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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 만에 지운 ‘낙인’… ‘이춘재 8차 사건’ 윤성여씨 미소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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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12-17 23:00:00 수정 : 2020-12-17 23:4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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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서 무죄 선고
범인으로 지목돼 20년간 억울한 옥살이
이춘재 자백 이후 법원에 재심 청구
경찰 가혹행위·국과수 감정서 조작 등 드러나
재판부 “사과의 말씀 드려”… 경찰도 공식 사과
윤씨 “미워한다 해도 달라지지 않아“… 용서의 뜻 내비쳐
17일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선고공판에서 재심 청구인 윤성여 씨가 무죄를 선고받고 법정에서 나와 활짝 웃어보이고 있다. 뉴시스

“앞으로 저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아야 합니다. 공정한 재판이 이뤄지길 바랍니다.”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성여(53)씨는 17일 재심 재판부의 무죄 선고 직후 법원 앞에서 짧게 소감을 밝혔다. 영하 14도를 밑도는 칼바람 앞에서 흰색 마스크 밖으로 멋쩍은 듯 미소가 새어 나왔다. 맑은 눈가에는 촉촉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 “앞으로 같은 일 반복되지 않아야…감사하다”

 

곳곳에선 박수가 터져 나왔다. 후원자와 시민들은 “윤성여 파이팅”을 외쳤고, 윤씨는 “감사하다”고 화답했다. 이어 후원자들이 준비한 플래카드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플래카드에는 ‘미안하고 축하한다’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윤씨는 향후 계획을 묻자 “차차 생각해 보겠다”며 말을 아꼈다. 

 

이날 오후 경기 수원시 수원지법에서 열린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의 선고공판장 밖에선 무죄 선고를 예상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앞선 결심 공판에서 검찰이 “피고인이 진범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히 확인됐다”며 무죄를 구형한 때문이다.

 

17일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선고공판에서 재심 청구인 윤성여 씨가 무죄를 선고받고 법정에서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윤씨도 무죄 선고를 확신한 듯 진청색 셔츠에 검은색 코트의 정장 차림으로 수원법원종합청사 501호 법정에 당당하게 들어섰다. 선고공판은 재판부가 30분간 판결문을 낭독하고 주문을 읽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재판부는 “과거 수사기관의 부실 행위로 잘못된 판결이 나왔다”며 “오랜 기간 옥고를 거치며 정신적·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받은 피고인에게 사법부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또 “이 선고가 피고인의 명예회복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 재판부 “사과의 말씀 드려”…대법원 선고 30년 만에 재심 ‘무죄’

 

재판부는 “피고인의 자백 진술은 불법체포·감금 상태에서 가혹 행위로 얻어진 것이므로 증거능력이 없다”면서 “반면 이춘재의 진술(자백)은 그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고 합리적이며, 객관적인 증거와 부합해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1990년 대법원에서 윤씨가 무기징역을 확정 선고받은 뒤 30년 만이자, 사건 발생 32년 만이다.

 

17일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선고공판에서 재심 청구인 윤성여 씨가 무죄를 선고받고 검사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피고인은 무죄”라는 주문이 낭독되자, 윤씨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변호인단, 후원자들과 얼싸안고 기뻐했다. 지난해 경찰의 재수사부터 재심 청구를 도와준 박준영 변호사, 법무법인 다산의 김칠준·이주희 변호사 등과 손뼉을 치며 기쁨도 나눴다. 

 

경찰도 이날 윤씨에게 공식 사과했다. 경찰청은 입장문을 통해 “재심 청구인, 피해자, 가족 등 관련된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며 “뒤늦게나마 재수사를 통해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을 검거하고 청구인의 결백을 입증하였으나 무고한 청년에게 살인범이라는 낙인을 찍어 20년간 옥살이를 겪게 해 큰 상처를 드린 점을 깊이 반성한다”고 밝혔다.

 

이춘재 8차 사건은 1988년 9월16일 경기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에서 중학생 박모양이 성폭행 뒤 살해당한 사건이다. 당시 화성 연쇄 살인사건이 이어졌지만, 경찰은 이 사건을 ‘모방범죄’로 규정하고 이듬해 윤씨를 범인으로 검거했다. 윤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억울하다”며 상소했지만 2심과 3심 재판부는 이를 기각했다.

 

20년을 복역하고 2009년 가석방된 윤씨는 이춘재의 범행 자백 이후인 지난해 11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재심 과정에선 당시 경찰의 불법체포와 감금, 폭행·가혹 행위를 비롯해 유죄 증거로 쓰인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서가 조작된 사실이 드러났다.

 

17일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선고공판에서 재심 청구인 윤성여 씨가 무죄를 선고받고 법원 청사를 나와 지인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 변호인 “윤씨가 살아 나왔기에 가능한 일”…국가 상대 손해배상 청구

 

윤씨 측 박준영 변호사는 “이춘재의 자백이 재심의 근거가 된 건 분명하지만, 윤씨가 (교도소에서) 살아 나왔기에 이 모든 게 가능했다”고 말했다. 윤씨가 어둡고 낮은 곳에서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의지를 꺾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설명이다. 앞서 윤씨도 “미워한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며 이번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을 모두 용서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한편 형사 피의자 또는 형사 피고인으로 구금됐던 사람이 불기소 처분을 받거나 무죄판결을 받았을 때 국가에 청구하는 형사보상금은 무죄 선고가 나온 해의 최저 임금 5배 안에서 가능하다. 19년6개월간 복역한 윤씨는 대략 17억6000만원 정도의 형사보상금을 받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와 별도로 국가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도 청구할 수 있다. 윤씨 측 변호인단은 향후 이번 재심 판결을 토대로 수사기관의 불법행위, 오판 등에 대한 국가 손해배상을 진행할 예정이다.

 

수원=오상도 기자 sdo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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