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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프리즘] 수곡동 사람들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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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9-09 23:47:35 수정 : 2020-09-09 23:4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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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짓는 대가로 공원 추진
수곡동에선 5년째 반대 투쟁 옆
동네 잠두봉 나무 잘린 터엔
길쭉하게 솟은 아파트 들어서

이상한 동네에 다녀왔다. “한솔초 요리실로 오세요.” 민간공원 특례사업에 맞서기 위한 소송을 준비하기 위해 주민들을 만나려고 청주로 내려가기 전날 밤 온 문자에서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다. 도착하자 몇 어르신들이 어제도 보았던 사람처럼 초등학교 입구에서부터 휘휘 주차를 안내한다. 요리실은 좀 아니었는지 예정된 회의는 교장실로 변경되어 있었다. 단출한 교장실 한쪽 벽은 교사들이 그린 마을 지도와 아이들이 그린 산새 그림들이 붙어 있다. 각 단지의 입주자 대표님들, 공대위 대표님, 전 대표님, 교장 선생님, 교무부장님, 전 교무부장님, 학부모, 어린이가 익숙한 듯한 테이블에 빙 둘러앉았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 사이에서 단 한 번에 신뢰를 쌓기 위해 똑똑한 말만 해야지 다짐했던 무게와 긴장은 빨대를 꽂아서 건넨 팩 사과 주스를 홀짝거리며 슬슬 풀려간다. 수곡동 사람들은 각자 소개를 하기까지 누가 어떤 직함을 가졌는지 짐작되지 않는 그냥 수곡동 사람들이다. 5년간 투쟁해왔다는 그들에게 독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색연필로 그려놓은 지도는 촘촘하고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한 기억과 설명도 상세하다. 위계 없는 분위기 속에 너나없이 차근차근 말을 보탰다.

지현영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

도시공원 일몰을 핑계 삼아 급하게 추진되고 있는 민간공원 특례사업은 본래 100% 공원이 조성되어야 할 토지의 30%에 민간 사업자가 아파트를 짓게 해주는 대신 나머지 70%의 땅에 공원을 사비로 조성해야 하는 꽤 합리적으로 보이는 사업이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감당하기 위해 터널과 도로로 산을 뚫고, 학교를 무리하게 확장하려고 숲을 파괴한다. 기존의 주민들은 새로 만들어진 터널과 도로 때문에 오히려 공원으로부터 단절되고 대규모 아파트에 가로막힌다.

 

수곡동은 작은 평수의 아파트들과 영구임대아파트가 많다. 그렇다 보니 노인이나 장애인 인구가 많은 편이고, 넉넉지 않은 형편이지만 호젓하게 공원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것이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자랑이다. 어르신들은 어디서나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낮은 능선의 산과 공원에서 운동하고 산책할 수 있고, 어린이들은 초등학교 뒤 솔밭에서 철마다 바뀌는 나무와 버섯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좋은 환경 덕분에 인근 어린이집 아이들이 진행하는 자연체험 프로그램이 훌륭해 국제기구에서 지정까지 받았다고 한다. 이 모든 일상과 유산이 파괴되는 것에 저항해 마을 사람들은 무리한 사업에 반대해 왔다.

 

수곡동 사람들이 동네를 보여주겠다며 다 같이 길을 나섰다. 둘러보니, 공원은 마을 사이를 굽어 흐르기도 하고 바깥으로 포근히 감싸 안고 있기도 했다. 공사가 어떻게 무리한지 부지의 구조를 설명하는 와중에 지나다 보이는 메타세콰이어길과 파랑새를 자랑스러워한다. 놀랍게도 마주치는 모든 이들과는 다 아는 사이이다. 아이든 어른이든 똑같이 반가워하고, 개발을 찬성하는 주민도 예외는 아니다. 서울에서 온 변호사님들이라고 이야기하느라 여러 번 걸음을 멈추는데 반대편 주민이라고 속삭이시면서도 호기심을 평등하게 채워준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아파트 놀이터를 무심히 바라보았는데, 두 할머니가 나란히 그네를 타며 놀고 있다. 뭐 이런 평화롭고 이상한 동네가 있나 비현실적이고 혼란스럽다.

 

그리고 이 보드랍고 순한 투쟁가들이 사는 마을을 진심으로 지키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부드러운 능선이 가파르게 깎인 경사면이 되는 날에는 수곡동 사람들도 변할 것만 같아 슬프다. 잡담하며 보여주기 시작한 사진을 맨 끝 사람까지 소외되지 않게 돌려보고, 삼겹살 집에 둘러앉자마자 고기를 안 먹겠다는 말에 “아? 그거 하시는구나?” 하고 두 말 보태지 않고 수용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동지로서 같이 싸웠던 옆 동네는 벌써 아파트가 들어섰다. ‘동백꽃필무렵’에 나온 메타세콰이어길이 있는 초등학교의 학생들은 학교 오는 길 잠두봉의 나무들이 잘려나간 것을 본 이야기를 교장선생님께 들려주며 울었다고 한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잘려 나간 나무의 자리에 들어선 잠두봉 더샵아파트가 길쭉하게 보인다. 그 뒤로 걸린 노을이 나무의 핏자국처럼 번졌다.

 

지현영 사단법인 두루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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