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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명인열전16]주역점 역술인 서정기

주역연구 50년 ''운명감정 족집게''

1994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팀은 사주만으로 사람의 운명을 어느 정도까지 맞힐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프로그램을 제작 중이었다. 담담 PD는 가장 먼저 주역점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역술인 서정기(76·고명주역철학원장)씨를 찾아가 취지를 설명하고 한 사람의 사주를 봐줄 것을 요청했다. 작괘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불토자다작 청한지인이영욕(不吐者多作 淸閑之人而榮辱) 불가 포원무위(不可飽瑗无爲) 대장지육오불토자 유이무립 약이무위(大壯之六五不吐者 愉而无立 弱而无爲) 복량천박 수산유손(福量淺薄 壽算有損)’(격이 낮은 자로 오랜 세월 고요히 일없는 사람 노릇을 한다. 배부른 일과 등 더운 일을 구하지 않으며 나약해서 독립할 수가 없으며 약해서 무엇을 할 수가 없다. 복의 양이 얕고도 엷으나 수명이 짧겠다.)
서 원장은 작괘 결과를 훓어보고 나서 “사주의 주인공은 기식인생을 사는 사람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자기가 독립해서 사는 게 아니라 남에게 의지해서 사는 사람이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자, 담당PD는 무릎을 탁 치며 서울역 거지의 사주라고 감탄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 팀은 그 서울역 거지에게 말쑥한 신사복을 입혀 역술집 30여 곳에서 운명감정을 시도했다. 하나같이 제대로 맞추는 곳이 없었다. 방송이 나간 후 서 원장은 일약 스타 역술인이 되었다.
방송으로 뜨기 전에도 서씨는 주역으로 사람의 운명을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역술인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과연 무엇이 서 원장으로 하여금 족집게 도사가 되게 했을까.
“이 사람이 얘기하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나는 그저 작괘를 해서 하락이수에 담긴 글을 풀어서 얘기해줄 뿐이지요. 인간들이 왈가왈부한 것은 잘 맞을 수가 없어요. 흔히들 적중률 몇 퍼센트라고 얘기하는데 하락이수(河洛理數)로 운명을 보면 거의 100퍼센트 맞아 떨어집니다.”
신점을 치는 무속인이 자신의 몸주에 의지해 사람들의 미래를 알려주듯 서 원장 또한 운명감정 기록서인 ‘하락이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른다. ‘하락이수’는 주역의 상수학(常數學)을 체계화한 책으로, 1000여년 전에 중국 북송 때 유학자인 진희이에 의해 창안돼 소강절이 풀이를 했다. 연, 월, 일, 시의 사주를 기본으로 하도와 낙서수를 얻고 이를 다시 천수(天數)와 지수(地數)로 바꿔 괘를 뽑아 하락이수 원문으로 길흉화복을 판단한다. 모든 과정이 숫자로 공식화돼 있지만 작괘 과정이 그리 만만치만은 않다.
“주역에는, 두 가지의 학리가 상존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의리학(義理學)이라 하여 주역 그대로의 뜻을 중시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상수학이라 하여 괘사(卦辭)와 효사(爻辭) 속에 오묘하게 비장되어 있는 상징적인 논리를 풀이하는 것이 있습니다. 과거에 선비들이 상수학을 하면 주역(성인)에 대한 모독이라고 해서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주역의 본체에서 뭘 얘기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해요. 오늘날과 같은 실용주의 시대엔 주역이 본래 가지고 있는 점복 기능을 살려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락이수는 근근이 명맥을 이어만 올 뿐 큰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이렇게 실용적 내용이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한 이유에 대해 서씨는 “역사적으로 주역 상수학을 멀리한 사회풍조의 불가항력적인 요인과 함께 하락이수 학문 자체가 너무 높고 어려워 대중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한데있다”고 말했다.
하락이수로 운명을 정확히 예측하기 위해선 하락이수 원문을 정확히 해석하는 능력이 필히 따라야 한다. 사주를 보고 작괘하더라도 한자로 돼 있는 하락이수 원문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면 엉뚱한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동안 서씨에게 하락이수를 배운 제자만 해도 수백명은 되지만 세상에 이름을 드러낼 정도의 제자가 없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분야이기 때문이라고 서 원장은 털어놓는다. 서 원장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며 10년 전 최초의 하락이수 해설서(‘해설 하락이수 상, 하’)를 펴내고 하락이수의 대중화에 나섰다.

서정기 원장이 50여년 동안 간직해오면서 공부하고 있는 주역원서 ‘주역절중’.

그는 지난해엔 하락이수로 역대 대통령과 경제계의 거두 등 100인의 운명을 파헤친 책 ‘지방(指方)’을 출간해 운명의 타산지석으로 삼기를 바라고 있다. ‘사람들의 운명의 방향을 가리킨다는 의미에서 책 제목을 ‘지방’으로 했다. 이 책에는 ‘민족중흥의 지도자 박정희가 혁명동지에 의해 시해될 수밖에 없는 이유’,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말기에 외환위기를 맞은 이유’ 등이 운명학(하락이수)적 논리에 의해 상세히 밝혀져 있다.
충남 서산군 태생인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한학을 공부했다. 향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후학들에게 한학을 지도하던 그는 1985년 자식들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도시에서 그가 할 일은 마땅치 않았다. 청년시절부터 주역을 익혀온 그는 중화서점에서 주역원본(‘주역절중’)을 구입해 주역을 연구하다 하락이수를 접하게 됐다. 한학의 원리를 깨친 그에게 스승은 없었다. 기문둔갑, 육임 등의 공부해봤지만 하락이수 만큼 정확하고 오묘한 게 없었다. 1988년 하락이수로 사람들의 운명을 봐주는 주역철학원을 차렸다. 서울 관악구 신림8동 펭귄시장 입구에 위치한 고명주역철학원(02-852-9527)은 15년째 한 자리에서 성업 중이다.
나이가 들어 많은 사람은 상담하지 못하지만 그가 20년 동안 매달려온 역학 공부를 바탕으로 인생과 운명관계를 총정리한 ‘주역과 운명’을 탈고해놓은 상태. 부록으로 ‘토정비결에 숨어 있는 괘상의 비화’를 수록했다.
글·사진 강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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