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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상수’된 실업의 두려움…내 '일'이 없다

입력 : 2020-06-14 11:00:00 수정 : 2020-06-15 14: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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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년층, 실직 스트레스 악화 / 코로나 이후 경영난에 권고사직 늘어 / 4050 고용지표 최근 몇년 새 더 악화 / “5개월간 이력서 냈는데 딱 1곳 면접” / “청년·경력자 선호… 자격증 소용없어” / 직장인 76% “코로나로 실직할 수도” / 실업률 3% 상승 때 자살률 4% 증가 / “진통 겪더라도 과감한 구조개혁 나서 / 일자리 잃은 고통의 크기라도 줄여야”

“하루하루 답답하다.” “막막하다.” “네 식구 먹여 살려야 하는데….”

 

최근 서울·수도권 고용지원 기관들에서 만난 중·장년들은 긴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일할 힘도, 능력도 넘치지만 오라는 곳이 없다. ‘40대 고용 절벽’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까지 덮치자 일자리 자체가 말라붙었다. 아직 일터에 발붙이고 있는 이들에게도 남 얘기가 아니다.

 

한창때 직장에서 밀려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한국인의 삶에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피로지수’를 높이고 있다. 40·50대 고용지표는 최근 몇년 새 악화를 거듭했다.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로 중·장년 고용시장의 골병은 깊어져 왔다. 나아지리라는 희망은 작다. 이미 실업이 삶의 ‘상수’가 됐다면 고통의 크기라도 줄여야 한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극심한 진통을 불사하고 과감한 구조개혁에 나서지 않는 한 특단의 고용대책은 없다고 입을 모은다. 

 

10일 서울 중구 서울고용복지플러스센터를 찾은 한 구직자가 실업급여설명회장에 들어가기 위해 줄 지어 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코로나로 갈 곳 없어…뭐 먹고사나”

 

“5개월이나 이력서를 냈는데,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은 단 한 번이었어요. 이제는 뭘 어찌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경기 안양시의 40대 후반 A씨는 지난해까지 표면실장기술 업체의 팀장이었다. 매출 악화로 월급 밀리기가 밥 먹듯 했다. 3개월 동안 아예 임금을 못 받자 권고사직했다. 직장 바깥은 더 추웠다. 사람을 뽑는 곳도 드문 데다 그나마 연령제한에 걸렸다.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따봐도 별다를 게 없었다. 그는 “어느 직종이든 청년과 경력자를 우선 채용한다. 정부·지자체에서 장년층 채용에 인센티브를 줘서라도 일자리를 늘려줬으면 좋겠다”며 절박해했다.

고용 절벽은 일자리 지원기관들에서도 확인됐다. 지난 10일 서울의 한 고용복지플러스센터를 찾은 신모(49)씨는 “살면서 배운 게 인쇄기술뿐인데 경기가 어려워 한순간에 잘렸다”며 “코로나19 때문인지 일이 아예 없어서 집에서 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서울 동작구에 사는 전기배선 기술자 정모(57)씨 역시 3월에 일터에서 밀려났다. 그는 “요즘은 일이 없어서 구직활동을 하려 해도 뭘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일만 할 수 있으면 전국 어디든 갈 것”이라고 했다.

 

신모(58)씨도 직원 수 35명인 건설사에서 지게차를 몰다 지난달 권고사직 당했다. 그는 “코로나19로 2월부터 일이 없었는데, 석 달을 버티다 나 포함 4명이 지난달에 잘렸다”며 “아직 살 날이 많아서 뭘 먹고 살지 고민”이라고 했다. 치과기공사로 일하다 3월에 권고사직된 김모(50)씨는 “구직활동을 계속하고 있지만 코로나 때문에 사실 답이 없다”고 막막해했다. 울산 취업지원센터 관계자는 “매년 6월쯤이면 실업급여 신청하는 분들이 주는데 올해는 여전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삶의 ‘상수’된 실업의 두려움

