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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구의 한승원 “글을 쓰는 한 살아 있고, 살아 있는 한 글 쓸 것”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입력 : 2021-01-15 07:30:00 수정 : 2021-01-15 16: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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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를 꼭 쓰시고,” 지난 7일 오후 전화를 걸어 오랜만에 인사한 뒤 ‘정남진’ 장흥의 ‘해산토굴’로 찾아뵙겠노라고 하자 소설가 한승원은 코로나19 감염을 한사코 걱정했다. “방역을 잘하고, 꼭 혼자만 오도록 하세요, 중간에 교회는 들르지 마시고요.” 시절이 심상치 않으니, 노 작가의 걱정은 충분히 이해가 됐다. 하루가 다르게 코로나19 확진자가 늘어가더니 그날은 마침 신규 확진자가 600명을 넘어섰다. 게다가 머지않아 1000명을 넘어설 것이라는 비극적인 전망도 쏟아졌으니, 그러려니 했다.

 

2시간쯤 뒤, 스마트폰에서 한 작가의 이름이 뜨는 게 아닌가. ‘무슨 일이지.’ “3년 전, 독감에 걸려 5개월간 투병하는 등 고생한 뒤 트라우마가 생겼어요.” 그는 아무래도 대면 인터뷰가 어려울 것 같다며 잦아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딸 한강(소설가)을 비롯해 자식들도 오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이해해 주세요.”

 

잠시, 당황했다. 1개 면을 털어야 하는 큰 기사인 데다가 진실성의 층위나 이야기의 풍성함을 생각하면 대면 인터뷰만한 것이 없어서였다. 6년 전 어느 봄날, 선배 기사에서 읽은 득량만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도 한 자락. “천리향이 향기를 뿜고 빨간 동백이 시야를 희롱하는데, 벚꽃과 산목련이 소복 차림으로 춤을 춘다. 가까운 산에는 연분홍 진달래까지 피어 수를 놓고, 그 숲 어디선가 산비둘기가 내내 운다. 득량만은 해무에 가려 뿌옇다.”

 

지구적 위기를 생각하면 그의 말이 백번 옳았다. 우리는 이메일로 인터뷰를 하되 부족한 건 추후 전화통화로 메우기로 했다. 상황이 가닥잡히자, 노 작가의 걱정을 이해하지 못한 기자의 절박을 자책했다. 그럼에도 그 후 묻고 또 물어야 했다.

 

“‘망구’(望九, 90세를 바라보는 81세의 별칭)임에도 글을 쓴다는 건 깨어 있다는 것일 터입니다.” 비록 노 작가와의 인터뷰가 이메일과 전화로만 이뤄졌지만, 구도자적 글쓰기의 열정만은 선연했다. “글은 깨어 있는 자만 씁니다, 세상은 깨어 있는 자의 것입니다. 깬 자의 글은 새 역사가 되는 것이고, 하늘의 뜻 땅의 질서를 읽어내서 독자에게 발설하는 천기누설 행위입니다.” 다음은 한 작가와의 이메일 인터뷰와 후속 통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요즘 코로나19로 난리인데,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코로나로 인해 토굴에서 격리된 삶을 삽니다. 가끔 방송 출연 요청이나 식사 대접하겠다는 요청, 서울이나 광주 등지에서 찾아오겠다는 후배나 제자 등 모두 거절합니다. 마트에는 아내와 함께 마스크 끼고 택시로 나가 몽땅 사 싣고 오고요. 지난 10월 초에 서울 강동문화재단에서 한 해 전에 예약한 강연이 있었는데, 코로나가 무서워 전남 장흥에서 서울 강동까지 비싼 택시로 다녀왔지요.”

 

그가 택시를 타고 왕복했다는 전남 장흥에서 서울 강동 간 거리를 애플리케이션 ‘티맵’을 통해 계산해 보니 편도 300km가 넘었다. 왕복으로 계산하면 무려 600km가 넘는 거리다.

2018년 3월 한승원 작가가 서울 중구 정동 달개비에서 열린 산문집 '꽃을 꺾어 집으로 돌아오다' 출간 간담회에 참석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최근 ‘제3회 아시아문학페스티벌’ 조직위원장을 맡으셨는데.

