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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김씨댁 아홉 여인네의 애잔한 화전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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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2-19 02:00:00 수정 : 2020-02-19 00: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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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배삼식 작가 ‘화전가’ 28일 개막 / 과거 1년에 단 하루뿐인 ‘여성 축제의 날’ / 6·25 직전 암울한 현실 속 환갑 맞은 김씨 / 잔치 여는 대신 딸들 데리고 놀이길 나서 / 자식에 좋은 추억 남겨주려는 모정 담겨 / 극중 내내 이어지는 구수한 사투리 일품
배삼식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는 ‘우리 시대 가장 주목받는 극작가’로 손꼽힌다. 올해 창단 70주년을 맞는 국립극단도 뜻깊은 한 해를 여는 첫 작품을 그에게 맡겼다. 한국전쟁 발발을 두 달 앞둔 1950년 4월 경북 안동 어느 마을 김씨댁 아홉 여인네 이야기를 다룬 ‘화전가’다. 무대는 일제강점기에 멀리 만주까지 떠돌며 집안을 건사하기 위해 산전수전 다 겪어야 했던 김씨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서울에서 유학 중인 막내딸과 대구에서 사는 둘째딸 등 식솔이 모이며 시작된다. 다가오는 전란을 감지하면서도 그저 일상을 이어가며 안녕을 기원할 수밖에 없는 김씨댁 여인들은 가족 빈자리가 드러날 환갑잔치 대신 화전놀이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마침 ‘경신(庚申·60갑자 중 57번째 일진)’인 밤을 옛 풍속(경신수야·庚申守夜)대로 이야기꽃으로 지새운다.
“역경 속에서 사람을 보듬어 주는 것은 소소한 기억들입니다.” 국립극단 창설 70주년 기념작으로 신작 ‘화전가’를 선보이는 극작가 배삼식. 서상배 선임기자

배 교수는 “화전놀이는 함경도부터 남쪽까지 꽃이 제일 좋고 봄기운이 충만할 때, 그리고 농번기가 오기 전에 남자들은 다 빼고 오로지 여인들이 일 년에 단 한 번 크게 숨을 쉬어보는 축제였다”며 “작중에선 김씨가 문득 만주를 떠돌던 힘들었던 시절에는 하지 못했던, 시집온 후 잠깐 근친간 봄날이 마지막인 까마득한 기억 속 화전놀이를 떠올린다. 현재가 어디로 흘러갈지 불길하게 예감하는 상황에서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딸들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기억 하나를 남겨주고 싶다는 마음에서 화전놀이를 가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동’이란 상징적 공간을 배경으로 한 작품답게 ‘화전가’는 진득한 안동 사투리로 가득 채워진다. 화전놀이 풍속을 모르는 막내딸 봉아에게 나이 지긋한 행랑어멈 독골할매가 이렇게 가르쳐 주는 식이다. “집안 어른들, 액씨들, 동기 간에 시집간 액씨들꺼정 다 모이가 이삐게 단장허고, 꽃매이 채리입고 나가니더, 나가가 바람도 시컨 쎄고 꽃도 보고 꽃지지미도 부치가 농가 먹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꼬, 그래 일년에 딱 하루 놀다 오는 게래요….”

한국전쟁을 앞둔 암울한 현실에서도 담담하게 일상을 이어가며 서로의 삶을 보살피는 여인들 이야기를 다룬 국립극단 신작 ‘화전가’의 연습 장면. 국립극단 제공

지금 안동에서도 듣기 힘든 고순도 사투리가 정겹고 그립게 들린다. 전주 태생인 배 교수는 이를 위해 구술사 자료나 방언 자료를 찾아보고, 또 직접 만났던 1920년대 경북 봉화 출신 지인 말씨를 참조했다고 한다. 배 교수는 “지역성 강한 사투리가 의미 전달 기능에선 방해되나 ‘말’은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만 갖는 게 아니다. 사투리 자체가 가진 음악성과 아름다움은 단순히 장식적 요소뿐만 아니라 전체적 틀 안에서도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안동’을 고른 이유에 대해선 “안동, 영주, 봉화 지역이 조선시대 남인 근거지로 구한말 국권 침탈이 벌어졌을 때 가장 먼저 활발하게 의병 거사가 일어난 지역이고, 유력한 가문이 ‘나라 뺏긴 땅에선 살 수 없다’며 간도, 만주로 앞장서서 나간 곳이었다”며 “잘 아는 지역이 아니지만, 그 당시 상황을 집약해서 보여줄 수 있는 장소로 생각했다. 우리나라 여성이 주체적인 목소리를 내는 규방가사 전통이 가장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실제 지금도 안동에선 여성 가사 낭송대회가 열리고 봄에는 화전을 누가 더 곱게 부치나 경연도 하고, 많은 가사문학 작품이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전쟁을 앞둔 암울한 현실에서도 담담하게 일상을 이어가며 서로의 삶을 보살피는 여인들 이야기를 다룬 국립극단 신작 ‘화전가’의 연습 장면. 국립극단 제공

