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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챔프 그 뜻 이어 권투불씨 살리겠습니다”

故 최요삼 선수에 헌시 낭독한 한국 여성 프로 복서 1호 김주희

◇WBA 라이트플라이급 세계 챔피언 김주희 선수가 9일 소속체육관인 서울 문래동 스프리스 복싱클럽에서 가볍게 펀치볼을 치며 몸을 풀고 있다.
송원영 기자

‘한국 여성 프로복서 1호, 최연소 세계챔피언, 100년 만에 나올까 말까 한 최고의 선수….’

세계복싱협회(WBA)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김주희(22)에게 따라다니는 화려한 수식어들이다. 사각의 링에서는 호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복서인 김주희는 정작 스스로 겁 많은 울보라고 고백한다.

그는 지난 3일 비운의 복서 고 최요삼 선배의 장례에서 헌시를 낭독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기자는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스프리스 체육관에서 김주희를 만났다.

그는 앳된 외모와 밝고 예쁜 미소 덕에 ‘얼짱’복서로 알려져 있지만,

이날 두 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 내내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 남달랐던 인연

“정말 강한 분이라 일어날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실감이 안 나고 믿을 수가 없어요.”

기자가 최요삼 선수 얘기를 꺼내자마자 눈가에는 금세 눈물이 고였다. 김주희는 사고가 나자마자 최요삼 병실에 찾아가 머리맡에 오뚝이 인형을 남겨뒀다고 한다. 비록 이번에는 병실의 오뚝이는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지만….

두 선수의 각별한 인연은 지난해 6월쯤부터 시작됐다. 당시 김주희는 두 달 앞으로 다가온 WBA 타이틀 매치를 앞두고 스파링 파트너를 구하지 못해 애태우고 있었다. 그때 최요삼이 김주희의 요청에 선뜻 파트너로 나섰다. 최요삼은 첫 스파링에서 김주희의 재능과 열정을 한눈에 알아보고 ‘이런 선수가 있었나’ 감탄했다고 한다.

그는 두 달 동안 무려 100여차례 스파링을 해주며 체중 감량과 세밀한 기술 등 자신의 노하우와 경험을 아낌없이 전수했다. 덕분에 김주희는 다리 부상으로 1년 반의 공백기를 가진 선수답지 않게 기량이 일취월장해 이전 시합보다 더 성숙해졌다는 평가를 받으며 챔피언 타이틀을 따냈다.

“오빠는 늘 자신이 남자 복싱 최고가 되겠으니 너는 여자 복싱의 최고가 되라고 말했습니다. ”
◇지난해 8월 WBA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결정전을 앞두고 훈련하던 김주희가 최요삼선수와 스파링을 마치고 찍은 기념사진.
스프리스 복싱클럽 제공

두 선수는 프로복싱에 대한 생각도 비슷했다. 진정한 프로는 챔피언 벨트를 지키는 게 아니라 경기를 보는 관중에게 즐거움을 줘야 한다는 것.

“영화를 보러 갔다가 너무 재미없어서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내 경기를 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두 선수는 링에 오르면 몸을 사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파고들어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그러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는 ‘오뚝이’형 권투를 해왔다. 그래야 한국 복싱 중흥의 길이 열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권투가 비인기 종목이 아니었다면 오빠가 마지막 12회까지 그렇게 열심히 했을까 싶어요. 오빠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죠. ”

# 가난과 역경, 죽음마저 녹여 버린 복싱 사랑

20년 남짓한 삶에서 사각의 링은 어떤 곳이었을까. 그는 권투를 정말 좋아 한다고 말한다. 한때는 시합 도중에 숨진 김득구 선수는 죽는 순간까지 좋아하는 일을 했으니 행복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가난과 질병 등 숱한 시련과 불운을 겪어왔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엄마가 자신의 생일 케이크를 사준 뒤 집을 떠나버렸다고 한다. 외환위기가 한창이었던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이혼 충격에 일자리까지 잃어버린 뒤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하나뿐인 언니가 아르바이트하며 가장 역할을 했고, 자신도 교내 매점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어야 했다.

이 시절 언니는 주유소에서 늦게까지 아르바이트했는데, 동생을 자신이 다니던 복싱체육관에 맡겼다고 한다. 김수희는 이곳에서 복싱 스승인 정문호 관장(현 스피리스 체육관장)을 만났고 찢어질 듯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헝그리’ 복서의 길을 걷게 된다. 그래도 가난이 싫지는 않단다. 가난하지 않았다면 복서를 시작하지도 못했을 게 아니냐는 반문이다.

