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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와 객석 경계 허물어 연극의 고정관념을 깨다

입력 : 2019-11-13 04:00:00 수정 : 2019-11-12 21:0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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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 반 호브 연출작 ‘로마 비극’ / 셰익스피어 작품 엮어 / 현대적 시각으로 재현 / 양복 입은 로마 위인들 / 대형 화면으로 생중계 / 형식·내용 모두 파격적 공연시간만 5시간45분 생생한 현장감 살려낸 탁월한 연출력 돋보여

이런 연극이 또 있을까. 지난 8일부터 10일까지 사흘간 서울 LG아트센터를 옛 로마 영웅의 포효와 탄식으로 꽉 채운 연극 ‘로마 비극’ 이야기다. 이 작품은 내한 공연 일정이 발표된 순간부터 눈 밝은 국내 관객에게는 ‘꼭 봐야 할 작품 1순위’였다. 이미 우리나라에서 ‘오프닝 나이트’(2012), ‘파운틴헤드’(2017)로 절대적 지지를 받은 당대 최고 연출가 이보 반 호브의 소문난 걸작이었기 때문이다.

벨기에 출신 이보 반 호브는 깊이 있는 통찰력과 탁월한 인물 해석, 무대와 영상을 아우르는 세련된 연출로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한 연출가로 각광받고 있다. 고전을 해체해 현대의 프리즘으로 투영해봄으로써 이를 재발견하는 작업을 추구해온 그의 작품 중에서도 2007년 초연된 ‘로마 비극’은 탁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올해 마지막 LG아트센터 기획 공연으로 무대에 오른 ‘로마 비극’은 형식과 내용 모두 파격적이었다. 공연시간은 무려 5시간 45분에 달했다. 셰익스피어가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쓴 비극 ‘코리올라누스’, ‘줄리어스 시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3편을 시대순으로 절묘하게 엮어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한편의 대하드라마로 만들었다.

셰익스피어의 고전 희곡 3편을 모아 현대화한 명연출 이보 반 호브의 ‘로마 비극’.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죽은 시저를 연단 위에 올려놓고 로마 시민을 향해 열변을 토하고 있다. LG아트센터 제공

‘햄릿’, ‘리어왕’, ‘맥베스’ 등 38편의 희곡을 남긴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서도 대중에게 낯선 세 편의 고전을 한꺼번에 봐야 하는 관객이 장시간 관람의 고통을 잊게 만든 키워드는 ‘시·공간의 동시대성’이었다. 언어의 연금술사 셰익스피어 특유의 장황하나 아름다운 대사의 맛깔스러움은 여전했다. 하지만 시저와 브루투스 등 고대 로마 위인들은 헐렁한 로마 전통의상 ‘토가’ 대신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CNN 뉴스 화면에 등장할 법한 회의장 등에서 마이크 앞에 섰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역시 공연 내내 활약한 카메라맨에 의해 무대 위에 설치된 대형화면으로 생중계됐다.

로마 인물들 옆자리는 공연 내내 객석에서 올라간 관객이 차지했다. 200명 안팎인데 한편에선 극이 진행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선 잠시 연기 공백이 생긴 배우들이 바로 옆 관객과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눌 정도로 무대는 자유로웠다. 때로는 불쑥 객석에서 민중의 대변인을 맡았던 로마 시대 호민관들이 일어나서 공화정의 민의를 주도했다. 그 결과 관객에게는 어느 순간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사라진다. 자연스레 누구나 한번쯤은 무대에 오르는데 공연 중인 무대에서 조명을 받으며 객석을 바라보는 느낌은 잊을 수 없는 진기한 경험이었다. 소파 바로 옆에 앉은 시저의 독백을 듣고 있노라면 현실과 무대의 경계마저 희미해질 정도로 ‘로마 비극’의 동시대성은 강력했다.

연극 ‘로마 비극’ 중 한 장면. 배우가 열연 중인 무대에 관객이 자유롭게 오르내리면서 동시대성이 극대화됐다. LG아트센터 제공

뉴욕에서 작업 중이라 이번엔 자신이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극단 ‘인터내셔널 시어터 암스테르담’과 함께 방한하지 못한 이보 반 호브는 연출 노트와 우리나라 관객에게 보내는 글을 통해 “‘로마 비극’은 정치에 관한 대규모 콘퍼런스의 장이 될 것이며 그 안에서 여러 사례가 관객에게 제시될 것”이라며 “휴식 없이 논스톱으로 공연되는 이 작품은 24시간, 365일 돌아가는 이 세계의 정치를 반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다시 새롭게 만든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 이 시대의 이야기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 결과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곳에서 각기 다른 관객이 셰익스피어의 캐릭터를 통해 다양한 정치인들과 정치체제를 반복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라고 저는 확신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형식은 파격적이나 효과적 연출에서 되살아난 원작의 힘은 여전했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건 역시 생생한 현장감 속에 입체감 있게 그려지는 로마 위인들이다. 절대적 업적으로 로마 공화정을 위협하는 첫 제왕 후보였으나 오만함 때문에 자멸한 코리올라누스, 그리고 절명의 순간에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탄식해야 했던 줄리어스 시저와 브루투스가 지나간 무대에는 마지막으로 죽은 시저를 후광 삼아 권력을 잡았으나 지독한 사랑 때문에 몰락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그의 제국을 무너뜨린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올라왔다. 모두 열네 명의 배우가 많게는 1인 3역을 맡으며 오랫동안 기억될 열연을 펼쳤다. 특히 공화정에 대한 믿음 때문에 경애하는 시저를 죽이게 된 브루투스의 고뇌, 제국 대신 사랑을 택해 몰락하면서도 끝까지 품위를 잃지 않은 안토니우스의 위엄과 클레오파트라의 엄청난 카리스마는 객석을 사로잡았다.

파격적 형식과 배우의 열연을 더욱 빛나게 한 건 이보 반 호브의 탁월한 연출이었다. 가장 인상적 장치는 무대 정중앙에 설치된 두 장의 유리 칸막이. 등장 인물은 매번 이곳에 눕는 것으로 비극적 죽음을 완성했다. 그 장면은 마치 사건 현장 채증 사진처럼 대형 스크린에 ‘줄리어스 시저 100-44 B.C’란 자막과 함께 비치면서 역사의 한순간으로 박제됐다. ‘로마 비극’은 음악 역시 인상적이었다. 무대 전면 좌·우측에서 두 명의 연주자가 다양한 악기로 구사한 효과음·배경음만으로 놀라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음악 효과의 압권은 서방 세계 패권을 놓고 벌어진 악티움 해전 등 총 다섯번의 전쟁 장면이다. 서치라이트를 회전시키고 초대형 징인 ‘탐탐’을 태풍처럼 몰아치는 것만으로 전장의 긴장과 공포가 무대에서 객석으로 넘쳐 들었다. ‘로마 비극’은 세상에 둘도 없을 작품이었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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