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윤의 아시아 문화 기행] 열하일기의 무대, 청더 건륭제때 지은 淸나라 황제의 피서 산장 입력 2009-04-30 17:26:06, 수정 2009-04-30 18:20:48
원나라 이후 중국의 가장 큰 위협세력은 북방의 몽골족이었다. 이는 이민족 국가인 청나라로서도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적 위협이었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전통적으로 북방 민족에 대처했던 방식은 구태의연한 만리장성의 대대적인 수복 공사였다. 이런 구태의연함에 반기를 든 이는 건륭제였다. 건륭제는 중국 역사 이래 만리장성이 실제 외적을 막는 데 도움이 되었느냐며, 외적을 막는 진정한 방법은 민생의 안정임을 역설한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열하에 행궁을 짓고 매년 여름 거주하기로 결정한다. 여름철, 북방의 몽골족에게는 자라나는 풀로 인해 말들이 살찔 수 있는 이 시기가 거의 유일한 전쟁시즌이다. 몽골이 중국을 침입하기 위해서는 몇 곳의 관문을 지나야 하는데, 그중 하나가 열하다. 즉 황제는 몽골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계절만 되면 주력군을 이끌고 몸소 전방으로 이동한 셈. 황제는 그곳에서 사냥을 빙자한 군사훈련으로 몽골의 침입을 막았다. 범증이 유방의 목을 따기 위해 칼춤을 빙자해 기회를 노렸다는 초한지의 한 대목처럼 그 시절 청더 일대는 평온함 속의 긴장이 늘 흐르고 있었다. 베이징이 너무 더워 시원한 곳에 별장을 지었다는, 황제가 심심해 사냥을 즐겼다는 기록의 진실은 저 너머에 있었다. 베이징∼청더를 연결하는 5시간의 버스 여행은 그다지 지루하지 않았다. 베이징 북부의 수문장 옌산산맥(燕山山脈)의 웅장함, 중간중간 보이는 만리장성의 흔적들이 오히려 청더 여행의 흥미를 배가시켰다. 역 앞의 여인숙에 자리를 잡으니, 해는 이미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청더의 가장 유명한 요리는 사슴, 토끼, 양, 버섯 등이 들어간 전골요리인 기과야미팔선(汽鍋野味八仙)이라는데, 역 앞이라 그런가 이 요리를 하는 식당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말라 터진 중국식 만두 바오쯔나 입에 넣으며 내일을 기약할 수밖에…. 청더의 볼거리는 크게 두 곳으로 요약된다. 역대 황제들이 살았다는 피서산장(避暑山莊)과 피서산장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8곳의 아름다운 불교 사원 외팔묘(外八廟)가 그것이다. 이중 피서산장은 한국에 있는 서울대공원 넓이의 3배인 590만㎡를 자랑하는 어마어마한 크기. 피서산장 하나만 다 본다 해도 하루 온종일이 소요될 정도다.
피서산장의 거대함보다 더 웅장하게 다가온 것은 외팔묘다. 특히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 있는 포탈라궁을 모방한 보타종승지묘(普陀宗承之廟)와 티베트 제2의 도시인 시가체의 타시룬포 사원을 모방한 수미복수지묘(須彌福壽之廟)는 현재의 중국·티베트 관계를 알고 있다면 무척 파격적인 사원들. 본인이 티베트 불교 신자이기도 했던 건륭제는 티베트 제1, 2위의 종교·정치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를 베이징에 초대하며, 그들이 불편함을 느끼게 하지 않기 위해 티베트와 똑같은 구조의 사원을 지어줬다. 티베트 제1의 종교·정치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만 부르면 될 것을, 왜 굳이 판첸 라마까지 불렀을까? 송첸캄포왕 이후 왕조가 아닌 불교 종단에 의한 지배를 받는 티베트는 일종의 종교적 공동체였다. 각 지역은 라마라 불리는 법왕들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엄연한 의미에서 달라이 라마는 라싸 지역을, 판첸 라마는 시가체 지역을 분할 점령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건륭제가 노린 것은 2위도 배려하는 모습으로 1위를 안달 나게 하는 것. 혹은 2위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1위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함으로써 두 라마가 청나라에 충성 경쟁을 하게끔 수를 쓴 셈이다. 언젠가 방문했던 티베트의 포탈라궁, 달라이 라마 보좌에서 ‘당금 황제 만세 만만세’(當今皇帝萬歲萬萬歲)라는 편액을 보고 왜 라마들이 청나라 황제를 찬양하는지에 대해 이해 못 했던 실마리가 풀려나갔다. ![]() 그런 점에서 연암 박지원 일행은 현명했다. 황제가 티베트의 라마들에게 예를 표하라고 하자, 서쪽 오랑캐에게 고개를 조아릴 수 없다고 반발하다, 황제마저 라마에게 예를 표하자 어쩔 수 없이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소한 고리타분한 화이론(華夷論)일지언정 그들은 원리원칙에 충실했다. 티베트가 적극적 사대를 했다면, 우리는 그나마 소극적이었다는 데 의미를 둘 수 있을까? 그저 황제의 여름별장이겠거니 생각했던 청더는 진정 다양했다. 많은 일이 일어났던 역사의 현장. 다시 한 번 시간이 난다면 일주일쯤 진득하니 눌러앉아 좀 더 꼼꼼히 탐사해보고픈 마음만 간절할 뿐이다. >>여행정보 청더를 방문하기 위한 가장 좋은 관문도시는 베이징이다. 베이징∼청더는 기차와 버스가 연결되는데, 기차는 운행 편수가 제한적이라 자주 이용되지 않는다. 버스로는 4∼5시간이 소요되는데, 버스 출발 1시간쯤 지나면 만리장성 구간에 들어간다. 창 밖으로 바라보는 장성의 웅장함은 나름의 볼거리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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