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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몸으로 살아나가는 노인 어부의 이야기, 이자람의 ‘노인과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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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12-01 10:13:23 수정 : 2019-12-01 10: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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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꼬락 끝에서 정수리 끝까지 남아있는 모든 자존심과 긍지, 모든 기운”을 끌어 모아 낚싯줄을 당기는 늙은 어부와 자연의 대결을 소리꾼 이자람이 판소리 ‘노인과 바다’에서 펼쳐내고 있다. 두산아트센터 제공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가 서울 종로에서 소리꾼 이자람의 ‘노인과 바다’로 다시 태어났다. 판소리에서 출발해 연극·영화·뮤지컬·창극·밴드 등 예술 전방위에 걸쳐 자신의 기량을 시험해 온 이자람. 그는 지난달 26일부터 1일까지 서울 두산연강아트홀 소극장에서 전석 발매 즉시 매진된 판소리 ‘노인과 바다’를 펼쳤다. 이자람이 화문석으로 ‘판’을 펴고 부채를 든 건 삼 년만이다.

 

‘노인과 바다’는 간결하면서 힘찬 문장으로 ‘하드보일드’라는 문학 장르와 수많은 신도(信徒)를 만들어낸 대문호 헤밍웨이의 대표작이다. 멕시코만 앞바다 작은 돛단배에서 홀로 대자연에 맞서 승부를 겨룬 노인 ‘산티아고’의 투쟁을 작가 특유의 강건한 필치로 풀어냈다. 파란만장한 육십 평생 마지막 작품으로서 대문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이 작품을 이자람은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다. 쿠바의 늙은 어부와 판소리의 생경한 만남이었지만 원작의 무게에 압도되기는커녕 새로운 해석으로 대작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이자람은 누구인가. 중요 무형 문화재 5호 판소리(춘향가, 적벽가) 이수자로서 1999년 스무살 나이에 최연소 춘향가 8시간 완창 기록을 기네스북에 올린 소리꾼이다. 그 후 서양 소설이나 희곡을 판소리로 재해석해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며 활동 영역을 넓혀왔다.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사천가(2007)’와 ‘억척가(2011)’는 그 값진 결과물이다.

 

‘노인과 바다’는 이자람의 새로운 성취로 기록될 전망이다. 무엇보다 가장 오래된 문학 형태인 구비(口碑)문학으로서 판소리가 가진 힘을 마음껏 선보였다. 가락을 붙이지 않고 이야기하듯 엮어 나가는 아니리와 자진모리, 중모리, 엇모리장단 등에 실어 내보낸 33개 소리로 늙은 어부의 삶을 옹골차게 풀어냈다. 소리만으로 무대에는 한가로운 쿠바 어촌 풍경에서 고독한 밤바다까지 다양한 장면이 나타났다.

 

어느 순간에는 맨손으로 800㎏짜리 청새치의 억센 몸부림을 버텨내는 어부의 신음이 들렸고 다시 청새치가 흘린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상어가 나타났다 사라져 갔다. ‘상상력’이라는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 판소리에 보태지면서 아이맥스 영화보다도 생생한 심상(心象)이 만들어지는 무대였다. 객석은 ‘말로 전해 마음에 새긴다(구전심비·口傳心碑)’는 구비문학의 본래 뜻을 실감했다.

 

이자람 무대의 이러한 위력은 소리의 기반인 글에서 나온다. 글 쓰는 작창자로서 이자람은 탁월한 묘사와 과감한 재해석으로 자신만의 ‘노인과 바다’를 만들었다. 그 중 압권은 청새치와 대결이다. “훽, 퍽! 타르르르르/노인의 손바닥을 쓸며 낚싯줄이 타르르르르르르 풀려나간다”, “엎어졌던 노인이 두 다리로 딱 서서 고성대질왈, 아 오냐, 기다렸다 이놈아. 너 이제 싸울 준비가 되었느냐!”, “드디어 고기의 시커먼 그림자가 물결 사이로 비친다. 정말 크다! 흠뻑 젖은 노인이 한기를 느끼며 작살을 흘긋거리며 발꼬락 끝에서 정수리 끝까지 남아있는 모든 자존심과 긍지 모든 기운을 끌어모아 낚싯줄을 다시, 당긴다.…살아온 모든 삶을 몽땅 쏟아 낚싯줄을 당긴다!”

 

연극 평론가 이진아 숙명여대 교수는 작품해설서에서 “글 쓰는 이자람의 솜씨는 참으로 빼어나다. 눈앞에 특정한 공간이 그려지듯 펼쳐지는가 하면, 고집스럽고 슬프고 뒤틀리고 쓸쓸한 인물의 면면이 오래 마주한 듯 느껴지기도 한다. 밀고 당기고 어그러졌다가 풀리는 사건의 요모조모가 이야기꾼의 마음과 함께 전달되기도 한다”고 평가했다.

 

특히 이자람의 ‘노인과 바다’가 빛나는 대목은 늙은 어부의 사투가 관객에게 보내는 긍정의 메시지다. 허무주의 작가였던 헤밍웨이 원작은 쓸쓸히 항구로 돌아온 노인이 자신의 초라한 침대에 누워 좋았던 시절의 사자 꿈을 꾸는 것으로 끝난다.

 

지난 11월 27일 두산아트센터에서 소리꾼 이자람이 판소리 ‘노인과 바다’ 공연 후 관객과 대화하고 있다. 두산아트센터 제공

 

이자람의 결말은 다르다. 이자람은 “작업과정에서 가장 힘있게 다뤄야 할 것이 노인의 건강한 체념인 줄 알았다가, 버리지 않는 희망인 줄 알았다가, 주어지는 삶을 버텨내는 것인 줄 알았다가, 청새치와의 싸움인 줄 알았다가, 지금은 그 모든 크고 작은 싸움이 작업을 하는 나 스스로에게 와 있다”며 “정말 수많은 종류의 싸움이 삶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느껴진다”고 작품해설서에서 밝혔다. 그 결과 이자람의 ‘노인과 바다’에선 잠에서 깬 노인이 식사로 기력을 다시 찾은 후 이웃 소년과 여유 있게 농을 주고받으며 바다로 다시 나설 마음을 다잡는다. 스스로 ‘너무 커다란 성공’이란 ‘상어’와 싸워왔다고 밝힌 이자람은 각자의 바다에서 고독한 싸움을 벌이고 있을 모두를 이렇게 격려한다.

 

“아마도 노인은 손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두시면 짐을 챙겨 바다로 나아갈 것이고/저 바다도 여느 때처럼 노인에게 호락호락하진 않을 테지만/그들의 삶은 변함없이 계속 시간을 타고 나아간다/삶이 갑자기 꽃가루를 뿌려주건/갑작스레 모든 것을 빼앗아 가건/매일 찾아오는 아침과 밤을 헤쳐나가는 우리들이 그렇듯이/어부는 바다로 소리꾼은 판으로/삶이 주는 일희일비(一喜一悲)에 열심히 희(喜)하고 열심히 비(悲)하며/계속해서 먹고 자자 끊임없이 먹고 싸자.”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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