 

“지난해 말 지병인 부정맥과 어지럼증이 생겨 사의를 표했는데,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측에서 그냥 자리만 지켜 달라고 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치렀습니다. 부위원장을 중심으로 실무위원들이 열심히 한 결과 많은 난관을 넘겼지요. 대면으로 치렀으면 성황이었을 터인데, 아쉬웠어요.”

 

―문학적 삶을 되돌아보면, 장흥고 문예반 시절에 김용술 교사를 만나고 송기숙과 교내 잡지 ‘억불’을 창간해 수필을 실은 게 계기가 돼 문학수업을 시작하셨는데요.

 

“문예담당 교사인 김용술 선생은 ‘문학병’(공부하다가 시나 소설 등에 빠져 버리는, 병 아닌 병)이 들었던 저에게 훌륭한 소설가가 될 거라고 예언했고, 그것은 저의 운명을 바꾸어 놨습니다. 1년 선배인 송기숙은 평생 경쟁관계의 도반이었고요.”

 

―1961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김동리 선생에게 문학을 배웠는데, 그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민족의 지도자였던 김범부의 동생 김동리 선생은 식민지 시대의 청년이지만, 친일을 하지 않았고, 저를 소설가로 만들어주셨지요. 순수문학 정신과 그것을 업으로 삼아 사는 자부심, 한국적인 혹은 민족적인 긍지를 심어주셨어요. 저는 선생을 많이 괴롭힌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고, 저의 작가적인 의지를 신뢰해주셨습니다.”(나중에 ‘김동리 선생을 괴롭혔다’는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자꾸 소설을 써서 봐달라고 하니까”라고 답했다.)

 

한승원은 1966년 단편 ‘가증스런 바다’로 신아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해 문단에 데뷔했고, 1968년 단편 ‘목선’이 대한일보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특히 1972년 동인회 ‘소설문학’을 조직하는 등 1979년까지 광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등단 초기 광주에서 교사로 생활하며 주로 작품을 썼는데, 이 시기 작품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요.

 

“주로 습작과 등단 초기, 교직을 부업으로 활동했는데요. 초기 작품들은 유년기와 소년기의 체험을 형상화시킨 것, 이념 다툼이 치열한 해방공간의 역사적인 비극으로 폭력에 시달리는, 거기에서 끈질기게 살아 배기려는 군상을 소년의 시각으로(신화적으로 토속적으로) 그렸습니다.”

 

―1980년 교직을 버리고 상경해 전업 소설가로 활동합니다. 1997년 귀향 전까지 이어진 서울생활은 문학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광주에서 든든한 밥줄인 중학교 교직을 과감히 던져버리고 가난한 전업 작가의 길을 간 것은 허영 없고 검소하고 착한 아내의 뒷바라지 덕분이었습니다. 광주를 떠나 서울살이를 하며 쓴 소설들은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이 좀 더 치열해졌어요. 더구나 5·18광주민중항쟁으로 인해 민주와 자유와 평화를 갈구하는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서울살이 끝판에 생각에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건강 악화 때문이기도 했지만, 불교 사상과 노장 사상에 젖어들었고, 문화인류학적인 신화적인 공부를 한 결과 그동안 가지고 있던 리얼리즘과 휴머니즘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됐어요. ‘우주주의’로 세상을 보게 되었지요. 사람 위주의 문명에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상생하는 삶(문명)을 추구하게 됐습니다.”

 

―1997년 고향인 장흥으로 귀향해 ‘해산토굴’에서 창작에만 몰두하고 있는데, 벌써 24년 됐습니다.

 

“타의에 의해 갇혀 산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삶을 동경하던 나머지, 저의 모해(母海)인 바닷가로 귀향해 자의에 의해 가두고 살면서, 건강 관리하며, 동서양의 고전을 새로이 읽고, 역사인물 소설들을 쓰기로 작정했어요. 사서육경을 읽고 역사 속의 인물들, 초의 선사, 정약전, 추사 김정희, 다산, 원효, 석가모니의 삶을 형상화하기 시작했지요. 그들과의 만남, 동서양 고전과의 만남은 저의 구도자적인 삶을 풍요롭게 해주었습니다.”

 

한때 일부 평론가들이 선생의 작품에서 ‘한’의 정서를 주목하기도 했는데요, 제대로 본 것인가요.

