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 부담 원칙 무시 쌈짓돈 쓰듯 ‘펑펑’… 관리감독 ‘뒷짐’
에어컨·온풍기·TV 등은 지원받지만
생필품·소모품 비용은 예산서 제외
수건·주방세제·모기장·운동기구 등
수천원서 수백만원까지 공금 사용
관사 운영위 구성 의무 아닌 선택
5년간 한 차례도 열지 않은 곳 많아
“집행문제 지적에도 방만 운영 여전”

‘화장지, 냄비, 도마, 주방세제, 체중계, 모종, 이불.’
최근 5년간 경찰청과 광역 단위 지역 경찰청들의 관사 운영비로 구입한 물품 중 일부다. 경찰청은 관사 운영과 관련 관사 운영규칙(이하 운영규칙)을 통해 운영비 ‘사용자 부담 원칙’을 강조했지만, 일부 경찰간부 등은 자비가 아닌 국민 세금으로 물품들을 구매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16일 세계일보가 경찰청과 그 부속기관을 포함해 전국 283개 경찰서를 통해 입수한 ‘최근 5년(2018년~2022년 9월)간 관사 비품 구입비 및 운영비 사용 현황’에 따르면 해당 기간에 지출된 비용은 59억86만4212원이다. 관사 비품 구입비 및 운영비 지출 내역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경찰서 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출 규모는 더욱 클 것으로 보인다.
운영규칙 제11조(관사 운영비 등의 부담) 제1항은 ‘관사의 운영비는 사용자가 부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만, 경찰청이 소유한 관사의 보일러, 에어컨, 통신, 수도, 전기, 가스, 싱크대, 세면기 등 기본시설의 설치·보수비용은 지원이 가능하다. 이에 따라 관사를 사용하는 경찰청 부속기관과 각급 경찰서의 지휘관 및 직원들은 사용 관사 내 침대와 에어컨, 온풍기, 옷장, TV, 책상, 소파 등 기본 가구 등을 지원받는다.
문제는 이 외에 개인이 지출해야 할 주방용품 및 소모품, 이불, 개인 운동기구 등까지도 국민의 세금인 경찰청 예산으로 구입했다는 점이다. 다수의 경찰청 부속기관 및 경찰서는 “생필품과 소모품 비용은 사용자가 부담해야 하고, 자체예산으로 지출하지 않는다”고 답변했지만, 일부 경찰서는 이와 달리 관련 항목을 경찰청 예산으로 구매해왔다. 시민단체는 물론 경찰 내부에서도 혈세를 이용한 경찰청 등의 행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강했다.

◆‘주방세제, 에어프라이어, 도마’ 생필품도 국민세금으로
충북 옥천경찰서는 경찰 서장 관사 운영을 명목으로 화장지와 멀티탭, 모기장 등 각종 생필품을 구입했다. 옥천경찰서는 2018년 자체 예산으로 멀티탭(3만4500원)과 각종 주방용품(2만8000원)은 물론 실내화(1만4000원)까지 구입해 서장 관사에 비치했다. 2020년에도 주방용품(9만1600원)과 세제(6400원)를 구입했고 지난 5월에는 모기장 구입에 5만원을 사용했다.
충북 단양경찰서도 서장 관사 운영비로 2020년 냄비와 에어프라이어, 이동형 욕조 등 구입에 30만6000원의 예산을 사용했다. 충북 진천경찰서는 서장이 사용할 그릇세트 등 구비를 목적으로 2021년 35만2100원의 예산을 지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경기북부경찰청은 지난 6월, 청장 관사에 드라이기와 주방기구, 디너그릇세트, 스탠드다리미판, 주방기구 등을 구입하기 위해 수십만원을 사용했다. 경기 가평경찰서와 고양경찰서·남양주북부경찰서도 접시와 냄비, 세제 등 주방용품 구입에 수십만원의 예산을 지출했다. 전남경찰청장은 개인이 사용할 머그컵(9만원)도 전남청 예산으로 구매했다.
이밖에 제주 서귀포경찰서·서부경찰서와 충남 청양경찰서, 경기남부경찰청, 경기 수원중부경찰서, 인천 서부경찰서, 강원경찰청 및 산하 경찰서 등도 주방용품 및 생필품을 각 기관 예산으로 구매했다.
나철성 강원평화경제연구소장은 “사정기관의 경우 업무추진비나 기관 운영비 등 지출이 타 공공기관에 비해 더욱 투명하게 사용되어야 하는데 구멍이 뚫려 있다”며 “제대로 된 감사와 감시가 되지 않다 보니 이런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찰서 관계자 역시 “생필품과 소모품 등은 원칙적으로 사용자가 부담해야 한다”며 “일부 경찰서에서 아직도 관련 비용을 기관 예산으로 지출하고 있다니 큰 문제다”고 밝혔다.

