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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비바람·눈이 만들어 낸 ‘자연의 조화’

입력 : 2022-05-19 20:33:04 수정 : 2022-05-19 20:3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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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타 ‘자연하다’전

사진작가로 이룬 명성 뒤로하고
10여년간 캔버스 들고 곳곳으로

숲속·사막·땅속 등에 캔버스 설치
바람에 할퀴고 햇빛에 그을리고…
자연과 세월이 남긴 신비한 흔적
김아타 작가

인간이 보이지 않는 것이 지닌 힘을 두려워할 때, 세계는 좀 더 나아질지 모른다. 인과응보를 믿는 것, 순리가 존재함을 믿는 것, 자연의 목격을 두려워하는 것 등이 인간의 오만과 탐욕을 제어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세상의 이치가 예술가의 예민한 마음을 짓누른 것일까. 김아타가 10여년 만에 내놓은 신작 ‘자연하다’(On Nature)가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힘을 장구한 시간에 걸쳐 간절하게 좇아 드러냈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엄연히 존재함을 느끼고 자각하려는 의지 또는 경외심은 종교나 무속이란 형태로 이어지며 인간을 통제해 왔다. 이를 연상한 것일까, 시대의 지성 이어령은 세상을 떠나기 전 김아타 작업을 보고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경기 남양주에 위치한 모란미술관은 김아타의 ‘자연하다’ 전시를 최근 시작했다. 김아타는 사진작가로 일찌감치 국제적 명성을 얻고 성공을 거둔 예술가다. 2000년대 초반, 한국인 최초로 애퍼처(Aperture)에서 사진집을 출간했고 뉴욕 국제사진센터(ICP)에서 아시아인 최초 개인전을 열었다. 빌 게이츠가 그의 사진 작품을 1억원에 구입했다는 이야기는 당시 숱하게 뉴스에 오르내린 스토리다. 그렇게 인기를 끌던 그는 2010년쯤 인기가 보증된 사진 작업을 반복하는 대신 생소한 작업을 시작했다. 바로 ‘자연하다’ 프로젝트다.

‘자연하다’(On Nature) 프로젝트 일환으로 강원 인제 원시림에 캔버스가 세워진 모습.
‘자연하다’(On Nature) 프로젝트 일환으로 미국 뉴멕시코 지역에 캔버스가 세워진 모습.
‘자연하다’(On Nature) 프로젝트 일환으로 인도 부다가야 마하보디 대사원에 캔버스가 세워진 모습.

김아타는 지난 10여년간 캔버스를 들고 세계 곳곳으로 향했다. 강원도 숲속으로 들어가 텅 빈 캔버스를 세워 두었다. 러시아 시베리아 벌판에,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일본 히로시마에 아무 밑칠도 하지 않은 민낯의 천을 세웠다.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불교 성지 인도 부다가야로, 영혼이 맑은 인디언이 살았다는 미국 원주민 거주지로도 향했다. 땅속에도 묻고 바다 아래 담그기도 했다. 그렇게 세계 각지 100여곳에 약 500개 캔버스를 설치하고 2년씩 그대로 두었다. 첩보작전 하듯 캔버스를 설치하거나, 베네치아에서 큰 홍수가 나 캔버스가 잠긴 일은 별일도 아니었다. 도난당하거나 분실돼 캔버스를 다시 찾지 못한 경우도 상당했다. 비무장지대(DMZ)나 포탄을 쏘는 강원도 철원 중부전선 피탄지역에도 수년 공을 들여 당국의 출입 허가를 받았건만, 끝내 캔버스 설치 허가를 받지 못해 작업을 시도조차 못한 경우도 있었다. 임성훈 미술평론가는 김아타가 “존재에 대한 감응의 지평이 열리는 곳에 캔버스를 세웠다”고 표현했다.

