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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리뷰]''구리 패러독스''와 춤추는 환경정책

박석순 이화여대 교수·환경공학
지난달 25일 환경부는 팔당 상수원 특별대책 지역에 있는 하이닉스반도체의 구리 사용을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수도권 상수원 보호를 위해 절대 불가를 주장했던 정부가 입장을 바꾼 것이다. 환경정책이 보다 과학적으로 변해 가는 좋은 조짐으로 풀이된다.

구리에 대해 오랜 기간 논란이 벌어지고 정책이 바뀌는 이유는 구리가 갖는 독특한 환경독성학적인 성질 때문이다. 구리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고등동물이 매일 일정량을 섭취해야 건강을 유지하는 11가지 영양금속(철, 3가크롬, 코발트, 망간, 몰리브덴, 니켈, 셀레늄, 바나듐, 아연)에 포함되는 물질이다. 고등동물의 체내에서 구리는 뼈나 헤모글로빈, 적혈구 등을 형성하며 면역시스템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의 하루 권장량은 2㎎이며, 대부분 음식과 먹는 물을 통해 섭취된다. 비타민이나 영양제에도 구리가 포함되어 있으며, 빈혈 방지를 위해 구리가 많은 굴, 오징어, 게, 호두 등이 건강식품으로 권장되기도 한다. 구리는 모든 고등동물이 먹고, 쓰고, 버리기 때문에 먹는 물이나 생활하수나 축산폐수에도 있고, 하천이나 호수, 빗물에도 일정량 존재한다.

구리는 고등동물에는 필수영양금속이면서도 박테리아와 같은 미생물에는 독성을 나타내는 독특한 성질이 있다. 구리는 매우 낮은 농도에서도 강한 살균력을 가진다. 이러한 성질은 다른 물질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의 물질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하등생물에 독성이 있으면 고등생물에도 독성을 나타낸다. 그래서 고등생물에는 필수영양소이면서 하등생물에는 독성을 갖는 성질을 구리 패러독스라 부른다. 

우리 조상은 매우 지혜롭게 구리를 이용해 왔다. 구리로 만들어진 놋그릇을 사용하면서 구리의 살균력으로 음식의 부패는 막고 인체에는 필요한 영양분은 얻어온 것이다. 서양에서는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구리 용기에 물을 담아 질병을 막고 인체에 영양소를 보충해 왔다.

구리는 식물성 플랑크톤, 물벼룩과 같은 수중 무척추동물, 물고기 등에 낮은 농도에서도 독성을 보인다. 모든 영양 금속이 그러하듯 구리도 과다 섭취할 경우 독성이 있다. 그래서 수돗물 수질기준치에는 구리 농도 기준을 1.0㎎/ℓ로 정해 두고 있다. 구리를 과다 섭취하면 위장장애를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섭취량의 98% 정도를 분변으로 배설하기 때문에 건강 피해 사례는 매우 드물다. 

구리는 먹는 물의 관점에서 철과 쉽게 비교된다. 철과 구리는 모두 영양금속으로 건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나 과다할 경우 독성을 나타낸다. 과다 섭취하면 철은 구리보다 독성이 더 강하다. 그래서 철은 먹는 물 기준치를 구리(1.0㎎/ℓ)보다 더 낮은 0.3㎎/ℓ로 정해 두고 있다. 

미국은 구리가 갖는 독특한 성질에 부합되는 수질관리를 하고 있다. 일단 인체에 필요한 영양금속이므로 수돗물 수질기준을 1.3ppm까지 허용하고 있다. 다른 금속에 비해 허용치가 상당히 높은 것이다. 그리고 식수용 저수지의 녹조현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구리 화합물인 황산동 살포도 허용하고 있다. 현재 미국인들은 15% 정도의 구리를 먹는 물을 통해 섭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과 유럽연합은 수생태계 보호를 위해 구리를 특정유해물질로 분류해 두고 있다. 특히 연어가 서식하는 하천이나 하구는 매우 낮은 농도로 구리를 규제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 말 외국에서 수질기준치를 도입하면서 구리를 특정유해물질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수생태계 관리를 위한 구리 규제는 하지 않고 상수원 관리에만 적용하고 있다. 규제해야 할 곳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곳은 하는 꼴이 된 것이다. 늦었지만 정부가 개선의 노력을 보이는 것은 무척 다행한 일이다.

박석순 이대교수·환경공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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