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실전 방불케한 군사의례… 조선왕조 군권의 위엄 드러내다

입력 : 2021-01-26 02:50:00 수정 : 2021-01-25 20:40:27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
정조의 용·호랑이·봉황 장식 갑주
군권의 향배·위엄 수단으로 활용
교룡기·초요기 깃발도 왕권 상징

지방군사까지 소집 수만명 동원
군례 통해 실질적 군사훈련 펼쳐
국왕의 군사 통솔권 안정적 구축
조선시대 갑주의 구성품들. 왼쪽의 것은 갑주를 담던 함이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국립고궁박물관의 특별전 ‘조선 왕실 군사력의 상징, 군사의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갑주(갑옷과 투구)와 깃발이다. 용, 호랑이, 봉황 모양 등의 장식으로 꾸민 갑주 여러 벌을 칼, 창 등의 무기와 함께 전시해 조선판 ‘밀리터리 패션’의 ‘간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전시장의 벽면 하나를 온전히 교룡기, 초요기 등의 군사용 깃발로 채운 것도 눈호강을 더한다.

이런 배치는 관람객의 시각적 즐거움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왕을 정점으로 한 조선의 무력이 가진 위엄과 권위를 전달한다. 군사의례는 중앙집권적 군사 통솔권을 안정적으로 구축, 유지하기 위해 정비됐고 갑옷과 깃발, 무기는 그것을 시각화하는 장치였다. 그렇다고 군례가 실제 전투와는 관계없는 상징성, 정치적 의도의 산물이라고 오해는 말자. 서울은 물론 지방의 군사까지 소집해 수만 명이 참여하는 실질적 군사 훈련으로 기능했다.

◆갑주와 깃발, 군권의 위엄을 드러내다

1795년 오랫동안 공을 들여 건설한 화성을 방문한 정조는 자신의 복장을 통상의 절차에서 보다 한단계 높임으로써 군사적인 의미를 강조했다. 말을 타고 이동할 때는 융복이 아닌 군복을 착용했고, 화성행궁에 들어설 때는 갑주로 갈아입는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군사훈련을 참관할 때는 보좌하는 신하들에게도 갑주를 입도록 했다. 정조는 갑주를 입음으로써 자신이 군사력의 정점임을 표시했다.

박물관은 이번 특별전에서 정조가 군권의 향배, 위엄을 표시한 수단으로 활용한 갑주를 보여주는 데 꽤 공을 들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의 와중에 독일의 라히프치히 그라시민족학박물관, 함부르크 로텐바움박물관이 소장한 갑옷, 투구, 무기 등을 빌려와 충남 온양민속박물관 등 국내의 것과 함께 소개한 것이다.

갑주의 장식은 착용자의 권위를 높이는 장치였다. 용과 호랑이, 봉황 모양의 금속 장식에다 해오라기를 표현한 옥 장식을 올리기도 했다. 또 투구의 옆면에다 봉황 모양의 은칠보 장식을 한 것도 있다. 챙과 정수리의 철제 부분에 은입사 기법으로 연꽃과 넝쿨무늬를 새기기도 했다. 갑옷 안쪽에 갑찰(비늘 모양의 가죽 조각이나 쇳조각)을 달아 방어력을 높인 것은 실질적 기능을 더한 것이다.

깃발도 갑주와 비슷한 상징성과 실제 기능을 가졌다.

상승, 하강하는 용 두 마리를 그린 교룡기는 왕의 군사권을 보여준다. 가로 341.6㎝, 세로 396.2㎝의 대형이라 말을 탄 군사 네 명이 앞뒤로 맞잡아 들었다고 한다. 방위에 따라 색깔을 달리한 북두칠성을 그린 초요기는 군대의 최고지휘관이 수하 장수를 부를 때 사용했던 깃발이다. 군사 훈련을 할 때 진영의 중앙에 군영별 초요기를 세웠다. 역시 방위에 따라 색을 달리한 문기는 진영의 문에 세웠던 깃발이다. 진영의 출입은 반드시 문기가 세워진 곳을 통하도록 했다.

숭의여대 박가영 교수는 “군례는 최고 통수권이 왕에게 있음을 알리는 예제였다”며 “형형색색의 기치와 무기, 의장물, 갑주와 군복을 착용한 군사에 둘러싸인 왕의 모습은 중앙집권적인 왕권을 시각적으로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조선의 군사의례에서 사용된 깃발을 한자리에 모아 그것의 역할과 상징성을 분석했다. 깃발은 군령을 전달하는 수단인 동시에 군권의 상징으로 기능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군례, 군사 훈련 그 자체가 되다

‘군사의례’라는 단어는 격식을 정해두고,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라는 인상을 준다. 군례 중에 그런 것도 없지 않았으나 실제 전투를 가정한 대규모의 군사훈련으로써 활용됐다. 대규모 군사를 동원해 사냥을 벌이는 강무의와 왕이 직접 지휘하는 대열의가 그렇다.

강무의나 대열의가 실질적 성격은 참여 인원수를 보면 또렷히 드러난다. 1413년 태종은 강무의를 실시하며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군사를 뽑아 보내게 했다. 경상도, 충청도에서 각 1000명, 전라도에서 2000명이 선발됐다. 성종대인 1477년의 강무의에는 5도에서 2만5000명의 군사들이 동원됐다. 연산군대에는 3만명이 모여 개성에서 훈련을 벌였다. 대열의의 경우에는 성종이 1475년, 1487년에 각각 2만8000여명, 4만여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훈련을 실시했다.

내용 역시 실제 전투 상황을 가정한 것으로 채워졌다. 강무의는 사냥에 참가할 군사의 동원과 행군 체제, 군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움직이는 신호법, 사냥감을 몰이하고 죽이는 진법의 활용 등이 “군사훈련 그 자체”였다. 영조는 1734년, 1735년 실시한 대열의에서 군영을 아군, 적군으로 나누어 다양한 진법을 구사하게 하고, 공격·방어에 나서도록 했다. 그는 관람만 하는 게 아니라 장수에게 직접 지시해 진용을 변화시키고, 패턴을 조절했다. 특히 가상의 왜군을 설정해 실전과 같은 훈련을 하도록 했다.

이왕무 경기대 교수는 “조선 후기의 대열의는 국왕의 군사 지휘권을 확고히 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는 것도 상징적으로 드러난 것이지만, 무엇보다 도성 주둔 군영의 실질적인 군사력을 향상시키던 합동 훈련이었다”고 강조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리센느 메이 '반가운 손인사'
  • 아일릿 이로하 '매력적인 미소'
  • 아일릿 민주 '귀여운 토끼상'
  • 임수향 '시크한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