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32〉최씨의 유래 시조가 분명하게 확인된 본관은 43본 입력 2012-06-19 17:14:48, 수정 2012-06-28 11:34:46 최씨는
강화최씨는 고려시대에 상서좌복야를 지냈다는 시조 최익후(崔益厚)가 최치원의 10대손으로 경주에서 분파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역시 최치원의 후예로서 조선조의 최득보(崔得寶)를 시조로 하는 광주최씨는 득보가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뒤 평안북도 안주로 옮겨가 살면서 이전의 거주지였던 광주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그밖에 최치원의 15세손 최연(崔淵)이 흥해로, 최윤순(崔允順)이 계림으로 각각 분적했다. 전주최씨에는 본관은 동일하되 시조를 달리하면서 서로간의 소목을 밝힐 수 없는 4개의 계통이 있다. 최균(崔均·고려 인종 때 등과하여 명종 때 예부낭중을 지내고 完山府院君에 추봉됨)을 시조로 하는 사도공파(司徒公派)와 최순작(崔純爵·고려 정종 때 등과하여 문하시중을 지냄)을 시조로 하는 문열공파(文烈公派), 최아(崔阿·고려 충숙왕 때 完山君에 봉해짐)를 시조로 하는 문성공파(文成公派), 그리고 최군옥(崔群玉·고려시대에 문하시중평장사를 지내고 完山府院君에 봉해짐)을 시조로 하는 문충공파(文忠公派)가 있다.
흥해최씨는 최균의 10세손인 최호(崔湖)가 검교대장군을 지내고 곡강군(曲江君·곡강은 지금의 흥해)에 봉해져 후손들이 그 세거의 인연을 따라 흥해를 관향으로 삼아 분적했다. 초계최씨의 시조는 고려 충렬왕 때 충익대보조공신(忠翼戴補祚功臣)이 되고 팔계군(八溪君·팔계는 지금의 초계)에 봉해진 용궁(龍宮)으로 전한다. 그는 전주최씨 문열공파의 시조 최순작의 후예이다. 또 광양최씨의 선대는 초계최씨와 같으며, 시조는 최한영(崔漢英)이다. 해동공자(海東孔子) 최충(崔沖)을 배출한 해주최씨의 시조는 최온(崔溫)이다. 해주는 최온의 선대부터의 세거지였으므로 관향이 되었다. 뒷날 청송·부안·아산·용궁최씨가 해주최씨로부터 분파한 것으로 전한다. 부안최씨의 시조로 전하는 최창일(崔昌一)은 고려시대에 공조전서를 지냈으나 고려가 망하자 부안으로 낙향했다. 동주최씨는 태사공 최준옹(崔俊邕·고려 태조를 도와 三韓功臣이 됨)을 시조로 하고 있다. 최준옹의 증손 최석(崔奭)이 관직에서 물러나 동주에 정착한 것이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삭녕최씨의 시조는 평장사 최천로(崔天老)의 후손으로 고려 명종 때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낸 최유가(崔兪嘉)로 전한다. 다른 문헌에서는 최천로와 최유가를 원조(遠祖)로 하나 그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때 친어모군낭장(新禦侮軍郎將)을 지낸 최선보(崔善甫)와 함경전부사(含慶殿副使)를 지낸 최연(崔?)을 각각 1세조로 하여 계대를 이어오고 있는 2개의 계통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이들이 선대의 세거지였던 삭녕을 그대로 관향으로 삼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화순최씨의 시조는 서북면도감판관을 지낸 최언(崔堰)으로 전하나, 다른 문헌에는 그의 선대로서 고려시대에 평장사를 지내고 오산군(烏山君·오산은 지금의 화순)에 봉해진 최세기(崔世基)를 시조로 전하기도 한다. 또 다른 계통으로는 최윤의(崔允儀)를 기세조(起世祖)로 하는 계통도 있다. 낭주(朗州·지금의 영암)를 관향으로 하는 낭주최씨의 시조는 신라말의 최흔(崔昕)이라고 한다. 그는 영암 사람으로 오랫동안 그곳에서 세거해온 것으로 전하는데 후손들이 선대의 세거지를 관향으로 삼아 계대를 이어온 듯하다. 최흔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말엽의 인물 최희소(崔希沼)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수성최씨는 신라 고허촌장 소벌도리의 후손이 아니라 최씨를 사성 받은 영규(永奎)를 시조로 한다. 영규는 본래 김씨로 신라 경순왕의 16대손인데 고려 원종 때 수주호장(隋州戶長)으로 있으면서 효제(孝悌)로써 백성을 잘 다스려 충렬왕이 그를 수성백(隋城伯·수성은 지금의 수원)으로 봉하고 최씨 성을 하사했다. 이에 따라 후손들이 본관을 수성으로 삼았다. 충주최씨의 시조는 중국 청하(淸河) 사람으로 당 소종(昭宗)의 명을 받아 신라 말 원종과 애노의 난을 평정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왔다가 그대로 예성(蘂城·지금의 충주)에 눌러 살았다는 최승(崔陞)으로 전한다. 