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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학 수십년간 침체… 매력적 소재 다시 부활해야”

입력 : 2020-04-30 08:00:00 수정 : 2020-04-29 19:4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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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부처님 오신날… 두 원로, 불교문학을 논하다 / 김성동의 '만다라' 종교소설 가능성 제시 / ‘아제아제…’ ‘우담바라’ 등 나오며 전성기 / 종교·문학사이 균형감 상실… 대중 외면 / 2000년대 후 뚜렷한 존재감 못 드러내 / 생명존중·인간회복 등 주제 특유 무게감 / 문학사적 가치 높아… 작가 사고전환 필요 / ‘불교평론’에 이상문의 ‘불호사’ 실려 눈길 / 앞으로 좋은 작가·작품 발굴 통로 기대

1979년 11월, 32살 김성동의 ‘만다라’가 장편으로 재출간되자 불교계가 발칵 뒤집혔다. 소설이 그린 파계승 지산의 일탈과 기행, 해인사 등 실제 사찰 이름의 차용 등이 “불교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김성동이 등단작 ‘목탁조(1975)’를 발표했다가 승적을 박탈당한 승려였다는 점도 문제로 거론됐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논란은 김성동이란 이름을 문단에 떨친 계기가 됐다. 100만부 이상 팔리고 임권택 영화로도 제작된 ‘만다라’는 종교소설, 특히 불교소설의 새 가능성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 이후 발표된 한승원의 ‘아제아제바라아제(1985)’, 남지심의 ‘우담바라(1987)’, 최인호의 ‘길 없는 길(1989)’ 등도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한때 전성기를 구가하던 불교소설은 그러나 2000년대 이후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불교소설 침체의 늪 언제 벗어날까(2004)’란 기사가 나오고 15년도 더 지났으나 변한 것은 그다지 없다. 물론 간간이 불교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나오기도 했으나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진 못했다.

이런 상황이기에 최근 계간 ‘불교평론’에 실린 ‘불호사(佛護寺)’에 더욱 눈길이 쏠린다. 40만부 이상 판매고를 올린 ‘황색인(1987)’으로 유명한 원로 소설가 이상문(73)이 내놓은 이 소설은 홍사성(69) 불교평론 주간(시인)의 ‘불교문학 부활’ 기획의 일환으로 쓰인 것이다.

불기 2564년 부처님오신날을 사흘 앞둔 27일 두 사람을 만나 불교문학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둘 다 굵직굵직한 작품이 사라졌다며 짙은 아쉬움을 드러냈으나 종교라는 주제 특유의 무게감을 활용할 여지가 여전하다는 점에서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보았다.

 

소설가 이상문(왼쪽),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

◆‘침체의 늪’ 빠진 불교문학

‘불교문학’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작품에 사찰과 승려가 나오거나 불교적 가르침, 즉 연기론이나 윤회론 등이 바탕에 깔린 시나 소설을 이른다. 문학이 지니는 감동적 요소와 포교라는 목적이 동시에 존재하는 독특한 장르로 볼 수 있다. 그 연원이 신라·고려로까지 거슬러 오르는 불교문학의 존재감은 왜 이토록 희미해진 걸까.

우선 종교와 문학 사이에 있어야 할 미묘한 균형감의 상실을 이유로 꼽을 수 있다. 물론 ‘종교’란 주제 자체가 작가들에게 주는 부담감도 작지 않다.

 

홍사성 주간=“최남선 한용운 이광수 박종화 서정주 조지훈 김동리 이원섭 김어수 조종현 등이 쓴 작품, 그러니까 문단에서 인정받는 불교문학의 특징은 종교에 국한되거나 매몰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미학적 완성도가 대단히 높았죠. 종교소설은 자칫 ‘포교’라는 목적을 지향하는 소설이 되기 쉽습니다. 문학을 담보하지 못한 채 종교적 색채만 드러낸다면 대중으로부터 외면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상문 작가=“일단 종교는 어려워요. 또 대부분 종교가 그렇듯 불교에 이미 감동적인 스토리가 많다는 점도 작가들이 선뜻 손을 못 대는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새로운 통찰, 탁월한 서사 구조를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예요. 더구나 ‘착하게 살자’, ‘남을 도우며 살자’ 등 종교적 가르침을 담으려다 보면 작품이 평면적인 구조로 이어질 공산도 큽니다. 그러면 소설적인 재미는 아무래도 떨어지죠.”

