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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세종시에는 폐지줍는 노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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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3-16 00:00:26 수정 : 2021-03-16 00: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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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생일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 퇴근길에 급하게 동네서점에 들러 동화책을 사고, 포장을 부탁했다. 기다리는 동안 멋쩍게 서가를 서성이다가 ‘가난의 문법’이라는 책에 시선이 가닿았다.

 

2018년 경제부 정책팀으로 인사 발령이 나면서 세종특별자치시 시민이 됐다. 한때 세종시와 시베리아를 합쳐서 ‘세베리아’라고 불렸던 곳에 가족이 이사하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파견 전 들었던 이런저런 달콤한 이야기 중에, ‘세종시에는 폐지 줍는 노인이 없다’는 말이 있었다. ‘흡연하는 고등학생을 보기 어렵다’는 말끝에 따라붙었던 기억이다. 왜 달콤했느냐고 콕 집어서 쓰기 어렵지만, 달콤했다. 그러고 보니 실제 지난 3년 동안 세종시에서 폐지 줍는 노인을 보지 못했다.

박영준 경제부 기자

책은 폐지 줍는 노인, 그중에서도 여성노인을 다룬다. 과거 제대로 된 직장을 갖지 못하고, 뚜렷한 기술도, 경력도 없이 남편과 자식을 위해 살다가 늙고, 병들고, 어찌어찌 가난을 얻은 여성들의 이야기다. 그녀들은 ‘카트’라고 불리는 손수레나 보행기에 의지해 값이 조금이라도 더 나가는 폐지나 재활용품을 줍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안정적으로 폐지를 얻기 위해 상가나 다주택건물의 계단, 앞마당을 청소해주고 그 대가로 폐지를 얻는다는 대목에서는 탄식이 새어 나왔다.

 

책을 읽는 내내 폐지 줍는 노인이 없는 세종시에 대해 생각했다. 널찍하게 들어선 새 아파트, 깔끔히 관리되는 분리수거장에는 ‘아파트 소유 재산이 어쩌고저쩌고’하는 엄중한 글이 쓰여 있다. 폐지 줍는 노인이 거닐 골목도, 주울 폐지도 없다.

 

행정도시 또는 공무원의 도시라고 불리는 세종시는 여러모로 쾌적하다. 다수의 공무원이 ‘세종시 이전기관 특별공급’을 통해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과거 황량한 세베리아로 내쳐졌다는 불만은 여전하지만, 집값은 고공행진 중이다. 직장·주거 근접은 덤이다. 출산율은 전국에서 압도적 1위이고, 국공립 유치원에 다니는 유아 비율(취원율)은 98%에 달한다. 참고로 전국의 국공립 유치원 취원율은 28%, 서울은 21% 수준이다. 도시 한복판에는 주말마다 붐비는 호수공원이 있고, 그 옆에 중앙공원이, 또 그 옆에는 국내에서 가장 크다는 수목원이 들어섰다.

 

세종시에 사는 공무원들이 서울의 주거정책과 교통정책을 구상하고, 또 출산정책, 소득 격차 해소를 위한 경제정책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입맛이 쓰다. 그 경제정책을 정부부처 기자실에 앉아서 쓰는 기자를 생각하니 씁쓸함이 더하다. 기자가 쓰는 극심한 고용 악화와 급격하게 벌어지는 소득분배격차는 말끔하게 프린트된 보도자료에 있지, 폐지 줍는 노인들이 헤매는 골목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재활용품 수집 노인들은 재활용품 수거 체계를 비롯한 자원순환 정책의 미진한 수거 제도와 재활용 산업 사이의 빈틈을 메우고 있다’고 썼다. 결국 정책의 문제다. 외면과 무관심에서 연민과 동정으로, 노인빈곤에 대한 막연한 생각으로 책장을 넘긴 것이 부끄러웠다.

 

정부의 고령인구 대책을 다시 펼쳐봤다. 노후빈곤 문제가 지속할 것이라는 진단은 있지만, 처방은 지지부진하다. 매년, 한 해에도 수차례 내놓는 노인 일자리 사업도 공허하긴 마찬가지다. 정책이 외면하고 무관심했던 지점에 좋은 대안이 있지는 않을까. 어렵겠지만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박영준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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