 

“한(恨)은 정한(情恨)이라는 정서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치유하려는 흥(興)과 해학(諧謔), 의지와 투쟁적인 몸부림을 내포하고 있어요. 그것을 간통하고 있는 것은 생명력이죠.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이 아리랑이나 판소리입니다. 아리랑 고개 너머로 가려는 의지가 우리 민족 내부에 있지요. 그런데 대부분의 평자들은 정한의 정서만을 말합니다. 저의 작품 세계에 들어 있는 것은 생명력입니다. 게으른 평자들은 아직도 저의 세계를 토속적 샤머니즘과 패배주의적인 정한이라고 말하죠. 그것은 그들이 만들어준 가면일 뿐입니다. 영화화되기도 하고 많이 팔려줘 저의 삶을 많이 도와준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소설로 형상화한 화엄경이지요. 화엄경은 이 세상을 꽃으로 장식하기(구원)이고요. 저의 세계는, 모든 고전 작품 세계가 그렇듯, 인간 구원입니다.”

 

―많은 작품을 썼는데, 스스로 가장 애정하거나 대표작을 꼽는다면.

 

“사람들은 한승원 하면 장편 ‘아제아제바라아제’를 떠올리는 모양인 것 같은데, 작품은 소설로 쓴 화엄경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아제아제바라아제’부터 장편 ‘초의’ ‘다산’, ‘추사’, ‘원효’ 등이 있고 초기에 썼던 ‘폐촌’이나 단편 등도 있는데, 스스로 무엇이 대표작이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묻지 않을 수 없는데요, 언젠가 딸 한강의 문학과 비교한 적이 있으신데요(그는 자신의 작품은 “더 리얼리즘 쪽에 뿌리를 두고 있고, 불교적이고 신화적이며 전설적인 원형의 세계에 맞닿아 있다”고 한 반면, 한강의 그것은 “환상적인 쪽에 가깝고, 세계 작가적 감성을 얻고 있다”고 대비한 적이 있다).

 

“제 세대가 활동해온 1960~1980년대는 휴머니즘과 리얼리즘과 고발적인 저항의 문학이 대세였어요. 1990년대 들어 점차 그것에 대한 반성이 이뤄졌고 인간 내면의 삶을 밀도 있게 형상화하는 쪽으로 나아갔습니다. 한 리얼리즘 평자가 제 작품에 도입된 신화적이고 환상적인 것에 대해 ‘리얼리즘 작가가 신화를 기웃거리는 것은 리얼리즘 소설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충고를 했는데요, 후진적인 생각이라고 봅니다. 딸 한강의 작품을 이야기하기는 조심스럽습니다. 낡은 세대인 저의 느낌대로 말한다면, 그의 작품은 제가 상상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신화적이고 환상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측면이 있는데, 고발 형식이 아니고, 자유와 민주와 평화에 대한 희망을 섬세하게 정서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는 세계적인 작가로 부상한 딸 한강을 비롯해 자식들에게 특별히 문학을 가르치거나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흔히 아들 한규호(동화작가로 활동 중)와 딸 한강의 습작시절 ‘아버지가 그들의 작품을 많이 지도해 주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지만, 그들은 한 번도 저에게 작품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버지 몰래 습작을 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신 “아내는 가난한 소설가인 나를 존경했기에, 공부 잘 하는 아들딸을 졸업한 후 돈 잘 벌게 된다는 법대나 의학대학이나 공대 쪽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고, 자기들이 희망하는 문학의 길로 나아가도록 했을 터”라고 오히려 아내에게 공을 돌렸다.

 

―글을 쓸 때 습관이랄까, 징크스랄까, 리추얼 같은 게 있을 텐데, 조금 들려주시죠.

