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캉'' 들고 40년간 한 우물 팠죠 서울 신길동 역전이발관 주인 박종남씨 입력 2007-03-09 15:16:00, 수정 2007-03-09 15:16:00 “신길동에서 ‘황제 이발사’ 하면 지금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40여년간 오른손에는 ‘바리캉’과 가위를, 왼손엔 빗을 들고 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깎다 보니 오른손 엄지와 검지 형태가 완전히 변했어요. 내 인생 역정이 두 손과 바리캉에 고스란히 배어 있어요.”
“젊은 손님들이 우연히 우리 이발소에 들르면 ‘그동안 돈도 많이 벌었을 텐데 이발소를 현대식으로 바꾸고, 이발기구도 새것으로 바꾸면 좋지 않겠느냐’고 종종 물어요. 나는 그럴때마다 오래된 전통을 지키거나, 사라져가는 옛것을 지키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내 부모와 처자식을 먹여 살려 준 당시의 이발소와 이발기구들이 고마워 안 바꾼다고 대답해요.” 그래서 20대에 만난 손님들이 어느새 머리가 흰 60∼70대 노인이 돼 이발소를 찾아오면 도란도란 옛 추억을 나누곤 한다. 그는 지금도 30∼40년 전 손님들이 그의 구수한 입담과 빠르고 뛰어난 이발솜씨를 잊지 못해 자주 찾아온다고 했다. 비록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에 나오는 피가로가 아닌 ‘신길동 이발사’지만 행복하다고 했다. 이발소를 잘 운영해 1남2녀의 자녀를 대학에 보내고 결혼까지 시켰다고 말했다. 손님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이발료도 10년 전 가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박씨가 처음 서울에 올라 왔을 때가 1962년 4월. 당시 이발요금은 어른 120원, 어린이는 60원이었다. 이후 1000원, 1500원, 2000원으로 조금씩 올라 지금은 10년 전 가격인 6000원을 받고 있다. 충남 공주시 계룡면 소학동이란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인근 정안면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가정형편상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진로를 고민하던 중 한 아저씨가 “이발을 배우면 배고프거나 춥지 않게 살아 갈 수 있다”며 이발사가 되라고 조언했다. 그는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곧바로 동네 이발소에 들어가 1년간 일했다. 손재주가 뛰어난 덕에 한달 만에 이발하는 법을 배웠다. 손님들은 주인보다 박씨를 더 찾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감을 얻어 곧바로 서울로 올라 와 지금의 역전이발소에 취업했다. 그의 이발솜씨와 구수한 입담은 금세 소문을 탔다. 이로 인해 동네 경쟁이발소 4개가 줄줄이 문을 닫았다. 박씨가 현재 조카와 함께 운영 중인 이발소는 30년 전에 그가 주인으로부터 인수한 이발소다. “그동안 뒤도 안 돌아보고 바쁘게 살아왔지만 더 늦기 전에 공부하려고 해요. 올해부터는 조카에게 이발소를 맡기고 바쁠 때만 일손을 보태고 있어요. 대입검정고시를 준비 중이에요.” 박씨는 “20∼30년 전 명절이나 휴일에는 하루에 350여명의 머리를 혼자서 깎았다”며 “이 정도 실력이면 외국에선 ‘마이스터’나 ‘장인’ 등의 명칭을 붙여 주지 않았겠느냐”고 웃으며 말했다. 박석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