. 멀리서 보면 까치발을 한 것처럼 보인다.
키 커보이기 위해 신발 안에 몰래 숨겨뒀던 ‘깔창’ 얘기가 아니다. 키를 늘리기 위한 기술적인 속임수가 아니라 재미와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한 장치이자 디자인적인 기교이다. 일명 트롱프뢰유(trompe l’oeil). 정교한 눈속임으로 시각적 환영과 착각을 주는 기법으로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유머러스한 감각을 살려 미술, 패션 전반에 활용된다.

국내에서는 최근 몇 년간 에르메스·발렌시아가 등 해외 유명 핸드백 모양을 프린트한 천 소재의 ‘진저백’ ‘소프트백’ 등 페이크 패션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이제 그 재치 있고 센스 넘치는 패션 트렌드가 발끝으로 내려온 것이다.

글로벌 SPA 브랜드 H&M은 지난해 11월 투명한 아크릴 굽의 펌프스(지퍼나 끈 등의 여밈 부분 없이 발등이 깊게 파인 여성용 구두), 앵클부츠(발목까지 올라오는 부츠), 롱부츠 등 3종을 출시해 화제를 모았다.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와 협업한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 위드 에이치앤엠(Maison Martin Margiela with H&M)’이 세계 동시 론칭하면서 선보인 제품이다.

투명 굽은 시원하고 깨끗한 느낌 때문에 여름 샌들에나 어울릴 듯하지만 겨울철에 따뜻한 가죽·세무 재질과 만난 것이다. 투명 굽의 구두는 멀리서 보면 굽 없이 마치 까치발을 하고 서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출시 당시 H&M 매장 앞에는 한정판 제품들을 사기 위해 새벽부터 돗자리를 깔고 진을 친 고객이 수백 명에 달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투명 아크릴 굽 구두들은 품절됐다.

투명 굽이 처음 나온 것은 아니다.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는 이미 2007년 봄·여름 컬렉션에서 투명 아크릴 굽을 선보여 패션 피플들을 열광시켰고, 이번에 H&M과의 협업으로 재탄생(re-edition)시키면서 투명 굽을 좀 더 대중화시킨 셈이다.

투명 굽은 대체로 10㎝ 이상의 높은 굽이 많은데 굽의 라인이 보이지 않아 굵고 높은 굽에서 느껴지는 투박함이나 피로감이 없고, 다리는 더 얇아보인다.

또 웨지힐이 안정감 있게 받쳐줘서 편안할 뿐 아니라 겨울철 빙판 길에서 미끄러질 걱정도 없다. 특히 까치발을 하고 있는 듯한 착시효과는 보는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뒷굽을 과감하게 생략한 알도의 웨지힐 구두.
뒷굽을 과감히 생략한 독특한 웨지힐 구두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캐나다 슈즈브랜드 알도의 웨지힐 구두는 투명 굽처럼 눈속임 효과를 노린 것이 아니다. 웨지힐은 밑창과 뒷굽이 하나로 연결되는데 알도의 웨지힐은 앞 볼에서 시작된 굽이 중간쯤에서 뚝 끊긴다. 하이힐에 뾰족한 굽이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보란 듯이 무너뜨린 디자인이다.

깎아지른 절벽처럼 가파르게 내려오는 뒷굽은 구조적인 형태 때문에 잘 빠진 건축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뒷부분의 부드러운 곡선이 여성의 육감적인 신체 라인을 연상하게 한다.

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똑바로 서 있기조차 힘들 것처럼 아찔하게 느껴지지만, 발 중간까지 안정적으로 받쳐주는 웨지힐 굽 덕분에 착용해 보면 활동에 전혀 지장이 없다. 

구두 뒷굽을 덮개로 씌워 보일 듯 말 듯한 지방시 부츠.
구두 뒷굽을 덮개로 씌워 가린 디자인도 나왔다. 지방시는 굽이 보이지 않도록 플랩(주머니의 입술 덮개 같은 것)으로 감싼 부츠를 선보였다. 처음부터 굽을 싸맨 것이 아니라 덮개를 덧댄 듯한 느낌으로 걸을 때마다 굽이 살짝살짝 보인다. 부드러운 송아지 가죽과 서로 세 가지 다른 톤의 브라운 컬러 배색이 주는 세련된 느낌이 매력적이다.

지방시 관계자는 “많은 슈즈 브랜드들이 힐을 강조하는 것과 반대로 힐을 보일 듯 말 듯하게 감춤으로써 은근하면서도 독특한 매력을 뿜어낸다”고 설명했다.

김수미 기자 leol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