 

“저는 작품의 향기를 생명처럼 중시합니다. 작품을 쓸 때, 인물 구성 주제 따위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을지라도 그 작품에서 풍기는 향기가 마련되지 않으면 집필을 못합니다. 향기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꽃향기, 친숙한 몸냄새 같은 것이죠. 모든 작가들의 시나 소설을 깊이 읽어보면, 향기가 있는 게 있고, 없는 게 있어요. 전설의 명화 ‘시몬과 페롤’, 존 스타인백의 소설 ‘분노의 포도’의 말미에 진한 유향이 풍깁니다. 로맹가리의 소설 ‘유럽의 교육’, ‘하늘의 뿌리’, ‘자기 앞의 생’ 등의 갈피갈피에 그러한 향기가 있지요.”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평가되길 희망하는지요. 언젠가 ‘예술가는 식물성 아나키스트가 돼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는데, 당돌한 질문이지만, 지금 어디쯤 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을 쓰는 한 살아 있고, 살아 있는 한 글을 쓸 것이다.’ 이것은 제가 늘 두고 쓰는 말입니다. ‘중생들이 앓고 있는데 보살(선지자)이 어찌 앓지 않을 수 있는가’ 라고 유마는 말했어요. ‘왜 푸른 산에서 사느냐고 묻지만, 나는 그냥 웃지만 마음은 한가합니다’라고 노래한 이태백은 호수에서 달구경하며 선유를 했는데, 물속에 들어있는 달을 건지려다 익사했다는 설화가 있고요. 달이란 우리 삶의 향기로운 구경입니다. 시인 소설가는 구도자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예요. 저도 달을 건지려다가 익사할 것입니다.”

 

―지금 준비 중인 작품은 있나요.

 

“장흥 안양 바닷가 토굴살이를 하며 산 삶은 자연친화적인 삶입니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정글처럼 약자들을 잡아먹고, 도회적으로 건조 살벌해졌고, 보이지 않은 폭력이 난무합니다. 인간은 녹색결핍증으로 날로 잔인해지고 있지요. 지금 제가 이삭줍기를 통해 그리려는 것은 인간의 녹색 결핍증으로 인한 병 치유하기입니다. 시인 소설가인 저는 하루라도 책 읽거나 글을 쓰지 않으면 지구가 멈추어버린 듯싶습니다. 지금은 짧은 호흡으로, 지나온 삶 속에서 값진 것들을 ‘이삭줍기’하고 있습니다. 시일 수도, 수필일 수도, 소설일 수도, 명상록일 수도 있는 짧은 글들이죠.”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장자처럼 저를 늙은 나비라고 생각합니다. 아침 다섯시 반쯤 기상해 토굴로 가서 한 시간쯤 작업하고, 새빨간 아침노을(우주쇼)을 즐기고, 들판 농로를 따라 바닷가로 운동을 나갑니다. 모래밭에서 체조를 하고 떠오르는 해의 기를 가슴에 받고 돌아오죠. 아내는 아침에 어죽을 끓여주고, 낮과 저녁에는 민어회에 돼지고기 한 점을 곁들여 주는데, 포도주를 약간 곁들입니다.”

 

망구의 작가에게 노고가 분명할 많은 질문을 하는 게 내내 미안했다. 질문이 한바닥 담긴 이메일의 모두에 ‘기자로서 최대한 많은 답을 들으려고 외람되게 너무 많은 질문을 한 것인지 모르겠다, 부담되는 질문은 거르셔도 된다’고 적었는데, 작가는 여기에조차 굵은 글씨로 답을 보내왔다. “고통이라는 어둠을 비틀어 짜면 빛이 방울방울 떨어지는데, 그것은 새가 되어 창공으로 날아갑니다. 글을 쓰고 사는 삶, 구도적인 삶이 그렇습니다.” 고개가 절로 숙여졌고, 그건 추위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2020.12.19)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 한승원 작가 제공

 

소설가 한승원은… ●1939년 전남 장흥 출생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목선’이 당선돼 등단 ●작품으로는 장편 ‘다산’, ‘아제아제바라아제’, ‘아버지를 위하여’, ‘초의’, ‘흑산도 하늘 길’, ‘원효’ 등과 ‘한승원 중단편전집’(전7권), 시집으로 ‘열애일기’, ‘사랑은 늘 혼자 깨어 있게 하고’, ‘노을 아래서 파도를 줍다’, 산문집으로 ‘차 한 잔의 깨달음’ 등 다수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대한민국문학상, 미국 기리야마 환태평양 도서상, 김동리문학상 등 수상

 

*이 글은 이미 2020년 12월19일자에 실린 기사인데, 당시 지면 사정 등으로 인해 미쳐 다 실리지 못한 인터뷰 내용 등을 추가해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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