취업 상태인 이들에게도 실업의 공포는 상존한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지난달 30∼40대 직장인 2385명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6.4%가 “코로나19로 급작스럽게 퇴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소기업(78.6%)·여성(77.4%) 직장인이 대기업(71.7%)·남성(74.9%) 직장인보다 불안감이 컸다.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가 지난 3월 직장인 1만983명을 조사한 결과에서도 응답자의 55%가 “현재의 경제 위기로 고용불안을 느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실업의 스트레스는 일상을 뒤흔든다. 울산에서 20년간 구직자 심리상담을 한 이모 상담사는 “불안하고 두렵고 실망스럽고 내가 왜 이렇게 돼버렸나 낙담하는 등 온갖 감정에 휘말리게 된다”며 “평범한 분들도 굉장히 날카로워지니 하루 두세 번씩은 상담센터에서 소리 지르고 책상 치는 분들이 생긴다”고 전했다.

 

일자리를 잃는 고통은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2020 자살예방백서’에 따르면 2018년 저소득 가구의 자살생각률은 실업자가 8.3%로 가장 높았고 이어 비경제활동인구 6%, 취업자 2.9% 순이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등이 1970∼2007년 유럽 26개국 자료를 연구한 결과 실업률이 3% 상승할 때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이들은 4% 증가했다. 

 

◆‘고통 덜한’ 실업 되려면

실업은 한국 사회가 상당 기간 안고 가야 할 고질병이 됐다. 성재민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산업구조 변화로 고용시장에서 일정 인원은 계속 이동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획기적 일자리 창출이 어렵다면 실업의 고통을 더는 것이 현실적 해결책이다.

 

성 연구위원은 “덴마크가 우리보다 근속연수가 짧음에도 행복한 사회인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며 “10인 이상 사업체 기준으로 근속기간 5년 미만 노동자 비율은 덴마크가 66%로 63.9%인 우리보다 더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실업이 불행으로 직결되는 이유 중 하나는 일자리 간 격차가 굉장히 크기 때문”이라며 “가진 사람이 더 가지는 구조가 노동시장에 뿌리 깊게 구조화돼 격차를 벌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월급 1000만원 대 200만원’의 사회 대신 상당수가 월 300만∼500만원을 받아 실업의 타격을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한국형 노동유연화’를 시도할 때라고 조심스레 말한다. 기업 입맛에 맞는 ‘자르기만 쉬운’ 노동 유연화가 아닌, 재고용이 함께 원활해져 일자리에서 일자리로 사람이 흐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 정규직 노동자만 혜택받는 근속연수에 따른 고임금 구조도 손봐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산별교섭 활성화는 대·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를 줄이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유럽처럼 해당 산업 전체의 이익을 고려해 각 기업의 임금을 협상하면 대기업만 살찌는 현상이 덜해진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산업별로 전체 인력, 생산량 수준 등을 검토해서 산업 구조조정 방향을 분석하고 필요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며 “이런 구조조정으로 나온 사람은 다른 업종으로 어떻게 이동시킬지까지 정부가 고민하는 산업별 정책 검토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꽁꽁 얼어붙은 고용시장… 제조업·청년층에 더 가혹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장기화로 고용시장에 한파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 경제의 주력 업종인 제조업과 미래 주역인 청년층의 고용 충격이 크다. 코로나19가 언제 종식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고, 실적이 악화한 기업이 채용을 꺼려 고용 부진은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주요 수출 상대국의 코로나19 상황이 진정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도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에 큰 부담이다.

