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獨 끝없는 과거사 청산 "유대인 학살 참회" 60년째 고개숙여 입력 2005-05-09 14:00:00, 수정 2005-05-09 14:00:00 독일은 과거사 반성을 끊임없이 이어가고 있다. 1970년 12월 빌리 브란트 당시 독일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의 빈민촌 유대인 학살추념비 석상 위에서 무릎을 꿇고 나치의 잔학행위를 사죄한 것을 비롯해 10년 후에는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이 나치의 죄악에 대해 독일 국민의 ‘집단책임’을 인정했다. 이후에도 헤어초크, 라우 대통령과 호르스트 쾰러 현 대통령과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에 이르기까지 기회 있을 때마다 정치인들은 과거 부끄러운 역사를 진솔하게 사과, 참회하고 있다. ◇독일 부켄발트 강제노동수용소 정문 위 시계는 미군이 수용소를 해방시킨 1945년 4월11일 오후 3시15분에 고정돼 있다. 수용소를 방문한 독일의 젊은이들이 정문 앞에 모여 수용소 시설을 둘러본 소감을 나누고 있다. 부켄발트=남정호 특파원 독일 중부 튀링겐주에 있는 부켄발트(Buchenwald) 전 강제노동수용소는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자행했던 유대인 집단학살(홀로코스트)을 상기시켜 주는 대표적 역사교육 현장으로 이름이 나 있어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독일이 낳은 대문호 괴테와 쉴러가 활약했던 문화도시 바이마르(Weimar) 북쪽 8km 지점에 있는 부켄발트 강제노동수용소는 1937년 7월에 건립돼 1945년 4월 미군에 의해 나치병사들의 손아귀에서 해방될 때까지 연인원 25만명의 유대인과 집시, 정치범들이 수용돼 그 중 5만6000명이 목숨을 잃었던 ‘인간 도살장’으로 악명이 높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강제노동수용소와 함께 잔인한 홀로코스트의 대표적 현장이었던 부켄발트 수용소 기념관 관장인 폴커하르트 크니게 박사는 “부켄발트 기념관은 특히 자라나는 독일 젊은이들에게 가장 부끄러운 독일의 역사를 보여주며 교훈을 얻고 있는 교육장”이라며 “역사는 감추어서는 안 되며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고 보여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길만이 부끄러운 과거사를 참회하는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최근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 독일의 10대 청소년 중 상당수가 홀로코스트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 교육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주 정부들은 각급 학교와 연계, 역사교육을 강화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부켄발트 강제노동수용소는 해방되던 1945년 초에는 총 11만명의 유대인과 포로들이 86개 막사에 수용돼 있었으며,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6300명의 나치 돌격대(SS) 대원들과 530명의 여자 경비원들이 밤낮으로 포로들을 괴롭혔다. 포로는 대부분 유대인이었지만 집시, 동성애자, 정치범, 일반죄수, 정신장애인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SS대원들은 경비견을 풀어 포로들을 물어뜯게 하거나 몰아붙였으며, 구타와 고문, 집단 총살을 끊임없이 계속했다.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자가 매일 발생, 자고 나면 수용소 안에는 어디서나 시체들을 볼 수 있었다고 지난 4월11일 바이마르에서 거행된 수용소 해방 6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했던 생존자들이 증언했다. 부켄발트 수용소는 현재 시체 소각장, 지하 처형장, 독감방, 철조망과 감시탑, 집단묘지 등 과거 시설들을 일부 복원, 방문객들에게 60년 전에 발생했던 나치의 잔학상을 보여주고 있다.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문을 열고 있으며 입장료는 받지 않고 있다. 입장료를 받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방문객 수를 계산할 수는 없지만 매주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수용소를 찾고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수용소 관리소는 특별히 ‘젊은이들을 위한 대화의 방’을 마련, 학생들에게 역사 토론을 장려하고 있다. 동부 독일의 드레스덴에서 온 학생 세실리아 슈미트(17)양은 “수용소 전시물과 기록영화를 보고 난 후 우리 선조인 나치가 얼마나 잔혹했던가를 알게 됐다”고 털어놓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부켄발트=남정호 특파원 johnnam@segy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