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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 무찌른 서산대사가 일본 승려와 나란히 선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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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11-28 22:00:00 수정 : 2020-11-28 10:5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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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작성한 유리건판과 문화재 관련 공문서 가치 주목
6·25 등으로 사라지고 없는 문화재의 모습 증언 등의 의미 가져
평북 영변 보현사 서산대사 진영.

임진왜란 당시 전국 사찰에 격문을 돌려 승병을 모으고, 평양과 한양 수복에 큰 공을 세운 서산대사는 전쟁이 끝나고 긴 세월이 흐른 뒤에도 깊은 존경을 받았다. 1794년 건립된 평안북도 영변 보현사 ‘수충사’(酬忠祠)는 이런 마음을 잘 보여주는 증거다. 조선 정부는 수충사에 토지에 더해 현판까지 내려 서산대사를 기렸다.  

 

1909년 촬영된 유리건판 사진은 수충사에는 서산대사와 함께 승병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사명대사, 뇌묵대사의 진영이 봉안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일제가 작성한 ‘보현사재산대장’은 이들과 함께 일본 임제종의 승려 무상대사 진영이 나란히 있었던 것을 전한다. 왜적에 맞서 싸운 승병장과 일본 승려가 나란히 한 생뚱맞은 조합이 이뤄진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유리건판과 보현사재산대장은 “식민지 상황에서 불교 문화재에 대한 인식과 일본 불교가 유입된 상황의 한 측면을 전해주는” 자료임에는 분명하다. 

 

수충사 진영은 일제가 식민 지배를 위한 기초자료로 생산한 유리건판과 문화재 관련 각종 공문서의 현재적 의미를 잘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조선총독부가 우리나라의 고고, 미술, 건축, 역사, 민속 등과 관련된 유적과 유물, 현장을 담은 유리건판 3만8170장과 매장문화재 발견·평가서, 조사보고서, 사찰재산목록 등의 공문서를 소장하고 있다. 식민통치를 목적으로 한 것이고, 일제의 왜곡된 시선이 반영되었다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지만 이제는 수많은 문화재 파괴를 초래한 6·25전쟁 이전 문화재의 내력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우리가 접근하기 어려운 북한 지역 문화재의 원형을 증언하는 자료다. 박물관이 미술사연구회와 27일 공동 개최한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을 통해 본 한국미술사’ 학술대회는 이런 가치에 주목했다. 

함경남도 석왕사 응진전 내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문화재의 모습을 전하는 데서 유리건판, 공문서의 가치는 유독 두드러진다.

 

함경남도 안변의 석왕사는 태조 이성계가 퇴위 후 머물기도 했던 왕실 관련 사찰이다. 이 곳 응진전에는 조선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여래좌상, 보살입상, 오백나한상이 봉안돼 있었으나 6·25 때 모두 불타버려 이제는 유리건판으로만 모습을 볼 수 있다. ‘석왕사재산목록’에는 여래좌상이 목제도금이고 높이는 4척4촌(약 133㎝)이며, 오백나한상은 526구의 독성존자로서 석제도금이고 1척4촌(약 42㎝)의 크기라고 기록되어 있다. 

 

황해도 신천군의 패엽사는 구월산의 큰 사찰로 이름이 높았으나 6·25 때 화재로 대부분 소실됐다. 이 절의 한산보전 내부 역시 유리건판과 일제 공문서로만 파악된다. 유리건판을 보면 보면 한산보전은  보살병좌상, 보살입상, 보살좌상이라는 특이한 조합을 하고 있다. ‘패엽사본말재산대장’은 이 불상들을 문수금상, 보현금상, 관음금상, 용시금상으로 적어 두었다. 

평안북도 공작명왕상과 다문천왕상.

유리건판, 공문서를 통해 남한에서는 보기 힘든 차별화된 형태의 문화재도 접할 수 있다.

 

평안북도 용천군에 있는 높이 3.5m의 공작명왕상과 그 왼쪽에 보탑을 들고 있는 다문천상이 대표적인 사례다. 공작새를 타고 있는 공작명왕 도상은 공예품의 무늬로 남한에 전하는 것이 없지는 않으나 이 상은 “독립된 대형 조각으로서 기념비적 성격”을 가진다. ‘평안북도 고적대장’은 백마산 국유림에도 이것과 비슷한 크기, 형태인 4구의 석상이 있다고 전한다.

개성 지공화상좌상.

개성시 용흥동 화장사의 ‘지공화상좌상’은 우리나라에 흔치 않은 승려 초상조각으로서 의미가 있다. 지공화상은 인도 왕자 출신으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와 1326 3월∼1328년 9월 머물렀다. 유리건판과 공문서를 보면 이 조각은 지공의 외형적 특징으로 간주되는 수염을 기른 이국적인 모습을 하고 있고, 높이는 3척5촌(약 106㎝) 정도의 크기다. “이 유리건판의 조각상은 지공을 형상화한 초기작으로 조선 후기 지공 도상의 연원을 알려줄” 뿐만 아니라 해인사 희랑조사상, 부석사 의상대사상 정도밖에 전하지 않는 고승의 초상조각이라는 점에서 사진이지만 자료적 가치가 크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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