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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인 청년들도 ‘예술가의 꿈’ 마음껏 꿀 수 있는 사회 돼야” [차 한잔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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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3-15 05:00:00 수정 : 2021-03-14 21:2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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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스피크 정정윤 대표
농인의 문화예술 활동 도우려 시작
“어려움 많지만 함께할 수 있어 행복
편견없게 복지 시스템 잘 구축 시급
농인 예술가·농인 리더 많아졌으면”
정정윤 핸드스피크 대표가 지난 12일 서울 은평구 사무실에서 공연 의상을 들어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다. 남제현 선임기자

“춤을 너무 추고 싶은데 연습실도, 무대에 설 기회도 없어요.” 고등학생 지연과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희화, 혜진은 비영리 공연기획사에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회사는 이들에게 연습실을 주고, 담당자도 붙여줬다. ‘소름 끼치는’ 춤을 기대했지만 당시 이들의 실력은 너무 못 춰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 정정윤 핸드스피크 대표가 기억하는 농인 아티스트 희화, 지연, 혜진과의 10년 전 첫 만남이다. 핸드스피크는 농인의 문화예술 활동 소외와 참여 기회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소셜벤처다.

지난 12일 서울 은평구 핸드스피크 사무실에서 만난 정 대표는 “춤을 배우고 싶어도 청인(비장애인)을 위한 댄스학원뿐이니 춤을 잘 못 추는 게 너무 당연했다”고 회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수어를 하지 못했던 그는 필담으로 나눴던 당시의 대화를 잊을 수 없다. “눈을 정말 반짝반짝 빛내며 춤추고 싶다고 말하는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거절당하고 나에게 온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힘들고 지친다는 이유만으로 이 친구들이 내민 손을 뿌리치지는 말자고 다짐했죠.”

회사와 세 사람의 인연이 다한 뒤에도 정 대표는 그들의 ‘친한 언니’로 남아 댄스팀 활동을 도왔다.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핸드스피크를 설립하기로 했을 땐 주변의 우려도 컸다. 정 대표는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분들이 많았지만 ‘그 어려운 예술판에서 어떻게 성공할 거냐’는 말을 수도 없이 들으며 초라해지기도 했다”며 “(하지만) 성공의 잣대가 달랐기에 확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행복하고 의미가 있었는지, 내일을 위해 도전할 때 두려움은 없는지. 정 대표가 수익 창출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성공의 기준이다.

핸드스피크가 만든 농인 아티스트들의 연극·뮤지컬·랩·노래 등의 콘텐츠는 농인과 청인 모두 공감하고 즐길 수 있다. “가사뿐 아니라 의미 전달도 확실하고 표정이나 제스처가 너무 멋지다.” “소리 없이 봐도 라임(Rhyme·압운)이 시각적으로 느껴진다.” 이들 아티스트가 가수 프라이머리의 노래 ‘물음표’를 수어 랩으로 표현한 유튜브 영상을 본 사람들의 감상 댓글이다. 이 영상의 조회 수는 10만회에 달한다. 정 대표는 “흔히 핸드스피크의 작품에 ‘수어 예술’이나 ‘농인 예술’이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지만 농인 예술가도 그냥 예술가”라며 “별개의 장르로 구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차세대 농인 아티스트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것도 핸드스피크의 역할이다. 2018년 창립 당시 소속 아티스트는 세 사람뿐이었지만 지금은 20여명의 농인 아티스트들이 핸드스피크와 함께 한다. 정 대표는 “농인들과 함께 하는 생산·제조업체는 많지만 문화예술 분야는 전무해 선례가 없다는 점이 가장 어려웠다”면서도 “행복한 일들이 훨씬 많다. 함께 하는 것 자체가 축복이다”고 말했다. 그는 “비장애인보다 몇 배나 더 힘들게 땀 흘리고 노력하는 걸 알기에 공연을 올릴 때마다 펑펑 울 만큼 감동이 크다”고 덧붙였다.

정 대표는 한국에서 농인 청년이 예술가의 꿈을 이루는 건 ‘한계를 부수는 일’이라고 말한다. 수어가 공용어로 지정된 지금도 10년 전과 다를 바 없이 모든 시스템이 청인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정 대표는 “해외의 농인 청년들은 예술가의 꿈을 꾸기가 우리나라처럼 어렵지 않다”며 “우리나라도 농인 청년들이 편견과 어려움 없이 자유롭게 꿈을 꿀 수 있도록 시스템이나 복지가 잘 갖춰진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핸드스피크의 목표는 농인 아티스트, 나아가 농인 리더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농인들이 리더로 자리 잡아야 다음 세대는 더 많은 기회와 편견 없는 사회에서 살 수 있다는 게 정 대표의 생각이다. “농인 기업에서 농인 대표가 나오는 수준이 아니라 청인 (위주의) 기업에서도 농인 대표가 나올 수 있어야 해요. 수어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 농인에 좀 더 친숙한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유지혜 기자 keep@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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