 

불교, 나아가 종교에 대한 대중의 이해나 받아들이는 정서가 1970∼80년대와 많이 달라졌다는 점도 한몫한다. 지금 사람들에게 종교는 그때만큼 일상적이지도, 그다지 흥미를 유발하는 소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계가 다소 난해하고 대중화되지 못한 불교경전을 문학의 일상 언어로 번역하지 못했다는 점도 뼈아픈 대목이다. 불교적 상징과 은유만으론 현대문학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경향은 문학뿐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 등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대중의 외면이 시장의 외면으로, 나아가 작가들의 외면으로 이어진 셈이다.

 

홍사성 주간=“불교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과거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1979)’처럼 문단에 충격을 준 기독교 소설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죠. 종교소설에 이전처럼 감응하는 독자가 드물어진 점이 크다고 봅니다.”

◆“불교문학 명맥 이어져야”

불교는 그동안 우리 문학의 질료 노릇을 톡톡히 해왔다. 불교가 말하는 생명 존중과 인간 존엄, 인간성의 회복은 근대 이후, 특히 전후(戰後) 문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종교가 물론 다루기 조심스러운 주제인 것은 맞으나 어떻게 비틀고 변주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독자들의 눈길을 잡는, 외려 더 매력적인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학적 가치도 여전하다. 단순히 “독자들이 안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만 할 것이 아니란 얘기다.

이상문 작가=“작가들의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불교는 본래 ‘너그러운 종교’예요. 예컨대 살생을 금하지만 2500년 전부터 축산업을 장려해왔어요. 흔히 얘기하는 ‘살불살조(殺佛殺祖)’에서 엿볼 수 있듯 ‘허용 범위’도 대단히 넓죠. 종교가 가진 엄숙함을 친근하게 비튼다든가 하는 작업이 의외의 결과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홍사성 주간=“‘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를 스님이 거짓말로 지켜줬다’, ‘강에 빠진 여자를 스님이 직접 뛰어들어 몸소 구했다’ 등 그때그때 상황윤리에 따른 ‘의외의 서사’들이 불교에는 이미 꽤 많이 존재합니다. 교조주의적이지 않은 거죠. 이는 문학적으로 활용할 여지가 많다는 얘기와도 같습니다.”

좋은 작품과 작가를 발굴할 ‘통로’가 사라진 점은 불교계 입장에선 아쉬운 부분이다. 홍 주간이 올해부터 원고지 120매 안팎의 불교소설을 계간지에 싣기로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교문학 공모전이 별로 없다는 점, 기성 문인들이 꾸준히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점은 오래전부터 문제로 꼽혀왔다.

 

홍사성 주간=“불교문학의 위기론이 나온 지도 꽤 된 것 같아요. 통로를 뚫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적어도 1년에 4편은 불교소설이 더 나오겠죠. 아무리 인기 있는 가수도 모든 곡이 다 히트곡은 아니지 않습니까. 일단 활발히 작품활동이 이뤄져야 대중성과 종교성을 겸비한 작품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박상률과 이경자, 손홍규 등 원로·신진 작가들에게 원고를 부탁했습니다. 기대감이 큽니다.”

이상문 작가=“이렇게 사라지기엔 우리 불교문학의 문학사적 가치가 작지 않습니다. 종교는 꼭 신자가 아니더라도 작가라면 한 번쯤 다뤄볼 만한 매력적인 소재라고 생각해요. 많은 작가가 도전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불교문학이 대중의 사랑을 받고 다시 우뚝 서는 모습을 보고 싶네요.”

 

이창수 기자, 사진=서상배 선임기자winteroc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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