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진·김진분 '자매 디자이너', 파리를 사로잡다 입력 2010-05-25 11:42:06, 수정 2010-05-25 11:58:07 한국 디자이너가 프랑스에서 설립한 브랜드가 한국에 들어오면 수입 브랜드일까, 국내 브랜드일까. 답하기 쉽지 않은 이 질문은 ‘부니끄 파리(BOONIQUE PARIS)’에서 비롯됐다.
언니 예진씨가 악수를 청하며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했다. 시원시원하면서 화끈한 성격이 느껴졌다. 이어 등장한 진분씨. 예진씨는 동생을 “우리 분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다. 자리에 앉아 녹차와 뻥튀기를 먹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진씨는 우리나라에서 한복 디자이너로 이미 이름을 날리고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취임기념 한복, 미국 NFL 스타 하인스 워드 가족 한복, 김대중 전 대통령 부부 노벨평화상 기념의상, 할리우드 스타 니콜라스 케이지 부부 한복, 힐러리 클린턴 한복, 이승엽 선수 가족 한복, 추성훈 선수 가족 한복 등 수많은 유명인사의 한복을 만들어왔다. 한복으로 일본항공인터내셔널(JAL)의 ‘올해의 대한민국 디자이너’로 2번이나 선정되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양장 여성복이라니. 대뜸 의아한 생각부터 들었다. 이에 대해 묻자 예진씨는 처음 디자인을 시작했던 이야기부터 꺼냈다. “예전부터 패션을 워낙 좋아하다 보니 해외여행을 해도 백화점은 꼭 들르는 코스였죠. 한번은 진선생님과 같이 영국 런던 헤롯백화점에 갔는데, 가장 좋은 자리에 일본 기모노가 걸려 있고, 그 뒤로 일본 명품 브랜드들이 있었습니다. 충격을 받았죠. 그때 동생과 함께 ‘기모노 자리에 한복을 걸고, 그 뒤로 한국 명품 브랜드 매장을 열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부니끄 파리’의 준비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예진씨는 그 길로 돌아와 한복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의류학을 전공해 ‘기본’은 알고 있었지만 한복의 유연한 곡선미와 패턴, 복식, 천연염색 등 여러 스승을 찾아다니며 처음부터 다시 공부를 했고, 89년 ‘김예진한복’을 열었다. 진분씨는 패션디자인 유학길에 올랐다. 프랑스 파리의 전통 있는 패션스쿨 ‘스튜디오 베르소’와 영국 ‘세인트 마틴대학’에서 공부했고, 샤넬·마틴 싯봉 등 세계적 패션기업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그렇게 예진씨는 한복 디자이너로, 진분씨는 여성복 디자이너로 이후 자매는 각자의 위치에서 자리매김을 해갔다. 그러면서도 자매는 그들만의 브랜드로 세계에 도전하겠다는 꿈을 잊지 않았다. 2000년 진분씨는 언니의 전화 한 통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제 함께 브랜드를 론칭해 세계무대에 도전할 때가 왔다’는 것. 2년간의 준비 작업 끝에 2002년 부니끄 파리를 설립했다. 그렇게 자매는 헤롯백화점에서 함께 꾼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물론 시작부터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매장을 하나 내는 것부터가 까다로웠다. 한국에서는 건물 주인의 ‘권력’으로 세입자에게 ‘나가라’고 하면 그만이다. 이와 달리 프랑스는 한번 임대를 내주면 법적으로 임대한 사람의 권리를 우선 보호하기 때문에, 건물 주인이 매장 임대를 주는 데 신중의 신중을 기한다고 한다. “지금 파리 매장도 주인이 마음에 드는 입점업체를 찾지 못해 9개월 동안 비어있었습니다. 이곳을 빌리기 위해 6개 업체가 경쟁을 했죠. 건물주에게 나와 동생의 17년간의 경력, 프레타포르테 참가 경력은 물론 매출과 회계자료까지 공개하며 ‘우리 브랜드가 이만큼 탄탄하고, 임대를 주면 절대 손해를 보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매장을 얻기까지 6개월이나 걸렸다는 예진씨의 설명이다. 현재 부니끄 파리 매장은 버버리 등 명품 브랜드 로드샵이 모여 있는 생제르멩 데프레 거리에 있다. 모든 옷의 디자인은 예진·진분씨가 협의해 결정한다. 그래서 이들이 만든 옷은 동서양의 조화가 이뤄져 있다. 모란 등 동양적 문양이나 한복의 아름다운 곡선 등이 서양식 여성복에 잘 녹아있다. 진분씨는 “준비하면서 교수님 등 많은 분의 조언을 구한 결과 현지화가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지나치게 현지화를 추구하면 한국의 정체성을 잃는 경우가 있다. 언니가 옆에서 적절히 제어를 해준다”고 말했다. 한 시즌에 여러 벌을 선보이고, 다품종·소량생산을 통해 ‘부니끄 파리’의 이름을 알려나갔다. ‘가격대는 명품과 일반 여성복의 중간이지만, 가격에 비해 디자인과 질은 명품에 견주어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고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부자라고 무조건 명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이면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하고 옷을 구하려는 합리적인 해외 상류층들의 소비성향도 도움이 됐다. “고객들이 ‘마담 킴’을 그렇게 찾아요. 언니가 1년에 3~4번 파리에 오는데, 언니가 고객에게 옷을 권하면 너무 예쁘다며 손님이 100% 지갑을 열죠.”
진분씨가 슬쩍 언니 예진씨 자랑을 했다. 이를 받아 예진씨의 동생 자랑도 이어졌다. “‘부니끄 파리’는 샤넬·베르사체와 같은 공방을 이용해 옷을 만들고 있어요. 이게 다 분선생님이 파리에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죠.” ‘입었을 때 편안하면서 예쁜 옷’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지금은 고객의 50% 이상이 단골이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어머니와 친구가 종종 부니끄 파리 매장을 찾아올 정도다. 프랑스인뿐 아니라 이들의 고객 리스트를 보면, 룩셈부르크·모나코·미국 등 출신지도 각양각색이다. ‘부니끄 파리’의 옷을 찾는 곳도 늘어나 유럽 8개국, 중동·아시아 16개국 편집매장에서 예진·진분씨의 옷이 판매되고 있다.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유럽 회사들과 손을 잡고 각종 컬렉션 무대를 열었고, 유럽 잡지 ‘메이드 인 럭스’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지난해엔 유럽 기업·방송사 등의 전액 후원을 받아 북유럽 상류층을 대상으로 룩셈부르크에서 ‘프라이빗 살롱쇼’를 열었다. 당시 무대에 오른 의상들이 모두 판매될 정도로 호응이 뜨거웠다. 이를 발판으로 올해 9월 룩셈부르크와 스위스에 정식 매장을 연다. 명품거리에 샤넬·에르메스 등 명품 브랜드 매장과 어깨를 나란히 할 예정이다. 그리고 올해 한국에도 정식으로 매장을 내고 본격적인 마케팅을 할 계획이다. 구체적인 것은 아직 ‘비밀’이라고. “세계 시장에서, 또 명품이라면 무조건 좋다고 생각하는 국내 시장에서, 명품 브랜드들과 맞서는 것은 ‘바위에 계란 치기’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깨진 계란은 바위에 얼룩을 남기고, 많은 사람이 그 얼룩을 보면 계란의 존재와 가치를 알게 되겠죠. 한국 브랜드가 명품으로 인정받을 때까지 노력할 겁니다.” 예진씨의 패션에 대한 ‘자존심’과 ‘열정’이 느껴졌다. 글·사진=이진경 기자 ljin@segy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