그 결과가 작품이 돼 관람객 앞에 놓인다. 세상에 둘도 없는 추상화들이다. 캔버스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의 거름망이 됐다. 강원 인제 원시림 속에 2년 놓인 캔버스에는 분홍빛 그러데이션이 나타났다. 매년 핀 봄꽃이 물감도 없이 이런 아름다운 빛으로 캔버스를 물들였을까 추측해 볼 뿐이다. 제주에 놓인 천은 시커먼 점무늬가 그려지고 테두리는 처참하게 닳아 헤졌다. 섬 비바람은 이토록 혹독하게 사람들을 단련시킨 걸까.

인도 부다가야에서 만들어진 ‘자연하다’(2012).

캔버스가 놓인 곳의 지명이나 위도, 경도가 제목이 된 이 작품들은 관람객을 질문으로 이끈다. ‘내가 발 딛고 숨 쉬는 지금 이곳에 캔버스를 놓는다면 천은 어떤 색으로 물들고 어떤 그림을 그릴까.’ 관람객은 바로 지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와 바람, 기운을 감지하며 자연이라는 신의 얼굴을 상상하게 된다.

시인 이산하는 이번 전시와 함께 발간된 책에서 ‘자연하다’ 연작을 두고 “바람이 할퀴고 햇빛이 화상을 입히고 비가 삭히고 눈이 포근히 감싼 흔적. 상처의 피라미드”라고 썼다. 작고 약 한 달 전, 글을 남기기 힘들었던 이어령은 구술이라도 하겠다며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자연하다’는 우주에 늘어놓은 빨래와 같다. 허공에 무지개와 같은 줄을 치고 거기 청결한 빨래를 한 것과 같은 작품이 걸린다. 스스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자기의 생각과 사상을 자연에, 바람에 맡기면, 바람이 스쳐 지나가면서 상상할 수 없는 문양들을 만든다. 찢어지고 주름지고 겹친 그것이 시간이고 바람이고 우주다. 이것이 ‘자연하다’의 철학이다.”

강원 원시림에서 만들어진 ‘자연하다’(2012).

2년을 기다린 끝에 캔버스를 회수하러 가는 길, 땅에 묻거나 깊은 바닷속에 잠든 천을 꺼내는 일, 포탄을 맞아 갈가리 찢긴 천을 수습하는 일을 할 때마다, 그는 어떤 생각이었을까. 미술관에서 만난 그가 말했다.

“언제나 설레고 기다려졌다. 인도 부다가야가 가장 기억난다. 싯다르타가 그곳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면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너무 궁금했다. 실은 부다가야에 캔버스를 설치할 때 현지에서 일주일 정도 지냈는데, 함께한 캐나다인 스태프가 ‘온몸의 피를 갈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환경이 험하고 열악했다. 부다가야가 인도에서도 가장 어려운 지역이다. 싯다르타가 왜 부다가야로 갔는지 예전부터 의문이 있었는데, 그때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러고는 2년 후 캔버스를 찾으러 갔더니, 가장 많이 상해 있었다. 아, 이거구나 싶었다.”

인기가 보증된 작업을 멈추고 세계 각지에 캔버스를 널러 다닌 것은 작가로서 엄청난 모험이다. 그러나 작가이기에 안정된 길에 멈춰서도 안 됐다. 김아타는 그 10여년 시간을 “죽어서도 후회하지 않을 작업에 올인했다”고 표현했다. “예술이 인간의 전유물이 아님을 깨달았다”고도 했다.

강원 홍천 땅속에서 만들어진 ‘자연하다’의 일부(2012). 모란미술관 제공

대한민국 경기도 남양주 모란 묘역 옆, 8600평 대지에 조각상들이 놓인 숲속, 삶과 죽음이 묘하게 교차하면서도, 더없이 평화로운 자연의 품에 안겨 있는 이 미술관 정원에 작가는 또 하나의 캔버스를 세웠다. 2년 후 완성될 이 작품에는 ‘모란하다’라는 작품명을 붙였다.

10월19일까지.


남양주=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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