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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꽃이 피었다. 입추를 지나 꽃을 피웠으니 지각도 보통 지각이 아니다. 어디 지각뿐이겠는가. 대체로 그 꽃을 볼 수 있는 시기가 6월에서 10월까지이니, 늦어도 한참 늦은 것이다. 게다가 틔운 꽃도 몇 개의 가지에 듬성듬성 돋아나 있을 뿐이다. 꽃이 게으름을 부리지는 않았을 터. 좀 더 빨리 틔우지, 반갑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해 나도 모르게 투정 같은 인사를 건넸다. 제 딴에는 힘겹게 꽃을 틔웠을 테지만 그래도 바라보는 마음이 왠지 서운하고 야속하기만 하다. 한편으로는 금방 시들거나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아서 조마조마하기까지 하다. 줄기를 건드리면 간지럼을 탄다 해서 간지럼나무라는 별칭을 갖고 있기도 하고, 백일 동안 꽃을 피운다 해서 백일홍이라고도 부르는 그 꽃은 배롱나무이다.

여느 여자의 피부보다 더 치밀하고 매끈한 수피를 지닌 그 나무는 아파트 단지 중앙 분수대 옆에서 등불처럼 서서는 온 몸으로 계절의 변화를 일러준다. 살아 있는 자연의 생체시계이자 계절의 전령인 셈인데, 저마다 그 나무에 얽힌 애틋한 사연 하나쯤은 갖고 있기 마련이다. 줄기의 겉과 속이 같아 선비나무라고도 부르는 나무가 배롱이다. 게다가 그 꽃은 선비의 청렴함을 상징한다. 피고 지고, 한여름 내내 꽃을 볼 수 있는 까닭에 그 꽃만큼 자손이 번성하라며 무덤가에 배롱나무를 심었고, 꽃이 다 질 무렵이면 벼가 익고 쌀밥을 먹을 수 있어서 사람들은 그 꽃을 바라보며 배고픔을 달래기도 했다.

배롱나무의 한자어는 자미수이니, 무덤가에 그만한 꽃이 또 있을까. 옥황상제의 뜰 이름이 자미원이다. 기원과 소망이 더해져 그 배롱은 우리에게 더 애틋한 꽃이다. 한데 그 꽃이 늦게 꽃을 피운 것이다. 이제 하나둘씩, 꽃잎이 스러지고 떨어질 때, 한여름 장하던 붉은 기운을 서서히 거두어들일 때, 점점이 피멍 같은 꽃을 피워 올렸다. 가만 생각해 보면 올해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몇 해 전부터 백일홍은 힘을 내지 못했다. 잇단 폭염과 가뭄으로 시름시름 앓더니 그 기세를 잃고 가지가 누렇게 말라죽어 나갔다. 이러다 내년에는 정말, 그 꽃을 볼 수 없을지 모르겠다는 걱정도 든다.

하긴 그 꽃뿐일까. 다른 나무들 역시 맥을 못 추고 있는지도 몇 해 됐다. 이렇게 간다면 얼마 못 가 성한 것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폭염과 수해와 역병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호사스럽게 꽃타령이라니. 내심 민망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쩌랴. 삶에는 그런 위안거리가 필요하지 않은가. 어쨌든 이 모든 게 기후변화 때문이라는 사실을 안다. 아무리 가지치기를 하고 병충해를 막는다 해도 기후가 주는 변덕에는 그것들을 엽렵하게 지켜낼 수가 없다. 나아가 기후변화는 우리의 삶까지 바꾸게 하고, 종내에는 우리의 생명까지 흔들어댈 것이다. 극지방, 그 동토에 피어난 푸른 초원과 꽃들이 아찔하다.

은미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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