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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모습이 이랬을까 … 초록빛 낙원으로의 초대

입력 : 2020-05-29 05:00:00 수정 : 2020-05-28 20:3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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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희 개인전 ‘투워즈’ / 100호 크기 캔버스 27개 이은 ‘더 데이즈’ / 자연 속으로 들어간 작가의 시선 응축 / 동양화의 자연관, 서양화 재료로 표현 / ‘더 테라스’ 등 작품 사실적이며 환상적

온통 초록으로 뒤덮인 숲은 새벽의 바다와 밤하늘을 모두 품는다. 하나의 계절에 함께 피어나지 못하는 꽃과 열매들이 한자리에 어우러지고, 온갖 동물들이 높다란 나무를 자유롭게 노닌다. 자연의 포근한 울타리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생명들의 모습은 지상낙원을 연상케 한다.

‘The Days’(2011∼2014). 왼쪽 화면에 등장하는 이른 아침의 바다에서 오른쪽 상단에 위치한 밤하늘로 이어지는 풍경은 시간의 흐름뿐만 아니라 생명의 주기를 담아내며 현실세계에서 각기 다른 주기로 피어나는 식물들이 생의 동반자로서 함께 공존한다. 금호미술관 제공

김보희(68)의 ‘더 데이즈(The Days)’는 자연 속으로 들어간 작가의 시선을 응축하고 있다. 100호 크기의 캔버스 27개(가로 약 15m)를 이은 이 대작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라기보다는 작가가 만든 세계이자 심상의 풍경이다. 인류가 존재하기 전 태초의 모습을 상상하게 하는 이 작품은 자연의 구성원으로서 인간을 초대하며 공존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천지창조 5일째의 낙원 풍경이 이렇지 않았을까요. 신이 천지를 창조할 때 여섯째 날 만든 사람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어지러워졌잖아요. 그래서 사람은 빼고 대신 원숭이를 그려넣었어요.”

서울 종로구 금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김보희 개인전 ‘투워즈(Towards)’에는 ‘더 데이즈’ 외에도 생명의 기원인 자연을 담은 작품들이 가득하다. 특히 제주도 풍광은 그의 삶의 터전이자 영감의 원천이다. 보고 또 보고 느낀 자연의 면면들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화면으로 겹겹이 쌓아 올렸다. 엷게 여러 번 올려진 물감은 동양화 특유의 질감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자연 그대로의 형태와 색을 재현하려는 작가 노력이 깃들어 있다. 과감한 색면과 세필의 중첩으로 현대 채색화의 가능성을 제시한 ‘바다 풍경’ 시리즈, 원형의 자연으로서 동식물이 공존하는 하나의 세계를 구현한 ‘투워즈’ 시리즈 등 이번 전시에서는 제주의 풍경을 다채로운 색감과 형태로 담아낸 작품 55점을 만날 수 있다.

김보희는 동양화 매체를 기반으로 구상 풍경 회화의 지평을 넓혀 왔다. 동양과 서양, 구상과 추상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동양화의 자연관을 서양화 재료로 표현해 왔고 수묵과 채색, 원경과 근경, 인물·정물·풍경 등 다양한 소재를 다뤄왔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사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이다.

‘The Terrace’(2019). 8개의 캔버스를 연결해 하나의 장면으로 구성한 작품으로 작가가 자신의 정원에서 가까이 마주한 대상들을 담았다. 금호미술관 제공

1층 전시장에 내걸린 ‘더 테라스(The Terrace)’도 마찬가지다. 캔버스 8개를 연결해 한 장면으로 선보인 이 작품은 서로 다른 시점에서 바라본 테라스 앞 풍경을 담고 있다. 가로 3m, 세로 5m가 넘는 대형 그림으로 관람객들도 마치 초록숲이 울창한 테라스에 들어간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원경의 자연은 하나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것 같지만 발밑에 자리 잡은 듯한 테라스는 여러 시점으로 비친다. 이 같은 화면 구성은 동양 산수화의 전통적인 시점 처리 방식에 따랐다. 데이비드 호크니가 숲길에 화판을 놓고 숲길을 그렸듯, 김보희도 테라스를 계속 거닐면서 풍경을 바라본 그 시선을 그대로 담아냈다.

‘Self Portrait’(2019)는 빛바랜 듯한 배경 위로 씨앗부터 꽃, 시들어진 꽃잎의 모습을 한 화면에 담고 있다.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는 자연의 주기 속에서 작가는 삶의 본질을 들여다본다. 금호미술관 제공

자연에 대한 작가의 애정은 생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나아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자연의 질서와 삶의 본질을 관조한다. 그런 사유에서 나온 작품이 생명의 기원인 씨앗을 거대한 크기로 그린 ‘씨앗(The Seeds)’시리즈와 씨앗부터 꽃, 시든 꽃잎을 한 작품에 담은 ‘자화상(Self Portrait)’이다. 한 생명의 시작을 알리지만 동시에 꽃과 열매가 소멸해야만 얻을 수 있는 씨앗처럼 자연은 순환의 질서 속에서 생을 유지한다. 김보희는 빛바랜 듯한 배경 위로 꽃의 주기를 정밀하게 그려냈다. 생명과 죽음이 공존하는 자연의 주기 속에서 우리 삶의 본질을 발견하고 담담히 받아들인 작가의 내면이다. 전시는 7월 12일까지.

 

권이선 기자 2s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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