‘화전가’에는 이처럼 화전놀이, 사투리와 경신수야는 물론 지금은 잊힌 풍물과 기억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이 가득하다. 배 교수는 “큰 의미가 없어도 세계를 충만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커피, 설탕, 한복 노리개, 장신구, 옷감의 느낌 등. 좌익이냐 우익이냐, 통일이냐 분열이냐, 민족이냐 반민족이냐, 어떤 게 옳고 그르냐로 서로 싸우는 시절에 이런 삶의 사소한 즐거움, 아름다움은 무의미한 게 된다. 중대한 의미를 두고 다투는 시대의 사소하고 무의미한 것들에 대해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을 앞둔 암울한 현실에서도 담담하게 일상을 이어가며 서로의 삶을 보살피는 여인들 이야기를 다룬 국립극단 신작 ‘화전가’의 연습 장면. 국립극단 제공

일제 강점기 시절 예술인들의 삶을 다룬 ‘적로’와 광복 직후를 다룬 ‘1945’에 이어 한국전쟁 직전을 다룬 ‘화전가’까지 배 교수 신작은 근현대사를 훑어 내려오고 있다. 배 교수는 “먼저 돌아가신 김동현 형(고 김동현 연출·2016년 별세)하고 작업할 때가 첫 출발점이었다. 근현대사 시리즈를 함께 공동창작하려 마음먹었다. 지금 이 삶의 모양을 만들어 놓은 가까운 과거에 대해 우리 공동체가 가진 기억이 너무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다. 쉽게 말해 과거를 너무도 모른다. 먼 과거가 아닌데 너무 참혹해 쉽게 입에 꺼내놓지도 않는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러한 시간에 대한 기억을 우리가 더듬어 보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1945’도 사실 광복 당시 귀국하는 도정에 있던 군상들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민족적·국가적 정체성’이라는 게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 과정에 어떤 폭력이 개입됐으며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나름대로 질문한 것”이라며 전후 상황에 대한 작품이 다음 차례라고 설명했다.

한국전쟁을 앞둔 암울한 현실에서도 담담하게 일상을 이어가며 서로의 삶을 보살피는 여인들 이야기를 다룬 국립극단 신작 ‘화전가’의 연습 장면. 국립극단 제공

작법(作法)에 대해 배 교수는 “정해진 생각이나 입장을 최대한 갖지 않으려 한다”고 설명했다. 의미 과잉인 세상에서 의미로부터 자유로운 글을 쓰는 작가도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얘기다. “딱딱한 의미가 칼처럼 부닥칠 때는 그런 의미로부터 밀려난 무의미가 훨씬 더 충만하게 삶을 담아낼 수 있다 “며 “그때그때 공동체 안에 있는 존재로서 필요한 이야기들, 쓸모가 있는 이야기들을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고 말했다.

 

배 교수 작품의 중심은 ‘화전가’처럼 여인들이 차지하곤 한다. 극을 이끌어가는 주축이어야 할 ‘악인’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점도 특징이다. 배 교수는 “이야기꾼으로서는 어떤 것으로도 가둘 수 없는 여백을 가진 존재를 찾아다니게 마련이다. 기존의 뻔한 이야기로는 포섭할 수 없는 존재, 가장자리에 있는 존재를 찾다 보니 자연스레 여인들 이야기가 되었다. ‘화전가’에서도 실제 그 당시 남자들은 일제를 거치며 죽었거나, 몸을 상했거나, 멀리 떠났거나, 감옥에 가 있었다. 삶의 터전을 지키고 삶을 보듬어 안으며 버틴 건 여인들이었다”고 설명했다. 악인의 부재 역시 “ ‘이 사람은 선하고 이 사람은 악하다’는 범주 안에 들어가면 악인을 비난하고 파멸로 이끌어가는 것밖에 없다. 분명 현실에선 선한 사람이 있고 아무리 따져봐도 ‘이 사람, 비루하고 악하다’고 할 존재가 있다. 그런데 그건 너무 쉬운 이야기다. 우리 대다수는 그 언저리에, 어떨 때는 선하고 어떨 때는 비루하고 남루하고 악한 모습을 보인다.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세계를 살아간다. 칼로 무 자르듯 판단하기 힘든 게 삶의 대체적인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역경 속에서 사람을 보듬어 주는 것은 소소한 기억들입니다.” 국립극단 창설 70주년 기념작으로 신작 ‘화전가’를 선보이는 극작가 배삼식. 서상배 선임기자

배 교수는 “항상 새 작품 쓸 때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고, 그래서 항상 흔들리곤 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며 “‘화전가’를 통해 고통스러운 순간 속에서도 아름다운 존재를 무대 위에 보여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명동예술극장에서 2월 28일부터 3월 22일까지.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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