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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인 K-문화 관심 높지만 / 우리 스스로의 인식은 표피적 / ‘한류, 지구촌 정복’ 환상 벗고 / 우리문화 속살 깊이 이해해야

올해는 아프리카돼지열병(ASF) 확산 방지를 위해 많은 지방 축제가 취소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가을 축제를 즐기려고 계획했던 사람이 ‘방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나름대로의 축제를 즐겼다고나 할까. 이러저러한 가족여행, 꽃소식, 단풍소식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라왔다.

이런 글도 있었다. “식영정(息影亭)에 들렀습니다. 입장료도 없고, 주차장도 없네요. 잠깐 구경 삼아 가볼 만한 곳입니다. 길게는 말고(…) 볼 게 없어요.”가볼 만한데 길게는 말고 잠깐 들러볼 만한 곳이란다. 정말 그런가. 이 글을 접한 순간 필자의 뇌리를 스치는 한 사람이 있었다. ‘민낯이 예쁜 코리안’의 저자 베르너 사세다. 사세는 독일 보훔대학교에서 ‘계림유사에 나타난 고려방언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인 최초의 한국학 박사다. 1992년 함부르크대학에 한국학과를 개설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유럽한국학협회장을 지냈으며, 2006년 함부르크대학을 은퇴하면서 한국으로 영구 귀국했다. 한국 전통문화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파란 눈의 외국인이다.

박치완 한국외국어대 교수 문화콘텐츠학

그가 쓴 ‘민낯이 예쁜 코리안’에 식영정에 관한 글이 나온다. 한때 담양에서 산 적도 있고, 고려풍속사가 전공이니 그가 식영정을 찾았을 것은 당연하다. 그가 처음 방문했을 때 식영정 관광 안내판에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고만 돼 있어서 그 뜻이 무엇인지 궁금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문헌을 찾아 식영정이 ‘장자’에 나온 구절임을 확인하고,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왜 달리는지, 어디를 향해 달리는지”를 살피며 살라는 식영정의 본래 의미를 자신의 책에 자세히 적고 있다. 이방인인 그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다. 그래서 그는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문화의 깊이, 전통문화의 의미, 성숙하지 못한 우리의 문화의식에 대해 충고한다. 그리고 젊은 세대를 향해 한국을, 한옥을, 한글을, 한복을 사랑하라고 조언한다. 그의 충고와 조언은 잠깐의 구경거리, 인스타 인증용으로 한류를 생각하는 우리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한다.

경복궁을 위시한 궁궐 인근의 가게가 하루건너 하나씩 한복대여점으로 바뀌고 있다. 그만큼 외국인에게 한옥, 한식, 한복 등 한국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의 한류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표피적이고 일천한 수준이다. 한류를 언급할 때도 ‘전세계 강타’, ‘미국시장 진입’, ‘북·미시장 침투’, ‘지구촌 정복’과 같은 1차원적 표현을 스스럼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이런 표현은 민간, 정부 보고서 할 것 없이 등장한다. 전세계의 문화산업을 한류가 ‘지배’하기를 은연중 바라는 것인가. 문화의 본질은 경쟁하고 지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교류하면서 그 차이를 상호 발견하고 습득하는 데 있다. 문화는 자기의 것이 최고라고 주장한다고 격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문화는 소비의 품목이나 거래의 대상에서도 ‘예외’다. 문화는 세계화론자들이 외치는 것처럼 매끈하고 균질한 포장도로를 맘껏 질주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국제시장에서 고수익을 올리려면 월리시(Wallish·월가의 비즈니스 영어)에 능통할 필요가 있겠지만 영·미어는 한글이 아니라는 것도 잊어선 안 된다.

문화 인류 심리학자인 헤이르트 호프스테더는 ‘세계의 문화와 조직’에서 ‘문화의 재난’은 개인이나 국가가 로컬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포기할 때 일어난다고 했다. 우리 모두가 ‘한류의 세계시장 정복’이라는 턱없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로컬 문화, 전통문화를 사랑하는 것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다. 로컬 문화, 전통문화가 모여 공동체 문화가 된다. 한류문화 콘텐츠를 해외에 얼마나 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한옥, 한식, 한복과 같은 한류의 속살과 그 깊이를 이해하고 있는지 되돌아볼 때가 됐다는 것이다. 식영정과 같이 주인의 사랑을 받지 못해 “길게는 말고(…) 볼 게 없는” 그저 SNS 인증용의 우리 문화유산이 담양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박치완 한국외국어대 교수 문화콘텐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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