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회화·설치·영상 등 40여점 소개
자연을 통한 성찰 담은 ‘수녀와 수도승’
자연석을 아름다움과 사유 대상 탐구
물·공기·흙·불 4원소 결합 ‘말 조각’ 연작
푸른색 유리 표면 넘어 빛의 풍경 연출
원주시 어린이 1000명과 협업 작품도
해와 달 주제로 시간의 흐름 감성 표현
장막을 걷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 보면, 전시관 4개 벽면에 투영되는 영상 속에서 불꽃을 둘러싼 채 춤을 추는 의식이 펼쳐진다. 12명의 타악기 연주자와 18명의 남녀 무용수들이 강렬한 사운드와 춤사위로 관객을 압도하다가 마침내 신비로운 황홀경에 도달한다. 이들의 의식은 불꽃이 타버리고 해가 뜨면서 막을 내리지만, 바로 또 밀려오는 어둠과 함께 다시 시작된다. 삶과 죽음의 연약한 경계를 탐색하는 스위스 작가 우고 론디노네의 작품 ‘BURN TO SHINE’(번 투 샤인, 빛나기 위해 타오르라·2022)이다.
프랑스계 모로코인 안무가 푸아드 부수프와 협업한 이 퍼포먼스 영상은 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의 전통 의식과 현대무용을 결합한 것으로, 그리스 신화 불사조를 연상시키면서 변화에 대한 욕망을 표출하고 있다.

‘BURN TO SHINE’을 주제로 내건 우고 론디노네의 개인전이 9월18일까지 원주 오크밸리 뮤지엄 산에서 열린다. 작가가 국내에서 선보이는 최대 규모의 전시회다. 뮤지엄 산은 미술관의 갤러리 세 곳은 물론, 백남준관과 야외 스톤가든까지 할애해 조각, 회화, 설치, 영상 등 40여 점의 작품을 소개한다. 전체가 하나의 포괄적인 작업으로, 작가가 지난 30여 년 동안 끊임없이 성찰해 온 삶과 자연의 순환, 인간과 자연의 관계, 그리고 이로써 형성되는 인간 존재와 경험을 토로한다.
삶의 순환에 대한 사유는 작가의 또 다른 작품 ‘너의 나이, 나의 나이, 그리고 태양의 나이’(2013∼현재)와 ‘너의 나이, 나의 나이, 그리고 달의 나이’(2020∼현재)로 이어진다. 미술관 1층과 2층, 동일한 구조의 전시관에 마련된 두 작품은 각각 태양과 달을 상징하며 화음과 불협화음으로 공명한다. 이는 전시가 열리는 지역의 어린이들(3∼12세)이 그린 그림과 함께 완성되는 참여 작품이다. 원주시 어린이 1000명이 그린 2000장의 회화로 구성된 것이다. 동심을 반영해 마치 어릴 때 개구멍을 통과하듯 몸을 허벅지 높이 아래로 낮춰야만 입장할 수 있게 해놓았다. 다소 불편할 수 있으나 막상 숙이고 들어가면 웃음이 번진다.

자연을 통한 정신적 사유를 추구하는 작가의 시도는 ‘수녀와 수도승’ 연작에서 정점에 이른다. 백남준관에 들어서면 4m 높이의 ‘노란색과 빨간색 수도승’이 원형의 천장에서 내려오는 자연광 아래 중세 시대 성인(聖人)의 엄숙함으로 관객을 맞는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보다는 함께 걷거나 한 곳을 바라보고 나란히 앉아 얘기를 나누고픈 심정이 든다.
야외 스톤가든에도 3m가 넘는 6점의 수녀와 수도승이 거닐고 있다. 빨간색과 검은색, 보라색과 파란색, 초록색과 노란색 수녀 3점, 검은색과 초록색, 파란색과 하얀색, 노란색과 주황색 수도승 3점은 관람객들이 ‘인생샷’을 남기는 핫플레이스다. 모두 석회암 모형을 기반으로 주조된 청동 작품들이다.

작가는 “자연석을 아름다움과 사유의 대상으로 감상하고 탐구하려는 시도”라며 “본다는 것이 물리적인 현상인지 혹은 형이상학적인 현상인지 상관치 않고,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어떤 의미인지를 찾으려는 조각”이라고 설명한다. ‘수녀와 수도승’ 연작이 바라보는 이들에게 순수한 색채와 형태, 규모에 완전히 몰입되는 감각적 경험과 더불어 동시대적 숭고함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푸른색 유리로 만들어진 11점의 말 조각 시리즈도 관객을 반긴다. 세계 각지 바다의 명칭을 제목으로 삼는데 우리나라 ‘황해’(yellow sea)도 있다. 작품 중앙에는 하늘과 바다를 구분하는 투명한 수평선이 가로지른다. 물, 공기, 흙, 그리고 불이라는 4원소의 결합체다. 완벽하게 마감된 유리 표면을 넘어 무한한 공간을 향해 나아가는데, 전시장 곳곳에 시시각각 변화하는 푸른빛을 비추며 ‘빛의 풍경’을 창조하는 프리즘이 된다. 여기에 수직적이고 불투명한 관객의 존재는 마치 환영과 같은 말 사이를 누비고 다니면서 극적 대비를 이루게 된다.
전시관의 벽면을 빙 두른 해와 달 회화 시리즈는 시간의 흐름을 그만의 시적인 감성으로 담아내며, 일몰과 월출의 풍경을 보색으로 이루어진 3색 수채화로 포착한다. 2023년 9월10일부터 21일까지 작업이 완성된 날짜가 제목이 된 12개의 작품은 사적인 일기이자 삶의 기록으로 관객과 마주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작가의 광범위하고 관용적인 시각은 회화, 조각, 설치, 영상 퍼포먼스 등 폭넓은 매체를 통해 표현된다. 그의 작업은 파리 퐁피두 센터, 런던 화이트채플 갤러리,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로마 현대미술관, 빈 벨베데레 궁전미술관, 프랑크푸르트 쉬른 쿤스트할레, 제네바 미술역사박물관, 뉴욕 스톰 킹 아트센터 등에서 널리 소개한 바 있다. 2007년에는 제52회 베니스비엔날레 스위스 국가관을 대표했다.
뮤지엄 산(Museum SAN)은 공간(Space), 미술(Art), 자연(Nature)을 뜻한다. 노출 콘크리트 등 미니멀한 건축물의 대가 안도 다다오가 해발 275m 산자락에 전체 면적 2만2000평 규모로 설계했다. 빛과 공간의 예술가 제임스 터렐의 별도 작품관을 완성하며 2013년 5월에 개관했다. 이후 5주년을 기념해 명상관을 열었고, 지난해 8월 두 번째 명상 공간인 ‘빛의 공간’을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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