그는 2003년 국내 플라이급 챔피언에 이어 2004년 국제여자복싱협회(IFBA) 주니어플라이급 세계챔피언까지 올라 세 차례나 방어에 성공하며 승승장구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스텝이 생명인 복싱선수에게 치명적인 ‘발가락 골수염’이라는 질병이 그를 괴롭혔다. 김주희는 엄지발가락 뼈의 일부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한 뒤 지난해 8월 WBA챔피언으로 등극해 IFBA와 WBA 챔피언을 동시에 석권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에게 사각의 링은 가난과 질병, 죽음까지도 녹이는 삶의 용광로였던 셈이다. 
◇WBA 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 김주희 선수가 9일 소속 체육관인 스프리스 복싱클럽에서 자신의 권투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송원영 기자

#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김주희는 책읽기를 무척 좋아한다고 한다. 삼국지는 50번 이상 읽었을 정도로 최고의 애독서다.

“조조라는 인물이 제일 마음이 들어요. 링에 서면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뜨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가끔 냉정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늘 머리는 차가워야죠.”

그는 지독한 연습벌레로 유명하다. 정문호 관장은 “지난 9년 동안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혹독한 훈련을 해왔다”며 “끊임없는 노력과 성실이 주희를 최고의 복서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오늘 인터뷰 때문에 훈련이 늦어졌으니 이따 체육관 문 잠그고 1시간 더 훈련하고 가야겠네요.”

김주희가 인터뷰를 끝내고 사무실을 나서면서 기자에게 한 말이다. 이 처녀 복서에게서 과거 우리 국민 모두를 기쁨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헝그리’ 복서의 열정과 투혼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최요삼 선수 영결식에서 헌시를 읽다 울음을 터뜨렸는데요.

“제게는 친오빠 같은 분이었습니다. 이번 시합 끝나고 점심을 같이 하자고 약속했는데 ….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오빠가 다른 세상으로 떠나셨다는 게. 평소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습니다. 시합 며칠 전에 오빠가 전화했는데 제가 못 받았어요. 보통 때 같으면 제가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는 대로 전화하니까 계속 전화하고 그러질 않는데 그날따라 여러 차례 부재중 전화 기록이 찍혀 있었어요. 전화 꼭 하라는 문자메시지도 보내셨어요. 훈련 마치고 밤늦게 오빠한테 전화하긴 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하게도 그때는 평소와는 뭔가 달랐던 것 같아요. 체육관 곳곳에 오빠 포스터가 있는데 볼 때마다 자꾸 생각나서 마음이 아파요. 저를 많이 아껴줬는데….”

―최요삼 선수와는 어떻게 인연이 됐나요.

◇김주희가 18세였던 2005년 12월 국제여자복싱협회 주니어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결정전에서 멜리사 셰이퍼(미국)를 물리친 뒤 트로피를 들어 보이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지난해 8월 WBA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결정전을 앞두고 훈련하고 있었는데, 스파링 파트너를 구하지 못해 애만 태우고 있었어요. 그때 오빠가 선뜻 해주겠다고 나서주셨지요. 세계 레벨의 선수가, 그것도 세계챔피언이 여자 선수의 스파링 파트너가 돼 주는 일은 찾아보기 어려운 일입니다. 제가 세계챔피언이라고는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기량 차이가 많이 나거든요. 더구나 그때는 제가 다리에 골수염이 생겨서 오른발 엄지발가락 뼈를 조금 잘라내고 고름을 빼내며 1년6개월간 공백기를 가진 상황이었어요. 같은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것도 아닌데 제가 큰 도움을 받았죠. 제가 시합 마치고 나서 예전보다 좋아졌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다리 상태가 좋지 않아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는데도 말이죠. 그만큼 오빠한테 많이 배운 거죠.”

―사고 소식을 듣고 충격이 컸을 것 같습니다.