 

10일 통계청이 발표한 5월 고용동향을 보면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고용시장이 얼어붙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15∼64세 고용률은 65.8%로 전년 동월 대비 1.3%포인트 하락했다. 금융위기를 겪던 2009년 5월(63.5%) 1.3%포인트 하락했던 때와 비슷한 충격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취업자 감소폭이 39만2000명으로 전월(47만6000명)보다 축소됐다는 점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생활 속 거리두기’로 전환되면서 대면서비스업 분야를 중심으로 감소세가 약해진 데 따른 것이다. 숙박·음식업 취업자 감소폭은 18만3000명으로 전월(21만2000명)보다 완화됐고, 온라인 개학과 학원 개강 등으로 교육서비스업 감소폭도 4월 13만명에서 5월에는 7만명으로 축소됐다. 예술·스포츠·여가업과 운수·창고업은 취업자 증가폭이 나란히 확대됐다.

 

하지만 코로나19 상황이 악화하면 다시 ‘사회적 거리두기’로 돌아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경우 서비스업 고용시장은 다시 얼어붙을 가능성이 크다. 10일 0시 기준 신규 확진자가 50명 발생하는 등 최근 코로나19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어 안심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코로나19 방역 성공이 고용시장 상황 개선의 전제조건인 셈이다.

 

세계적으로 코로나19 확산세가 여전히 심각한 것도 우리 경제에 악재다. 교역 상대국의 경제 위축으로 우리나라 수출이 줄어들고, 그 여파는 제조업 고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제조업 취업자는 5월 5만7000명 감소해 전월(-4만4000명)보다 상황이 더 나빠졌다.

청년층(15∼29세)도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도소매업 등 청년 고용 비중이 높은 업종의 고용이 부진에 빠지면서 5월 취업자가 18만3000명이나 줄었다. 특히 취업자 수 증가를 견인해 온 20대의 경우 봄철 채용과 면접이 연기돼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서 13만4000명 감소했다. 이에 따라 청년 고용률은 42.2%로 1.4%포인트 상승했고, 청년실업률은 10.2%로 0.3%포인트 높아졌다.

 

김용범 기재부 1차관은 이날 서울 은행회관에서 열린 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고용동향과 관련해 “지난 3∼4월 고용지표와 비교해 보면 긍정적 변화가 관찰된다”며 “5월 계절조정 취업자 수는 전월 대비 15만3000명 늘어 코로나19의 1차 고용 충격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는 제조업 취업자 감소폭이 지속해서 확대되고 있는 것에 대해 “국내 경기둔화, 수출감소 등 코로나19의 2차 충격에 따른 제조업 고용리스크가 큰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전문가들은 고용시장이 한동안 부진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고용은 경기에 후행한다”며 “일용직이나 임시직은 잠시 (취업자 수가) 올라갈 수 있지만 제조업은 (부진이) 더 오래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양 교수는 “현재 코로나19가 해결된 게 아니고 계속 50명 이상 감염되고 있고 집단감염 사례도 나오고 있다”며 “미국을 포함해 세계적으로 수출이 정상화되기까지도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수출이나 항공 관련 제조업이 유동성 지원으로 연명하고 있어 생산해도 재고를 쌓아놓는 상황일 텐데 현재 상황이 지속하면 기업이 부도가 나고 대량실업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정부가 고용동향으로 일희일비할 때가 아니라 현재 발생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선제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영익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4월에 이어 5월에도 고용원이 없는 자영업자가 증가했는데 기존 고용원을 해고했거나 일자리를 못 구해 ‘나 홀로 창업’이 늘어난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며 “지금처럼 자영업이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이 숫자는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날 정부는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관계장관회의(녹실회의)를 열어 고용시장 상황을 점검하고 공공 일자리 공급뿐만 아니라 민간 일자리 창출 기반 강화방안도 마련하기로 했다. 홍 부총리는 “정책을 마련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정책 시차를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미 정부는 다양한 고용안정대책을 담은 정책대응 패키지를 마련하고 이 정책들을 실행할 재원 확보를 위해 지난 4일 국회에 3차 추가경정예산안을 제출하고 애타는 심정으로 국회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며 국회의 조속한 심의를 촉구했다.

 

송은아·이희진 기자 sea@segye.com, 세종=우상규·박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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