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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의문학의숨결을찾아] 빛의 도시 광명의 기형도 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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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2-07 23:01:00 수정 : 2020-02-07 22: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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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한 시인의 삶 닮은 듯 한적 / 전설·신비 남긴 채 시적 울림 커

광명은 빛살이 환하게 비친다는 뜻이리라. 그래도 어딘지 빛살이 다 비치지 않는 것 같은 변두리 기억을 안고 있다. 케이티엑스 광명역이 생겼어도 좀처럼 가볼 생각을 내보지 못했다.

어느 날 급한 일 있어 교통편 생각하다 광명역이 떠올랐다. 학교 있는 관악산 쪽에서 터널로 들어가자 불과 이십 분 만에 광명역에 도착, 이렇게 가까웠나, 내가 광명 쪽으로 한 걸음 성큼 다가선 순간이었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 문학평론가

이 나라에 역사 없는 곳 없고 문학 없는 곳 없다. 광명에는 서른 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기형도 시인의 문학관이 있다. 학교에서 그 빠른 터널을 타고 내비게이션을 치자 나는 어느새 그의 문학관 앞에 섰다.

겨울에는 문학관도 찾는 사람이 적다. 한적한 오후의 문학관은 온전히 내 차지다. 그는 언제 태어났나? 1960년이다. 언제 세상을 떠났나? 1989년이었다. 너무 짧다. 이상이 한국 나이 스물여덟에 요절했고 박인환이 서른한 살, 기형도도 불과 서른 살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태어나기는 연평이라 하니, 서해의 섬이다. 부친이 사업에 실패해서 섬으로 갔다 한다. 다섯 살에 시흥군, 지금의 광명시로 들어와 여기 사람이 되었다. 문학관 벽에는 그의 짧은 인생이 ‘요약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앙고등학교 출신이란다. 그렇다면 옛날 작가 채만식의 후배다. 연세대학교에서는 문학회에 들어 활동했다 한다. 연희전문을 나온 윤동주의 후배다. 방위로 군 생활을 하고 안양 지역의 문학동인 활동을 하고 광명의 ‘안개’를 노래한 시를 써서 문단에 나왔다.

그와 나는 세대적 차이가 크지 않았다. 그가 신문사에 입사했던 1984년에 나는 갓 서울의 대학에 입학했다. 그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1985년에 나는 데모를 하고 있었다. 1987년에 그는 문화부 기자로 일하며 유럽으로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그해는 ‘6월 민주항쟁’이 있었고 나는 서울시청, 신세계 앞에 있었다. 1988년에 그는 문학사에 남아 있는 ‘시운동’ 동인 활동을 했다. 나는 철 지난 ‘지하’ 운동에 매달리고 있었다.

뭘까, 그는 386세대의 맨 앞자리를 살다 갔으나 그들의 ‘운동’에서 한 발짝 비켜선 곳에 존재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나? 시흥군, “거대한 안개의 강”,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었던 유년기, 청년기의 가난의 기억 때문일까. 타고난 우울과 방랑벽 때문일까. 문학은 정치 그 자체일 수는 없다는 견결한 문학주의 때문이었을까.

널리 알려진 그의 시 ‘입 속의 검은 잎’을 읽을 때마다 나는 자신의 이른 죽음을 향한 그의 예감과 공포를 맛본다. 그것은 요즘 사람들이 해석하기 좋아하는 ‘현실’의 시는 분명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존재’의 시도 아니었다. 그는 현실과 존재 사이에서 삶의 우수를, 그 도저한 허무를 살다 가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그와 나는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나에게도 어느 날 그의 시의 한 구절이 가슴속에 들어와 앉은 날이 있었다. ‘빈집’이라는 시에서 그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어느 날 나는 시에 관한 긴 분량의 평론을 쓰면서 나도 모르게 “꽃을 잃고 나는 쓴다”라고 했다. 그때 이 “꽃”이란 이상의 소설 ‘실화(失花)’, 즉 ‘꽃을 잃다’의 꽃이기는 했으나, 그 시적 울림은 바로 기형도의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의 그것이었다.

기형도 문학관은 3층, 하지만 그의 인생은 1층 하나에 요약되어 있었다. 참으로 요약되기 어려운 삶의 ‘요약’을 둘러보고 나서 나는 비로소 이 문학관이 큰 길과 주유소 옆에 휑뎅그레 서 있음을 깨닫는다. 그의 죽음에 깃들어 있는 신화는 그가 1989년 3월 7일 새벽 종로의 파고다 극장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고 했다. 이 돌연한 죽음을 둘러싼 많은 이야기를 나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들어왔고, 생전에 그를 알았던, 지금은 하와이의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선배에게서도 직접 들었다.

그는 저 옛날의 이상처럼, 또 전후의 박인환처럼 전설과 신비를 남겨두고 떠난 것이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겨울 하늘에 아직 한줌 빛이 남아 있다. 아하, 바로 코앞에 1912년에 첫 삽을 떴다는 폐금광이 공원이 되어 있었다. ‘골드’, ‘금쪽’ 같은 귀한 빛을 찾아 동굴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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