“처음 뇌사 판정 얘기를 들었을 때는 머리가 멍해지더군요. 며칠 동안 울었어요. 오빠 시합은 TV로 보고 있었어요. 경기 끝나고 병원으로 갔다고 했을 때에도 괜찮겠거니 생각했어요. 병문안 갔을 때도 의식은 없었지만 걱정은 안 했어요. 그래서 오뚝이 인형을 사다 머리맡에 두고 왔어요.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시라고. 그런데 며칠 안 돼 뇌사 판정을 받았어요. 하지만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죠. 마음 다잡고 훈련을 더 열심히 해야죠. 권투선수의 운명이니까요. 저도 아직 시합 일정이 잡히지 않았지만 봄쯤 타이틀 방어전을 치르게 될 것 같아요. 제자리로 빨리 돌아가야죠.”

―권투선수가 시합하다 목숨을 잃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두렵지 않나요.

“제가 처음 세계챔피언에 도전할 때였어요. 시합을 준비하면서 수혈을 할 정도로 많이 고생했고 긴장도 많이 했었죠. 그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요. 시합 도중 사망한 김득구 선수는 행복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은 결국 죽는데 언제 어떻게 죽을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그래서 죽는 순간까지 좋아하는 일을 했다는 게 좋아 보였죠. 저도 그렇지만 그분도 권투를 좋아하니까 계속 선수 생활을 했을 거라고 봐요. 단지 돈을 번다는 생각만으로는 하기 어렵거든요. 그래서 안타까운 일인 것은 분명하지만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김득구 선수는 생전에 만난 적이 없었죠. 최요삼 오빠는 친하게 지냈던 터라 막상 눈앞에서 겪게 되니까 너무 마음이 아파요. 하지만 저는 권투를 너무 좋아하고 그래서 링에 설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권투를 하고 싶어요.”

―이번 사건이 권투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이번 일을 계기로 건보금(건강보험금:대전료의 1%를 적립해 경기 중 다친 선수의 치료 재원으로 쓰기 위한 기금) 횡령 등 좋지 않은 문제들이 해결될 것 같아요. 비인기 종목이라 아무도 관심 두지 않던 문제인데 공론화돼 가능한 일이죠. 오빠의 죽음은 좋지 않은 일이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나라 권투가 다시 좋은 시절을 맞게 됐으면 좋겠어요. 권투가 비인기 종목이 아니었다면 오빠가 마지막 12회까지 그렇게 열심히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어쩌며 오빠 덕분에 비인기 종목에 관심이 생겼다고 봐야죠. 오빠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저 같은 후배들이 더 열심히 운동해야 할 것 같아요.”

―권투는 여성이 하기에는 거친 운동 아닌가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육상 선수였는데 몸이 안 좋아서 그만뒀어요. 성격이 더 소극적이게 되고 말도 없어지니까 언니가 한두 달 다녀보라고 체육관에 보내준 게 권투를 시작한 계기가 됐죠. 중학교 3학년 때 프로선수가 되기로 결심했죠. 외환위기 때 아버지가 실직하고 뇌경색으로 쓰러지셨어요. 그래서 세계챔피언이 돼서 돈 많이 벌어 다시 가족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죠. 훈련량이 많고 체중감량 같은 것도 힘든 것은 분명해요. 취미 삼아 배우러 체육관에 오시는 분들도 힘들다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권투는 룰이 정확하고 신사적인 운동이에요. 별명이 겁쟁이 울보인 저도 하잖아요.”
◇2004년 12월 열렸던 IFBA 주니플라이급 세계챔피언 결정전에서 김주희가 셰이퍼의 턱을 강타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챔피언이 돼서 돈은 많이 벌었나요.

“최요삼 오빠 마지막 시합 파이트머니(300만원)보다 훨씬 적어요. 여자 선수는. 1년에 3번 정도 시합하니까 그것만으로는 운동을 계속할 수 없어요. 그나마 저는 스프리스에서 계속 월급을 주고 용품도 지원해 주니까 큰 걱정 없이 운동할 수 있어요. 아마 남녀 통틀어서 고정 수입이 있는 권투 선수는 저밖에 없을 거예요. 파이트머니도 시합을 거듭할수록 많아지는 게 아니에요. 저는 오히려 1차 방어보다 2차, 3차로 갈수록 줄었어요. 경제 상황이 좋지 않거나 하는 이유로 많이 못 받아요. 돈 더 달라고 했다가는 ‘버릇이 나빠졌다’, ‘챔피언 되더니 변했다’ 이런 얘기를 듣게 돼요. 적게 받으면 다음에는 더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고 마는 거죠. 그래도 프로선수는 아마추어 선수와 다르게 돈에 관심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정문호관장은 김주희의 파이트 머니가 월로 따지면 60만∼70만원 정도로 웬만한 아르바이트보다도 못하다고 귀띔했다. 김주희가 일년에 세번 정도 경기를 하는 점에 비춰보면 파이트머니가 200만원 안팎으로 추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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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다면서 왜 계속 권투를 하려고 하나요.

