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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의문학의숨결을찾아] 봉선사와 광릉, 춘원과 운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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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9-18 22:01:29 수정 : 2020-09-18 22: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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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수와 이광수는 사뭇 다른 삶
세조를 위해 심은 느티나무 우람

하늘 흐리더니 먹구름이 짙어오는 것이 아무래도 비가 뿌릴 것 같다. 오늘 행선지는 지붕 없는 곳이니까 비가 오면 꽤나 애먹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우산은 챙기기 싫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맞고 눈이 내리면 눈 맞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춘원학회 신용철 선생께서 광동학교 나오셨다고, 독일 가서 철학까지 공부하시고도 지금은 봉선사며, 이광수며, 당신 고향에 흩어진 사연들에 깊이 심취하시는 것이, 나도 이 절이 벌써 서너 번째는 된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강북강변도로 타고 가다 구리 어디선가에서 구리∼포천 간 고속도로를 타고 얼마간 달려 빠진다. 풍경에 예전에 와본 것 같지 않게 포장도 잘된 데다 건물도 여기저기 많이들 들어섰다.

저게 아마 왕숙천이겠지? 하고 혼자 생각한다. 왕이 머물렀다는 유래를 가진 이 내는 옛날 이태조가 이 근방에서 여드레를 머무셨다 해서 이름이 붙었다고 하고 실제로 근방에 팔야리라는 지명까지 있다. 한편으로는 ‘세조대왕’의 광릉이 여기 있다 해서 왕이 잠드신 곳이라는 또 다른 유래설도 있는 천이다.

나는 이 왕숙천이라는 내의 이름을 신용철 선생께 여러 번 들었다. 이분은 이광수뿐 아니라 그보다도 세조 광릉의 능침을 지키는 절 봉선사의 운허 대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운허 이학수는 정주 태생 이광수의 8촌 형제요, 나이가 같지만 이광수와는 사뭇 다른 삶을 추구한 진정한 철인이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해 왔다. 이광수 쪽에서 운허를 보면 운허가 크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운허 쪽에서 춘원을 보면 그는 작가로는 문명을 날려 오늘에 이르렀으되 그렇게 또 작은 인간이 아닐 수 없다고.

그릇이 작은 것 앞에서는 크고 큰 것 앞에서는 작다고, 재작년 열반에 드신 오현 스님께서 자주 말씀하셨는데, 이광수와 이학수가 바로 그런 비유에도 통한다면 통할 테다.

자동차가 봉선사 주차장 앞에 서자 마침 바야흐로 가랑비가 오신다. 이렇게 아름다운 연못이 있었나? 마지막 와 본 게 언제였나 더듬어 생각해 보며 산문을 오르는데 오른쪽에 춘원 추모비가 오늘도 섰다. 그이만큼 삶의 오욕을 깊이 맛본 사람이 또 있을까. 차라리 상해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는 ‘무정’의 기념비적 작가로 오늘날까지 추앙을 받고 있으리라.

정희왕후가 먼저 돌아간 세조를 위해 심었다는 느티나무는 오늘까지 우람하게 살아 역사의 흥망과 삶의 빛과 어둠을 모두 지켜본다. 다른 절과 달리 이 절의 대웅전은 한글로 그냥 ‘큰 법당’이라고 썼다. 이 얼마나 개벽한 일이 아닐 수 있으랴.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은 왕이 되려는 야심으로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그 복위를 도모하던 신하들까지 무참히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기껏’ 13년 만을 왕위에 머물렀으니 부질없다는 한탄이 아니 나올 수 없다.

권불십년이라는데 13년이라면 족하다 할 만도 하다는 것일까? 나 같으면 그러지 않을 것도 다른 사람 같으면 능히 그렇다 할 것이 세상에는 많다.

일제 말기의 이광수가 ‘소개’를 핑계 삼아 이 근처 사릉리로 옮겨온 것은 삼종제 이학수에게 자신을 의탁함이요 해방이 되자 그는 이곳 봉선사에서 수필집 ‘돌베개’와 회고록적 성격의 ‘나의 고백’을 썼다.

가랑비 속에서 연못의 흰 꽃을 잠시 바라보다 발길을 돌려 세조대왕 잠들어 있는 광릉으로 향한다. 수목원을 왼쪽에 두고 잠깐 달리면 바로 광릉, 세조와 그의 왕후가 나란히 잠들어 계신다.

그윽한 오솔길을 걸어 왕릉이 보이는 앞에까지 가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조선 왕릉의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예전 같으면 능 위까지도 옆으로 걸어 올라갈 수 있었건만 지금은 목책이 둘러쳐져 먼발치서밖에 바라볼 수가 없다. 평생을 독립운동을 하고 불경의 국역에 힘쓰셨던 운허의 존재로 인해 이광수는 ‘단종애사’와 ‘세조대왕’을 쓸 수 있었던 것이리라. 광릉을 뒤로하고 오솔길을 빠져나오는데 비는 바야흐로 폭우로 변했다. 속인은 이런 빗속에서는 뛰는 수밖에 없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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