그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충선왕 때 인물로 중원백(中原伯)에 봉해진 최공의(崔公義)와 최고(崔暠)를 1세조로 하는 계통이 있다. 그 밖에도 간성·양주·개성·나주·용주·직산·황주·안동·영암·완산·정주·죽산·진산·우봉·상원·하양·하음·한남·풍천 등을 본관으로 하는 최씨가 있다. 최씨의 기원과 유래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최씨는 신라 6부족의 하나인 돌산 고허촌의 촌장이었던 소벌도리를 시조로 하고 있다. 신라 6부족은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 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 취산 진지촌(?山珍支村), 금산 가리촌(金山加利村), 명활 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이다. 하지만, 신라에서는 3대 유리이사금 때 6부족에게 사성을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소벌도리의 성씨가 최씨는 아니었다. 즉, 돌산 고허촌이 최씨성을 하사받고, 그 시조로 소벌도리를 모시게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6부에 성씨를 하사한 왕은 3대 임금인 유리 이사금이다. 유리왕은 6부의 지명을 개칭하여, 알천 양산촌을 급량부(及梁部), 돌산 고허촌을 사량부(沙梁部), 무산 대수촌을 잠량부, 취산 진지촌을 본피부(本皮部), 금산 가리촌을 한저부(漢저部), 명활 산고야촌을 습비부(習比部)로 하면서 6부의 촌장에게 성을 내렸다. 양산촌의 알평에게는 이씨, 고허촌의 소벌도리에게는 최씨, 대수촌의 구례마에게는 손(孫)씨, 진지촌의 지백호에게는 정(鄭)씨, 가리촌의 기타에게는 배(裵)씨, 명활촌의 호진에게는 설(薛)씨를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와는 달리 삼국유사에서는 소벌도리는 정씨로, 지백호에게는 최씨를 하사했다고 다르게 적고 있다. 하지만, 이와 다른 계통의 최씨에 대한 이야기도 전한다. 최치원의 금석문으로 알려진 쌍계사 진감선사비에 ‘진감선사’의 속명이 최씨임을 밝히며, 고향은 전주 근처의 금마로 적고 있다. 또 진감선사의 선조에 대해선 수나라 때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포로가 되어 고구려에 눌러 살다가 고구려가 멸망한 뒤 금마로 내려와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신라 외에 고구려 계통에서도 최씨가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최씨 기록을 보면, ‘낙랑의 최리(崔理)’가 있다.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 왕자 호동을 사모해 자명고를 찢은 낙랑공주의 아버지 이름이 최리이다. 그래서 일부 역사가들은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과 구분하여 대동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었던 ‘최씨 낙랑’을 거론하기도 한다. 소벌도리의 후손으로 알려진 진주소씨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요임금의 후손인 기곤오가 소성(蘇城)의 하백(河伯)에 봉해지고 기원전 2266년 소성이 단군조선에 영속되면서 기씨를 소씨로 고쳤다. 기곤오의 후손이 신라 6부 촌장의 한 사람인 돌산 고허촌의 소벌도리이다.”(네이버 백과사전) 따라서 최씨의 기원은 산둥반도 근처에 살다가 고조선에 소속된 제후라는 설과 신라 박혁거세의 양부인 소벌도리라는 설, 낙랑공주의 아버지 이름이 최리였던 점을 볼 때 낙랑 태수의 성씨라는 설, 또는 고구려 계통에서 내려온 최씨(최치원의 진감선사비문) 등의 다양한 계통이 존재하는 셈이다. 하지만, 13대 미추왕과 17대 내물왕, 23대 법흥왕을 전후하여 신라 내부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던 점을 감안할 때(신라는 이 시기에 고대국가의 기틀과 신분제적 질서가 확립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26대 진흥왕 때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김씨라는 성이 쓰인 것을 감안할 때, 최씨라는 성이 탄생된 것은 3대 유리왕 때가 아니라, 그 이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kshky@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