◆대구경찰청, 간부 운동기구 구입에 수백만원 지출
경찰 간부의 개인 운동기구 구입을 위해 200만원에 가까운 예산을 지출한 경찰서도 있었다. 대구경찰청은 2021년 170만9180원을 들여 하체근력강화기를 구입, 청장 관사에 비치했다. 같은 청 내 한 간부는 올해 자신이 사용하는 관사에 85만원 상당의 하체근력강화기를 대구경찰청 예산으로 구입했다.
충북경찰청 한 간부는 2021년 입식사이클 구매를 위해 99만원의 예산을 사용했다. 경기 여주경찰서도 2018년 ‘건강권 보장 운동기구 구입’ 명목으로 18만6840원을, 전남경찰청 간부 공무원은 2020년 개인 운동기구 구매에 54만원을 지출했다. 이 외에도 경남 함양경찰서는 올해 77만원을 주고 러닝머신을 구입, 서장 관사에 비치했다.
자신이 입주할 관사 청소비용을 경찰서 예산으로 지출한 경찰 간부도 있었다. 강원 삼척경찰서는 ‘서장 관사 청소비’ 명목으로 2020년 84만6000원, 2021년 91만원, 2022년 50만원을 각각 사용했다. 인근 동해경찰서도 관사 청소비로 2020년 28만원, 2022년 62만원 등을 사용했다.
춘천경찰서도 서장 취임 시 관사에 비치할 생필품 등 구입에 많게는 한번에 40만원을 썼으며 2018년부터 올해까지 청소업체 등에 40여만원의 관사 환경정비용역비를 지급했다. 태백경찰서도 최근 5년간 매년 청소용역을 통해 서장 관사를 청소했으며 많게는 1회에 77만원을 지출했다. 이들 경찰서 외에도 경북 울진경찰서, 전남 여수경찰서, 강원 원주경찰서 등도 서장 및 간부 사용 관사 청소비를 자체 예산으로 처리했다. 춘천경찰서 관계자는 "관사 관리를 위해 청소용품을 구입했지만 그동안 관사사용자(서장)가 관사가 위치한 춘천에 거주, 빈관사여서 시설물 관리 차원으로 지출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관사에서 사용할 이불과 수건, 베개도 기관 예산으로 구입한 곳도 다수 있었다. 경기남부경찰청은 2020년 8월과 12월, 청장이 사용할 침구류 구입에 6개월 동안 106만원가량을 지출했다. 경기남부청 지휘를 받는 분당경찰서장도 2020년 12월 유명 침구류 브랜드에서 약 114만원 상당의 이불을 구입했다. 이 외에도 경기 부천원미경찰서·성남수정경찰서·수원남부경찰서·수원중부경찰서·안산상록경찰서·안양동안경찰서·양평경찰서·의왕경찰서 등도 침구류 구입에 많게는 100만원이 넘는 경찰서 예산을 끌어다 썼다.
인천 남동경찰서장은 2018년 수건 등 구매비용으로 34만원을 경찰서 예산으로 사용했으며 전남 장성경찰서도 서장이 사용할 수건 및 여름침구류 구입에 15만원을 지출했다. 전남 진도경찰서, 울산 중부경찰서, 경기 일산서부경찰서 등은 베개와 베개솜, 베개커버 등 구입에 많게는 한번에 40만원이 넘는 공금을 사용했다.
이선영 충북참여연대 사무처장은 “시민의 혈세를 사용하는 만큼 누가 봐도 경찰서 운영 목적에 맞게 지출돼야 하는데 개인을 위한 지출로밖에 보이질 않는다”며 “수차례 관련 예산 집행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음에도 여전히 관행대로 답습하는 등 방만한 운영을 해왔다”고 비판했다.

◆관리위원회 구성은 의무 아닌 선택 사항
같은 종류의 비품을 구입할 때도 최대 7배에 가까운 가격 차이가 발생 ‘예산 남용’도 문제가 됐다. 부산경찰청의 경우 올해 청장 관사에 비치할 진공청소기 구입에 123만원을 지출했지만 같은 기간 교통과장은 17만9000원, 기장경찰서장은 19만원을 지출했다. 가격에 따라 최대 7배 가까이나 차이가 발생했다.
부산경찰청 한 간부경찰은 지난 1월, 유명 브랜드 침대를 구입하는 데 252만8000원을 썼다. 반면 같은 기간 기장경찰서장은 침대 구입비용으로 65만원을 사용했다. 충북경찰청장도 지난 8월 TV구입을 위해 280만원의 예산을 사용한 반면 같은 해 3월 생활안전과장은 67만원을, 112상황실장은 지난해 59만원을 각각 TV 구입비로 썼다.
관사 운영비가 허술하게 관리되고 있지만 이를 감독할 관사운영위원회는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경찰관사 운영규칙에 따르면 관사운영위원회는 관사의 효율적 관리 등 운영사항에 대한 내용을 심의한다. 문제는 관련 위원회 구성이 의무가 아닌 선택이라는 점이다. 이런 탓에 관사운영위원회만 설치, 정작 회의는 최근 5년간 단 한 차례도 개최하지 않은 곳이 다수 있었다. 충북 진천경찰서와 충남 당진경찰서, 경기 수원남부경찰서, 안산상록경찰서, 가평경찰서 등이 그러했다.
또 운영규칙 제12조(재산 및 물품관리 기록부의 비치)에 따라 ‘예산으로 구입한 물품과 기본 장식물을 기록,관리’해야 하지만 생필품과 소모품 등을 구입한 경우 다수가 기록부를 작성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경찰청 관계자는 “정확한 답변을 얻으려면 정보공개청구를 하라”며 구체적인 답을 하지 않았다.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