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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속 또 하나의 세계… 미륵사의 시작을 엿보다

입력 : 2020-01-14 08:00:00 수정 : 2020-01-13 20:5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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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익산박물관 첫 특별전 ‘사리장엄’ / 석가모니의 몸에서 나온 ‘불사리’ / 최고 성물이자 예배의 대상 숭배 / 미륵사터 석탑서 발굴 ‘사리장엄’ / 백제시대 미륵사 창건 역사 담겨 / 왕흥사지 사리장엄 등과 한자리
충남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장엄구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국립익산박물관 제공

백제의 무왕 부부가 용화사 밑의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삼존이 연못에서 나타나 절을 올리니 왕비는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지어 달라”고 소원했다. 왕이 허락하니, 승려 지명이 신비로운 힘으로 산을 무너뜨려 연못을 메웠고, 거기에 탑과 회랑을 지어 사찰을 조성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전북 익산 미륵사의 창건설화다.

미륵사터에 위태롭게 서 있던 석탑의 해체, 보수작업이 한창이던 2009년, 사리장엄이 발굴됐다. 같이 출토된 사리봉영기에는 미륵사의 창건의 보다 객관적인 사실이 적혀 있었다. 왕비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 깨끗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 기해년(629)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하셨다”는 내용이다.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나온 사리봉영기에는 미륵사 창건을 주도한 인물이 ‘사택적덕의 딸’인 왕후로 기록되어 있다. 국립익산박물관 제공

미륵사지 한 켠에 자리 잡고 지난 10일 개관한 국립익산박물관에서는 ‘미륵사의 시작’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설화로만 전해지던 미륵사의 처음을 역사로 기록한 사리장엄구(보물 1991호)가 박물관의 대표 소장품이 되고, 박물관이 첫 특별전의 주제를 사리장엄으로 잡은 게 자연스러운 건 그래서다. 전시회는 미륵사지 사리장엄을 비롯해 부여 왕흥사지 사리장엄(국보 327호), 이성계 발원 사리장엄(보물 1925호) 등 당대의 가장 뛰어난 공예 역량이 투영된 대표작들을 모았다.

◆사리, 최고의 성물이자 예배 대상

기원전 5세기 인도 북부의 쿠시나가에서 열반에 든 석가모니의 몸에 나온 불사리(佛舍利)는 그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물질적 증거로서 최고의 성물(聖物)이자 예배의 대상이었다. 사리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신라 진흥왕 10년(549년)이 처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리는 부처의 몸에서 나온 것인 만큼 수량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 인골과 구별하기 어려운 유기물이나 진주, 귀한 보석 등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또 부처의 말씀과 가르침을 상징하는 ‘법사리’가 이용됐다. 현전하는 세계 최고의 목판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은제의 사리합, 구슬 등과 함께 경주 불국사 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의 일부였다.

최고의 성물로 인식되었던 만큼 사리와 관련된 신이(神異)한 이야기도 여럿 전한다. 2007년 출토된 가장 오래된(577년) 사리장엄인 왕흥사의 것은 “본래 사리가 2매였는데, 묻을 때는 신기하게 3매가 되었다”는 내용의 명문이 전한다. 또 스스로 빛을 내거나 아름다운 향을 풍기기도 하며, 공중으로 떠오르기도 하는 등 사리가 일으킨 기적같은 이야기가 많다. 박물관은 “(이런 이야기들은 당시로서는) 새로 전래된 종교인 불교에 대해 경외심을 높여주고 작은 사리를 깊이 경배하게 하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긴 시간이 흐른 뒤 사리는 배척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불교를 억압했던 조선에서의 일이다. 경기도 남양주 봉인사의 탑에서 나온 사리는 광해군 11년(1619년)에 청나라의 사신이 가져온 것이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신하들이 “사리라는 것은 중을 다비할 때에 나오는 것이니, 그것은 오랑캐의 도이며 더러운 물건”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이유로 비록 사리를 궁궐에는 들이지 못했으나 광해군은 어머니 공빈김씨의 능침사찰인 봉인사에 안치하며 세자의 장수와 자손번창을 기원해 개인적인 불심을 드러냈다.

◆사리장엄, 당대 최고의 공예품

사리는 워낙 귀한 것이어서 일반 백성들이 직접 보거나 탑을 지어 안치하는 일은 엄두를 내기조차 어려웠고, 이는 오직 왕실의 일로 여겨졌다. 사리의 전래에 대한 첫 기록에도 중국 양나라 사신이 가져온 사리를 신라 진흥왕이 직접 신하들을 이끌고 나가 맞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경주 감은사지 석탑에서 나온 사리장엄구는 통일신라 공예의 백미로 꼽힌다. 국립익산박물관 제공

사리 봉안이 왕실이 주최하던 일이었던 만큼 당대 최고의 장인과 공예기술이 투입되었음은 물론이다. 현전하는 사리장엄의 놀랍도록 세밀하고 정교한 모습이 증언하는 바다. 이런 노력을 기울여 제작된 사리장엄에 나라의 안녕과 번영에 대한 염원을 투영했다. 1959년과 1966년 각각 발견된 경주 감은사지 출토 사리장엄은 ‘통일신라 공예의 백미’로 꼽힌다. 감은사는 삼국을 통일하고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맹세한 문무왕을 위해 세운 사찰이다. 갑옷을 입은 신장(神將)과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보살의 부조로 화려하게 장식된 대좌 위에 낮은 난간을 두르고 한 가운데 사리를 모셨다. 연꽃과 불꽃 모양으로 장식된 보주형 사리기는 사천왕과 4명의 승려가 호위하고 있다. 상자 모양의 외함은 각 면에 사천왕 부조가 한 구씩 부착되어 있고, 구슬을 연결해 만든 문고리를 한 면에 2개씩 달았다.

이성계가 고려의 문화시중으로 있을 때 봉안한 사리장엄구에는 새 나라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다. 국립익산박물관 제공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개국하기 전 고려의 문화시중으로서 부인 강씨와 발원한 사리장엄에는 “미륵께서 세상에 나타나 사람들에게 받들어 보여 주시어 진실한 법화를 여는 것을 도우셔서 불도를 이룩하시길 기원한다”는 새 나라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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