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시네마 logue]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과연 언제 단 한 번이라도 모순 없는 세상에 살았던가 입력 2010-04-22 16:41:14, 수정 2010-04-22 21:55:03 이준익 감독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그의 전작 ‘황산벌’과 ‘왕의 남자’ 중간 어디쯤 놓인 작품이다. 시도 때도 없이 동인, 서인을 나누는 백조대관들에 대한 냉소는 ‘황산벌’의 신랄함과 닮아 있고, 자기 앞에 놓인 비극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인간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왕의 남자’와 마주친다.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은 포커스가 맞지 않는 듯 흐릿한 영상으로 시작된다. 이 흐릿한 화면은 당대의 어지러움을 잘 보여준다. 초점 없는 영상 속에서 정여립이라는 이상적 정치가는 나에게는 동인도, 서인도 없다, 라며 순진한 고백을 한다. 그의 곁에는 황처사와 이몽학이라는 두 명의 동지가 있다. 둘 중 하나는 급진적 혁명론자이고 다른 하나는 침중한 현실주의자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봉사 황정학은 ‘꿈’을 향해 질주하는 이몽학과 ‘복수’에 빠져든 덜 벼린 칼 ‘견주’ 사이에 놓인 일종의 가교이다.
임진왜란이라는 절박한 역사적 사건의 바로 직전, 정여립은 ‘대동계’를 조직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한다. 하지만, 사적 군대는 역모의 의심을 사기 쉬운 법, 대동계의 발기자였던 정여립은 역모를 꾀한다는 이유로 능지처참 당하게 된다.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대동계는 이 사건을 계기로 크게 술렁거리고, 이때 급진적 혁명주의자인 이몽학은 근본적 변화를 주장하고 나선다. 자신과 꿈을 나누지 않는 자들을 모두 없애는 방식으로 이몽학은 자신이 바라는 ‘다른’ 세상을 향해 질주한다.
중요한 것은 임진왜란이 실상, 예견된 사태였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진짜 전쟁이 일어나느냐 아니냐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다만 동인과 서인 중 어느 쪽의 정책이 반영되느냐뿐이다. 그러니까, 누구의 권력이 더 큰가, 그 자체만이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이몽학의 급진적 혁명론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통해 지지를 넓혀간다. 그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뒤집어 엎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몽학에게 황처사는 그렇다면 과연 언제 단 한 번이라도 모순 없는 세상에 살았던가, 라고 되묻는다. ‘옳은 꿈’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네가 왕이 되려는 꿈”이 아니냐, 라면서.
혁명을 꿈꾸는 이몽학의 진로를 이준익 감독은 화려한 칼솜씨와 수려한 대사로 수놓는다. ‘무릇 광대는 탈 뒤에, 검객은 칼 뒤에 서 있어야 하는 법이다’와 같은 대사들은 화두처럼 관객의 귀를 사로잡는다. 절세 가인, 원수를 쫓는 가문의 마지막 혈육과 같은 무협지적 요소들이 팽팽한 실력을 갖춘 두 고수의 칼싸움 속에 녹아든다. ‘구르믈…’은 임진왜란이라는 이 땅의 구체적 역사를 배경으로 서로 다른 이상을 지닌 두 인물의 싸움을 무협지의 멋으로 풀어낸 작품인 셈이다.
눈이 멀었지만 지혜로운 황처사와 강렬한 꿈의 광채에 눈이 먼 몽학의 대결은 이 무협지적 결의의 정점을 장식한다. 강렬했던 만큼 처참한 몽학의 좌절이나 결국 되돌아 갈 길 없는 허무 역시 무협지적 정서를 보강해준다. 그런 점에서 ‘구르믈…’은 ‘왕의 남자’와 유사해보이지만 사실 오히려 정반대의 지점에 도착한 작품이다.
‘왕의 남자’가 역사와 허구 사이의 에너지를 비극으로 증폭시켰다면 ‘구르믈…’은 포즈를 극대화해냈다. 신랄한 정치성과 멋진 그림들 가운데 공들여 마련한 파국의 순간, 그런데 그 순간이 관객들을 공포와 연민으로 몰고 가지는 못한다.
영화·문학 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