“링에 설 때 묘한 쾌감을 느껴요. 단지 돈 벌려고 발가락뼈를 잘라내면서까지 권투를 하진 않을 거예요, 좋아하니까 하는 거지. 관장님도 가끔 훈련하는 것처럼 편의점에서 열심히 아르바이트하면 훨씬 쉽게 많은 돈을 벌 거라고 운동 그만두라는 말씀을 하셔요. 하지만 권투가 좋은걸요. IFBA 챔피언일 때 어렵게 3차 방어전 끝내고 4차 방어전을 준비할 때였어요. 더 잘해야지 하는 생각에 몸 상태는 생각하지 않고 무리했죠. 발가락에 염증이 생겼는데 아픈 것보다 다음 날 훈련을 못 하게 될까 더 걱정했어요. 결국 발가락뼈를 조금 잘라내고 고름을 뽑아내는 수술을 했죠. 의사들이 이 지경이 되도록 뭐했느냐고 야단쳤는데 저야 그렇게까지 될 줄 몰랐죠. 지난해 8월 WBA 챔피언결정전 할 때 다리에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이고 링에 올라갔어요. 엄지발가락이 좋지 않아 바깥쪽에 힘을 주다 보니 인대가 늘어난 상태였어요. 하지만 다리를 저는 한이 있어도 고집을 피워서 기어이 시합을 했죠.”

―권투선수 말고 해보고 싶은 일은 없나요.

“권투 해설자가 되고 싶어요. 외국 선수 시합을 보면 현역 선수가 해설을 하곤 해요. 경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중이나 시청자는 시합 준비 과정이나 여자선수만의 에피소드나 힘든 점 등 경기 외적인 부분에 관심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 것은 아무래도 여자가 해설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저도 기회가 돼서 보조해설을 세 번 정도 해 봤는데 아직은 링에 서는 것이 쉽게 느껴져요. 현역 선수로 더 많은 경험을 쌓아야겠지만요. 그래서 지금 중부대 엔터테인먼트 학과에 다니고 있어요. 다들 체육학과에 다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방송일을 알고 싶어서 선택했어요.”

―선수로서 목표는 뭔가요.

“재미있는 경기로 팬들이 경기장을 찾아오게 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더 많이 훈련해서 꼭 이겨야죠. 권투를 하다 보면 언제 은퇴하게 될지 몰라요. 당장 다음 시합에서 질 수도 있고 그러면 재기해야 하는데 못 할 수도 있고. 물론 권투 말고 회사원 같은 다른 일을 해도 잘할 자신은 있어요. 어디에나 힘든 상황은 있겠지만 이겨낼 자신도 있어요. 하지만 제가 제일 자신 있는 것은 권투예요. 공부나 다른 것에 소질이 있었으면 그것을 했겠죠. 그러니까 더 열심히 훈련하는 거죠. ”

―남자친구가 있나요, 결혼 생각은.

“남자친구를 사귈 시간이 없어요. 훈련 스케줄이 빡빡하거든요. 미팅 한 번 못 해봤어요. 제의도 안 들어오지만 시간이 없어서 할 수도 없어요. 기말고사도 간신히 치를 만큼 학교 다닐 시간도 빠듯해요. 하지만 결혼은 꼭 하고 싶어요. 어떤 선수는 샌드백이랑 결혼했다고 말하기도 하던데 저는 그렇지 않아요. 때가 되면 꼭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싶어요. 내 아이는 힘든 권투만 빼고 하고 싶은 거라면 뭐든 다 시켜줄 생각이에요. 혹시 재능을 타고났다면 고민해봐야겠지만 그래도 다른 운동을 고르게 할 거예요. 선수들끼리 가끔 하는 얘긴데, 다들 이렇게 힘든 일을 우리 아이들에게는 시키지 말자고 해요. 그런데 먼 얘기죠. 지금은 몸이 안 좋은 아버지 돌보는 게 먼저거든요. 아버지 병세가 좋아지면 그때 차분하게 생각해 보려고요.”

주춘렬·우상규 기자 cljo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